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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전 -물처럼 바람처럼 기간: 2010.12.22 - 2011.2.27 장소: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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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언서판(身言書判). 예전에 행동과 말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고 또 생각은 물론 글씨를 보고서도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고 했다. 19세기 위대한 예술가이자 학자였던 추사 김정희의 글씨는 일반 사람의 눈에는 각지게 꺾인 선이 특징으로 보인다. 부드럽게 흘러가는 행서에서 조차 ‘흡’하고 숨을 멈추면서 붓을 모나게 제친 획들이 느껴질 정도이다. 실제 추사의 일생은 만만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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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만 27살때의 글씨(1796년) |
『華東書法』31살때 지은 법첩(1800년) | |
타고난 재능과 각고면려의 수련을 통해 그의 학문과 예술은 중국의 대학자 조차 탄복할 정도의 천재성을 보였다. 이런 정도라면 인생은 의당 활짝 꽃피고도 남았어야 했다. 세도 정치에 휘둘리며 그는 중년 이후 두 번에 걸친 9년의 유배 생활을 겪는 辛苦의 삶을 살았다. 일반 사람들이 추사 글씨, 이른바 추사체를 볼 때 굵고 뭉툭하게 시작해 가늘게 마무리되며 중간 중간에 튀어 오르듯 반전하는 획 위에 그의 삶이 오버랩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글씨에 사람이 보인다는 생각에 수긍을 하게 되는지 모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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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광수색(山光水色)》 종이에 먹 57.5×87.8cm 개인 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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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이삼만 글씨의 획은 어디쯤에서 숨을 쉬고, 또 어느 순간에 붓을 멈추고 찰라의 착상을 가다듬었는지 가늠할 수 없이 흘러가기만 한다. 그래서 혹자는 물 흐르듯이 흘러간다고 유수체(流水體)라고 했다. 낮은 곳을 찾아서 그냥 흘러가는 물. 물에 비유해도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1770~1847)은 애초부터 낮은 곳에서 시작한 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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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지환의 양주사(王之渙 凉州詞)》45세 1814년,33.3x16.8cm 김민영소장 | |
이삼만의 전기는 참으로 밋밋하다. 전주의 몰락한 반가의 후예로 태어나 평생 벼슬을 한 적이 없다. 또 중앙 문예계에 크게 이름을 떨친, 인생의 하이라이트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끼니를 걱정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오로지 글씨에 뜻을 두고 수련에 수련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일가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필력을 후반 생의 양식으로 삼았던 書家이다. 말하자면 조선후기 상업경제가 발달하는 가운데 지방에 등장한 직업 서예가였다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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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화의 어부사(張志和 漁父詞)》45세 1814년,33.3x16.8cm 김민영소장 | |
그는 직업적 서가로 입신하기 위해 엄청난 수련을 겪었다고 했다. 응당 하는 이야기이지만 몽당 붓을 버린 것에 마당에 무덤이 될 만큼 쌓였고 밑창이 난 벼루가 몇이나 됐으며 앞마당의 연못물이 언제나 시꺼매졌다는 정도의 수련을 거쳤다.
실체 창암은 죽기 1년 전인 1846년에 제자인 듯한 원규라는 이에게 ‘매일 맑은 새벽 서법을 한번 읽어 보아라. 그리고 매일 해서 50자를 쓰라(每日淸晨書法一遍 每日寫楷五十字)’는 교훈을 남겼다. 그리고 이어서 ‘남에게 거만하지 말고 책을 많이 읽으며 시를 많이 짓고 몸을 소중히 하라(勿傲人 多讀書 作詩句 持身以重)’라고 가르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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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咨汝元奎書》77세,1846년 28.8x14cm 옥과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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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듯한 집안의 출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앙 문예계에 연줄도 없었던 시골 書家 창암은 이런 수련과 겸양의 처신을 평생 마음속에 새겼을 것이다. 창암 스스로 남긴 유수체는 이렇다 할 스승이 없었던 향토적 수련과 겸양의 자세에서 우러나온 서체라고 할만하다. 창암은 서예의 원리에 대한 글-이른바 서법이라 불릴 글을 여럿 남겨 제자들에게 주었는데, 거기에 자신은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 711~791)과 조선중기의 원교 이광사(1705~1777)를 사숙했노라고 적고 있다.
이삼만은 추사보다는 16살 위이지만 중앙, 중국에 그 이름을 혁혁하게 떨친 추사(1786~1856)와 늘 비교되며 실력 이상의 저평가를 받아왔다. 비교는 당대뿐만 아니라 최근에도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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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운무적 득필천연》28.6x151.3cm, 김익두 소장 | |
추사의 삶과 예술을 알기 쉽게 풀이한 유홍준의 『완당 평전』에도 추사의 위대성을 돋보이기 위해 창암을 그저 무대 장치 쯤으로 소개한, 가혹한(?)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인용하면 이렇다.
「창암의 글씨를 보면서 완당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 세련된 모더니스트가 한 점 거리낌도, 부끄러움도 없이 풍기는 촌티 앞에 당혹했을 희한한 풍경을 나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완당의 눈에 이쯤 되면 촌티도 하나의 경지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완당은 할 말을 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윽고 완당이 입을 열었다.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그러자 창암의 제자들이 수모당한 스승을 대신하여 완당을 두들겨팰 작정으로 몰려나가려고 하니 창암이 앞을 막으면서 말렸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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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기분천(渴驥奔川)> 51세, 1820년 39x28.5cm 전북도립미술관 소장 | |
추사가 제주도로 귀양을 가는 도중 전주에 들러 창암과 그의 제자들과 대면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재미나게 쓴 글이다. 그런데 이것은 평전 속에 독자를 즐겁게 하기 위한 일화로 실제 추사는 제주로 귀양 가기 이전부터 전주 쪽에서 들려오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추사는 50살 나던 해에 집안 족척에 해당하는 김양성(金養誠)의 묘비를 썼는데 추사는 앞면의 글만 썼고 뒷면의 행장은 이삼만이 썼다. 이 비를 쓸 무렵 추사는 한창 중앙 정계에 이름이 쟁쟁했고 가정도 부친이 유배에서 돌아오는 등 안정돼 있었다. 비문의 앞, 뒷면을 쓰면서 서로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은 조선 시대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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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성 묘비》앞면 김정희, 뒷면 이삼만(66세),탁본 106.2x129cm 김진돈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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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전주 일대의 전해지는 추사와 창암 사이의 에피소드는 좀 다르다. 1840년 9월초 곤장 36대를 맞는 뒤 추사는 제주도 유배 길에 올라 20일이 지난 9월 하순에 전라도 해남에 도착했다. 그리고 바람이 잦기를 기다려 27일 제주로 가는 배에 올랐다고 했다. 그러니까 9월 초순에서 9월 하순까지의 사이에 추사는 이삼만이 있는 전주를 지나간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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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법-기본획》62세, 1831년,25.4x19.7cm 개인소장 서예의 기본인 한 일(一)자의 마제잠두(馬蹄蠶頭)를 설명한 서첩이다. | |
전주에 전하는 말은 이때 추사는 이삼만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전하지 않으나 장독으로 인한 몸의 형편도 그렇고 부당한 옥사 때문에 부글부글 끓었을 불편한 자존심도 한가로움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8년뒤인 1848년 12월초 유배에서 풀려난 추사는 전주를 지나면서 창암을 만나보려 했단다. 그러나 그가 이미 죽고 없다는 말을 듣고 추사는 생전의 창암을 만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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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관월(臨池觀月)》나무에 판각 27.5×72.5cm 전북대박물관 소장 | |
전주 에피소드에는 마지막으로 제주에서 풀려날 무렵의 추사가 창암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는 해석이 덧붙는다. 어쨌든, 창암과 추사는 역사위에 하나의 점만 남기고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내내 창암은 추사의 무게 속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이번 전시는 삼만(三晩)에 하나를 더 보태 뒤늦게(晩) 열린 평가의 기회이다. 유수체 글자는 물론 수련기의 반듯한 해서, 현판의 大字書 그리고 서법에 관한 기록 등 이번 전시는 평가를 위한 자료 수집의 성격이 강하다. 그렇다면 창암 서예의 세계에 대한 평가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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