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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록 또는 수장인으로 감상하는 명청 회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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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 명청 회화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 간 : 2010년 12월 07일- 2011년 01월 30 장 소 :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명 : 명청 회화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 간 : 2010년 12월 07일- 2011년 01월 30
             장 소 : 국립중앙박물관

흔히 중국 회화사에서 송나라와 원나라의 그림을 한데 합쳐 송원이라 하고 명과 청을 묶어서 명청 회화라고 부른다. 관행상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내용적으로 보아도 한데 묶어 생각해도 될 만한 공통 분모가 몇 있다. 명청만 보면 그 이유중 하나가 그림 제작과 소비에 관한 문제이다.

 
명대 그림은 크게 궁중회화, 직업적인 절파계통
그리고 문인화 그림으로 나눌 수 있다.
궁중 화원의 대표격인 여기(呂紀 15세기초~1505년)의《화조도》156.7x77.0cm
절파 계통을 대표하는 오위(吳偉 1459~1508)의 《주악도(奏樂
圖)》151.3x95.2cm

그 이전 시대에 그림이 제작되고 소비되는 가장 큰 중심이 궁정이었다. 그러나 명청 시대가 되면 민간 경제가 크게 발달하면서 궁정과는 별개로 민간에서도 그림 수요가 늘어났다. 즉 민간에서 그림의 제작, 소비가 늘어나고 그림 감상도 보다 전문화되었다.

양적 변화는 언제나 질적 변화를 가져오는 법. 회화 쪽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났는데 명청 시대가 되면 그림의 소재는 말할 수 없이 다양해졌고 작가도 궁정 화가에 직업 화가, 거기에 그림 솜씨가 있는 문인 화가까지 엄청난 숫자의 화가들이 등장했다. 또 회화 이론도 폭과 깊이를 더하며 결정적으로 문인화론과 같은 새로운 이론도 출현하게 됐다.

그래서 그런 다양한 명청 시대의 회화를 ‘한 눈에’ 혹은 ‘단번에’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또 연구자이거나 박물관 학예관이거나, 이해를 도와주려는 쪽에서도 고민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거두절미하고 주요 작가의 대표작을 죽 늘어놓는, 이른바 요점정리식이라 해도 상당한 견식을 전제로 조리나 체계가 있어야 한다.

오파 문인화를 대표하는 심주의 영향을 받은
장굉(張宏 1577~?)의《명승도첩》중「취옹정」30.3x23.6cm

이번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는 친절하게 일목요연이 명청대 회화의 흐름을 소개하는 전시는 아니다. 전시 제목에 있듯이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소수의 명청시대 회화를 보여주는 전시다. 쉽게 말하면 제목은 10대 가수가요제이지만 정작 10대 가수는 없고 나훈아도 너훈아 정도가 출연하는 노래 잔치인 셈이다.

사정이 이러니 관람하는 쪽도 방법을 달리 해야 한다. 마음에 드는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는 징검다리식 감상도 괜찮다. 또 절충된 감상법으로 당시 조선과의 교류속에 등장하는 명청시대 작가의 작품을 챙겨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명나라(1368~1644)과 청나라(1636~ 1912)는 조선 왕조와 시기적으로 겹치고 끊임없이 외교 사절을 주고 받았기 때문에 수집 경위야 어떻든 국립중앙박물관 컬렉션에 그 관계를 말해주는 자료들이 들어 있다.

맹영광
《계정고사도》107.9x59.1cm

우선 맹영광(孟永光)의 작품 《계정고사도(溪亭高士圖)》를 보자. 무성한 나무로 둘러싸인 정자에 가슴을 반이나 풀어 제친 채 탑상에 한가롭게 걸터앉아 있는 고사가 그려져 있는 그림이다. 뒤쪽으로 펼쳐져 있는 산자락은 높이 이어져 제법 깊은 산속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하지만 숲이 우거진 정경을 말해주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 그리고 정자 속의 가구 등은 매우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명나라말 청나라초에 활동한 맹영광은 청나라 궁정화가로 병자호란 때 심양에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돌아올 때(1645년2월) 함께 따라온 화가다. 이후 1648년까지 조선에 머물며 궁정을 중심으로 당시의 문인들과 교류하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인조실록』이외에 그와 교류했던 김상헌의『청음집』이하곤의 『두타초』등 문집에도 보인다.

맹영광
《해상군선도》77.0x48.2cm
맹영광
《패검미인도》99.1x43.0cm

맹영광
《어주도》50.6x43cm

박물관에 는 이 그림 이외에 1636년에 그렸다는《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와 모두 1640년대의 그림인《패검미인도(佩劍美人圖)》《어주도(漁舟圖)》이 있다. 이들 그림이 소현세자를 따라 왔을 때 가져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중국에 그의 작품이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사실을 보면 당시에 그의 그림들이 조선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꽤 높은 그림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로 주지번이 있다. 남경 출신으로 장원 급제한 그는 맹영광 보다 앞서 1606년 사신으로 조선에 온 인물이다. 아울러 그는 미술사에서, 중국 남종화가 조선에 전해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 까닭은 그는 사신으로 오긴 전인 1603년, 당시 간행된 화보 『고씨화보(顧氏畵譜)』의 서문을 썼기 때문이다. 이 화보는 역대 유명 화가의 그림을 목판으로 새긴 화보집인데 이 화보집을 통해서 남종화풍이 당시 중국에 널리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그의 사신행과 『고씨화보』의 서문 기고는 조선에 남종화가 수입되는 과정에서 여러 추정 중에서 매우 확실한 사실 하나가 되는 셈이다.

「일소첩(一笑帖)」의 오치
《산수도》21.2x19.2cm 1610년
주지번의 제시(題詩)
아무튼 그런 그가 남종화풍으로 그려진 다른 사람의 그림에 시를 써놓은 화첩이 있다. 화첩제목은 한번 보고 웃으라는 「일소첩(一笑帖)」이다. 이 속에는 당시 명대 중기에 강남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오치(吳稚), 진상고(陳尙古), 문종충(文從忠) 그리고 낙관이 없는 그림 등 4점이 들어 있는데 여기에 주지번은 각 폭마다 그림과 연관되는 시를 썼다. 이 화첩의 전래 경위 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져 있다. 그림 중 한 점에는 1610년에 그렸다는 낙관이 있어 주지번이 조선에 올 때 가져온 화첩은 아닌 것이 분명하지만 그의 이름과 관련해 한 번 더 들여다볼 만한 화첩이다.
주지번
《방이성산수도(仿李成山水圖)》 20.7cmx18.5cm 간송미술관

또 그가 그린 《방이성산수도(仿李成山水圖)》가 있다. 제목은 이성의 그림을 모방한 산수도라는 것이 되는데 내용은 그렇지 않다. 성근 필치로 높지 않은 산을 그리고 엉성해 보이는 몇 그루 나무에 띠 집이 있고 그곳을 향해 가는 동자를 앞세운 高士 등은 전형적인 남종화풍을 보여준다. 이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 아니라 찬조 출품한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다. 간송 컬렉션이 대체로 내력이 있는 물건이 중심을 이루는 점을 고려하면 이 그림은 상당히 이른 시기에 조선에 전해진 그림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리고 시대가 내려와 조선 후기가 되는데, 조선 최고의 화가 정선(호는 겸재)의 막역한 친구로 이병연(호는 사천, 1671~1751)이 있다. 벼슬은 한성부우윤 즉 서울부시장까지 올랐으나 그는 타고난 시인이었다. 그 덕분에 조선시대 후기시단에 새로운 시풍이 일어났다고 할 정도였다. 친구 덕분인지 그는 그림 보는 눈도 상당했다. 그가 그림 위에 시를 짓고 직접 쓴 명나라 중기그림이 있다.

 

  허구서
 《산수도》107.0x32.0cm
 


허구서(許九敍)의《산수도》이다. 원래 이 그림은 한 동안 조선 그림이라고 분류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새로운 자료와 함께 장쑤성 쑤저우(蘇州)에서 활동한 작가임이 밝혀졌다. 그림은 첩첩이 이어지는 깊은 산속에서 거문고를 들고 동자가 산길을 재촉하는 그림이다.

자세히 보면 산모퉁이를 돌면 계곡을 건너는 돌다리 하나가 보이고 그 중간에 고사 한 사람이 앉아 망연히 계곡의 폭포 물과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다리를 건너 다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툭 하니 절벽 위에 정자 하나가 보이고 그 속에 도인풍의 사람 둘이 앉아 주거니 받거니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일본의 중국미술전문가 미야자키 노리코(宮崎法子)는 『화조‧산수화 독해』에서 이런 그림을 가리켜, 벼슬에서 물러난 뒤 깊은 산속에 들어가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고자 하는 문인들이 동경 세계를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사천은 이 그림에 대해 시를 지어 썼는데 시의 내용과 그림속 묘사가 딱 일치한다. 허구서는 16세기 사람이지만 그림과 시가 일치하는 것을 보면 적어도 이 그림은 18세기의 사천이 주변에서 직접 보고 시를 지었던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천 이병연의 제시

幽人本有瀑亭期 유인본유폭정기
却坐危橋落照時 각좌위교낙조시
山疊水悠何以寫 산첩수유하이사
也知遠子抱琴隨 야지원자포금수

은거한 이와 본래 폭정에서 만나고자 기약했는데
해질녘에 도리어 높은 다리에 앉았다.
산은 첩첩이요, 물은 아득히 흘러가는데 어떻게 묘사하리오
멀리 가는 그대 거문고를 가지고 감을 알겠네.
(*도록에서 인용)

중국 그림은 조선 시대 상당히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조선시대 여러 문집에는 중국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당시 본격적인 컬렉터였던 김광국(金光國 1727~?)이 남긴 자료에도 중국 그림에 대한 기록이 여럿 보인다. 대대로 의원집안 출신인 그는 많은 그림을 수집했는데 그 속에는 일본의 우키요에 그림과 18세기초 네덜란드에서 활동한 독일 판화가의 동판화도 한 점 들어 있을 정도로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전 동기창(董其昌 1555~1637)
《연강첩장도》25.5x15.0cm

그가 자신의 컬렉션을 묶어 화첩으로 만든 『화원별집(畵苑別集)』에 명나라 때의 컬렉터이자 이론가이며 화가였던 동기창 그림이 한 점 들어 있다. 《연강첩장도(煙江疊嶂圖)》란 제목의 그림인데 그림 내용은 붓을 옆으로 뉘여 툭툭 찍어가면서 비가 온 뒤에 습기를 잔뜩 머금은 여름 산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에는 그의 도장과 낙관도 있지만 모두 미심쩍은 것으로 동기창 그림풍이 있는 그림, 이른바 전칭(傳稱) 작품이다. 당시 중국과 자주 교류하고 있었지만 그 정보의 양은 오늘날에 비하면 극히 한정된 것이었던 점을 알 수 있다.

한정된 정보의 양으로 인한 왜곡은 정보의 시대라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21세기에 개최한 명청회화 특별전에 ‘빈약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 그것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최근들어 이 부분의 컬렉션을 대폭 늘이겠다고 했으니 지켜볼 일이다.

글/사진 스마트K
업데이트 2024.10.2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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