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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 명청 회화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 간 : 2010년 12월 07일- 2011년 01월 30 장 소 : 국립중앙박물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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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있는 중국 회화는 많지 않다. 수많았던 교류를 생각하면 이토록 적은 유물는 이 부분이 어떤 사각 지대에 놓여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이다. 국박의 중국회화 컬렉션은 1908년부터 1917년에 수집한 것이 1차 근간이 된다. 이는 제실 박물관이 처음 만들어지면서 대량으로 유물을 사들일 때 함께 들어온 것들이다.
그래도 컬렉션이 충실해진 것은 1980년대 초 동원 이홍근 선생이 많은 유물을 기증하면서 상당수의 중국 회화가 따라 왔기 때문이다. 이때 기증받은 물량이 73건 213점이다. 이후에도 본격적으로 중국회화 수집에 나선 적은 별로 없었다. 수집에 체계적으로 노력하고자 한 것은 용산에 박물관이 들어서고 중국관이 만들어지면서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박 컬렉션의 청대 회화를 교류라는 관점에서 볼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이다. 그는 명성황후 민비의 친정 조카로 구한말 격동의 역사 속에 주요 정치인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서화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정치의 소용돌이를 피해 만년에 상해에 망명해 살았는데 그때 주변에는 늘 현지의 서화가, 문인들이 들끌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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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곡상《죽림서실도》 130.2x44.9cm | |
그런 사정을 말해주는 자료로 우선 오곡상(吳穀祥 1848~1903)이 그린《죽림서실도(竹林書室圖)》가 있다. 오곡상은 절강성 사람으로 산수 인물을 잘 그렸는데 스스로 吳派(심주로 시작되는 강남의 문인화 화풍)의 맥을 이었다고 자부하는 문인화가였다.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누옥 한 채를 그려 넣고 그는 이렇게 적었다.
千尋脩竹圍幽室 萬卷詩書坐詠吟 壬寅四月四日 秀水吳穀祥寫於千尋竹齋 키 큰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조용한 집에서 만권 되는 책을 조용히 읽고 있네 임인년(1902년) 4월4일 수수 오곡상이 천심죽재에서 그리다
천심수죽위유실 만권시서좌영음 임인사월사일 수수오곡상 사어천심죽재
천심죽재는 민영익이 상해에 살던 때의 집의 당호이다. 또 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상해에서 그림, 특히 대나무를 그릴 때에 이 「천심죽재」라는 호를 낙관으로 많이 사용했다. 또 좋은 그림을 손에 넣으면 ‘천심죽재 주인 소장’이라는 글귀를 적어 넣기도 했다. 앞서의 오곡상 이외에 유례(兪禮 1862~1922), 반경(潘耕 ?~1917), 정인(丁仁 1879~1949), 예여(倪茹 19세기 활동) 등 5명이 양류 누대(楊柳樓臺)라는 장소를 그린 화첩에 바로 이 「천심죽재주인장」이란 글귀가 적혀 있다. 양류 누대는 청나라때 유명시인 원매의 손자 원조지(袁祖志)의 정자였다. 이 화첩은 아마 민영익이 상해에 있을 때 구입해 조선에 가지고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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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 쓰여 있는 「천심죽재주인장」이란 민영익의 묵서 |
《양류누대첩》의 유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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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익은 왕실의 척신이어 상해 망명생활에도 크게 곤궁하지는 않았다. 정치의 중심에 비켜서 있는 소외감을 제외한다면 생활은 넉넉했고 주변에는 늘 중국인 친구와 조선인 지지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그는 동기창의《산수화첩》을 손에 넣었다. 동기창은 명나라 말기 화단의 중심적 존재였다. 남종화 우위론을 제창한 이론가였을 뿐 아니라 명목뿐이긴 하지만 남경 정부의 문교부 장관의 벼슬도 하고 있었다. 또 대단한 컬렉터이자 스스로 화가였다. 청나라 때가 되면 이미 그의 그림 값은 상당히 비쌌는데 민영익은 8점으로 이뤄진 산수화첩을 손에 넣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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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창《산수화첩》의 첫 장. 오른쪽 하단 위쪽 도장이 민영익의 수장인이다. 한 점 | |
각 화폭은 동기창 특유의 맑은 기운이 감도는 산수화로 나무는 성긴 가운데도 분명한 윤곽을 보이면서 활엽수, 침엽수의 구분이 확연하도록 그려져 있다. 또 멀리 산의 모습은 마치 삼 줄을 풀어헤친 것과 같다는 피마준(披麻皴)을 많이 사용해 부드럽게 골 주름이 그려져 있다. 또 물가의 파도는 약간 마른 붓을 옆으로 긋는 작업을 반복해 담당하면서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 화첩의 첫 번째 장에 그림외 여백에 원정(園丁)이란 아호를 새긴 소장인이 찍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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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창《산수화첩》의 한 점 | |
또 구한말에 군수를 지낸 김용진(金容鎭)이란 서화가가 있다. 아호는 영운(潁雲) 이외에 멋진 구룡산인(九龍山人)이란 호도 사용했는데 원래 안동 김문 출신으로 글씨를 잘 썼다. 그리고 일제 때에는 일체 벼슬을 하지 않다. 해방이 된 뒤에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서예부 심사위원, 고문 등을 역임했다. 본인이 글씨 뿐 아니라 그림도 잘 그렸는데 때문에 감식안도 매우 뛰어났다. 그의 소장인이 찍혀 있는 그림 중에 청나라 말기 화조화를 잘 그린 임백년(任伯年 1840~1896)의 그림이 하나 들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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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백년 《화조도》17.9x52.0cm 김용진가진장 도장 | |
따로 윤곽을 그리지 않는 몰골법(沒骨法)으로 꽃나무 가지를 그린 위에 머리가 하얀 백두조를 한 마리 그린 그림이다. 갈색 나뭇가지와 파란 잎과 빨간 꽃 그리고 흰 새의 머리가 잘 조화를 이루는 그림이다. 임백년은 이 그림을 1874년 성당(星堂)이란 사람에게 그려주었다고 낙관을 적었는데 그 반대쪽 왼쪽 하단에 「김용진가진장(金容鎭家珍藏)」이란 구룡산인의 수장인이 찍혀있다. 도장으로만 봐서는 언제 어느 때 입수한 것인지를 알 수 없지만 단정한 그림이 풍기는 인상에서 새삼 그의 높은 감식안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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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 《비설천산도》 1650년 178.0x56.0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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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한중 교류와는 무관하지만 최근 중국시장의 열기와 관련된 작품이 있어 소개한다. 명말과 청초를 배경으로 절강성에서 활동한 작가 중에 남영(藍瑛 1585~1664)있다. 그는 이른바 직업적 문인화가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그림은 기량이 뛰어날 뿐 아니라 격도 매우 높다. 남영이 그린 《비설천산도(飛雪千山圖)》에는 상단에 건륭제의 제시가 적혀 있는데 이것 외에도 그림에 찍혀 있는 수많은 인장이 이 작품이 건륭제의 궁정 컬렉션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런 도장 가운데 <석거보급(石渠寶笈><신천주인(信天主人)>이 있다. 이 두 도장은 요즘의 중국 시장과 관련해 약간 할 말이 있는 도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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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거보급> |
<신천주인> | |
금년 들어 확실히 베이징은 세계미술시장에서 뉴욕, 런던에 이어 3대 거점중 하나가 됐다. 여기에는 중국 미술시장의 고가 거래품들이 큰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 중에서도 석거보급 인장이 찍힌 그림들이 최고가를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 12월4일 베이징 바오리 경매에 나와 1억6,800만위안(한화 약285억원)에 팔린 송나라때 그림《한궁추도(漢宮秋圖)》는 건륭제 컬렉션인 석거보급에 올라있는 작품이다. 이 경매에는 그 외에도 11점의 석거보급 수록작이 출품됐는데 명나라 신종때 화가 주지면의 《백화도(百花圖)》역시 9,072만 위안에 팔려 주변을 놀라게 했다. 석거 보급에 올라있는 작품이란 곧 그림 속에 <석거보급(石渠寶笈>이란 인장이 찍혀 있는 작품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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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7일 홍콩소더비에서 180억원에 낙찰된 <신천주인> 인장 | |
이 그림에 찍혀 있는 또다른 인장인 <신천주인>은 건륭제가 만들어 쓰던 도장으로 여러 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 한 점이 지난 10월7일 홍콩소더비 경매에 나와 한국 돈으로 무려 180억원에 팔렸다. 남영의 그림에 있는 <신천주인> 도장은 소더비 경매에 나온 도장과는 조금 다르다. 하지만 <석거보급>과 나란히 찍혀 있다는 점에서 요즘 중국 시장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을 ‘명품’ 이란 점은 분명하다.
이 전시 도록의 새로운 특징은 그림에 찍힌 인장을 모두 판독해 실어 주었다는 친절함에 있다. 인장을 판독한 전문가는 이 사이트에 「그림과 글씨속의 인장 이야기」를 연재중인 고재식 선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