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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 중국고대동경전 - 시대와 문화가 담긴 동경의 세계 기 간 : 2010년 10월 08일- 2010년 12월 30 장 소 : 북촌미술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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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거울 이야기 하나 -
당나라때 양귀비와의 로맨스로 유명한 현종은 그녀로 인해 정신이 흐려지기 전까지는 현명한 군주이자 신하들에게도 각별했던 군주였다. 그는 자신의 생일인 8월 초닷새날을 ‘천추금감절’(千秋金鑑節)이라 하고 이날이 되면 백관들에게 동경을 하사했다고 한다. 이런 궁중 풍습이 민간에까지 전해져 민간에서도 서로 동경을 선물하는 습관이 생겨났다. 이로 인해 동경 제조업은 당나라때 크게 번창했다고 한다. 어쩌면 고도의 특혜산업 육성책일 수도 있는데 중국 학자들은 산업적인 면에서 당나라에 들면 도자기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해 당시까지 청동기로 만들어 썼던 생활 용기가 모두 도자기로 바뀌고 금속공예 기술은 오로지 동경에만 집중돼 자연스레 동경 제작의 발전을 가져오게 됐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 전시에는 그 현종이 어느 달 밝은 밤 연회를 베풀다 도사 나공원을 따라 달에 있는 광한궁에 갔다는 일화를 문양으로 새겨 넣은 동경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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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명황 유월궁고사(唐明皇 游月宮故事) 동경ㅣ송宋ㅣ지름 20.7cmㅣ한국 개인소장 | |
구리거울 이야기 둘 -
청나라의 전신이자 아골타가 세운 금나라(1115~1234)는 계속되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전쟁 물자를 관리하면서 구리거울(銅鏡)를 함부로 제작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도 국경 밖으로 유통되는 것을 엄격히 규제했는데 이는 무기로 녹여지는 것을 겁내서였다. 자국내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관리 기구가 허가를 맡았다는 의미로 ‘관’자 등이 들어가 명문을 새기게 했다. 국내 개인 소장가가 가지고 있는 물고기 문양의 동경에는 테두리에 ‘경주금기관압(慶州金記官押)’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금나라때 만들어진 동경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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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금기관압(慶州金記官押) 쌍어문 동경ㅣ금金ㅣ지름 10.5cmㅣ한국 개인소장 (동경 왼쪽테두리 위에 희미하게 글자가 보인다) | |
구리거울 이야기 셋 -
상업 경제가 날로 발달했던 명나라 때에는 동경을 맞춤 제작해 주었다. 그래도 경쟁이 치열했는지 제품에 하자가 있을 때에 교환해주겠다는 이른바 보증서를 첨부한 일이 생겨났다. 당시는 보증서를 만들기 보다 거울(銅鏡) 뒷면에 이를 뜻을 새겨넣었는데 어떤 것에는 ‘양포 포환(楊鋪包換)’이라고 새겨져 있어 ‘양씨 가게에서 교환을 보증한다’고 했고 또 어떤 것은 ‘마점자조 포환(馬店自造包換)’이라고 해 마씨 가게에서 직접 만든 것으로 언제든지 교환해준다고 했다. 어떤 장인은 좀 지독한 듯한데 이런 명문도 있다고 한다. ‘가충이경 진잉저구(假充李鏡 眞仍豬狗)’- 가짜로 이씨 동경을 만든 자는 진짜 개돼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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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원년(萬曆元年)’명 동경ㅣ지름 8.2cmㅣ 한국 개인소장 (명나라 신종의 연호가 새겨져 있는 문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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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베이징 고궁박물원의 동경 전문가인 띵멍(丁孟)부주임은 기원전 20세기 정도부터 구리 거울이 제작됐다고 한다. 나일강가의 파라오시대부터 만들어졌다는 것인데 이것은 청나라때 유럽의 유리거울이 들어올 때까지 거의 4천년을 쉬지 않고 이어졌다.
고대 동경의 용도는 이집트와 마찬가지였으며 무덤의 부장품용이었다. 하남성 안양의 한 무덤을 발굴해보니 4개의 동경이 나왔다. 하나는 관을 한겹 더 감싸는 곽에서 나왔고 나머지 3개는 묘실 중간에서 출토돼 이 사실을 뒷받침해준다고 했다.
이런 고대의 동경에 틀이 잡힌 것은 전국 시대이다. 이때가 되면 구리와 주석, 아연의 비율이 대체로 일정해지면서 고대 동기의 문양인 용문양, 山자 문양, 짐승문양 등이 동경의 뒷면에 새겨지게 된다. 개중에는 투각된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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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조반리문(透彫 蟠螭文) 동경ㅣ전국시대ㅣ지름 15.7cmㅣ 한국 개인소장 (뿔이 없는 용인 이무기 16마리가 엉켜 있는 문양이다.) | |
한나라 때가 되면 기술이 발달해 문양도 한층 다양해지며 제조 자체도 자유로와진다. 1980년 산동성의 어느 한나라 묘에서는 무려 길이 115.1cm 폭 57.7cm의 네모난 동경이 발견돼 발굴단을 깜짝 놀라게 했다. 요즘 말하면 전신 거울인 셈이다. 한나라 동경의 특징은 길상적인 말을 새겨 넣는다는 점이다. ‘부귀를 즐기고 오래도록 살면서 술과 음식이 넉넉하다’(大樂貴富, 千秋萬歲, 宜酒食)같은 글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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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엽박국문(草葉博局文) 동경ㅣ서한西漢ㅣ지름 18.4cmㅣ일본 개인소장 박국문은 TLV 자처럼 생긴 문양을 가리킨다. 동경 한가운데 ‘늘 부귀하며 즐거움이 끊이지 않으며 오랫동안 서로 사모하고 서로 잊지 말라(常富貴 樂未央, 長相思, 毋相忘)’는 글귀가 보인다. | |
당나라때 동경은 크게 발전했는데 우리 공예사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이때 포도 문양의 등장하는 것이다. 포도는 당나라때 서역을 통해 중국에 전해졌는데 왕한이란 시인은 ‘포도미주야광배 욕음비파마상최(葡萄美酒夜光杯 欲飮琵琶馬上催)’라는 시귀를 읊어 귀한 포도주잔을 들어 이별을 서러워한 장면을 두고두고 기억나게 했다. 당나라의 해수(海獸)포도문 동경은 이후 송나라에 계승되는데 송과의 관계를 고려하면 고려 청자의 포도문양 뿌리가 어디쯤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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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瑞獸)포도문 동경ㅣ당唐ㅣ지름15.2cm 한국 개인소장 (서수는 상서로운 짐승을 가리키는데 당시는 중국밖의 넓은 세상 을 바다 해(海)자로 표현하기도 했다) |
월궁(月宮) 동경 ㅣ당唐ㅣ 지름14.1cm ㅣ한국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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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때가 되면 당나라 현종이 월궁에 간 일화를 새기는 것처럼 당나라때부터 시작된 인물고사문 동경들이 많이 제작된다. 북방 민족이 세운 요나라 금나라 동경은 송대를 계승한 것이 대부분으로 신화인물의 고사를 새긴 동경이 많다. 특이한 점은 물고기 문양이 등장하는 것과 어린 동자들이 꽃가지 사이에서 놀고 있는 문양이 있는데 아무래도 고려청자 문양과 연관이 깊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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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어문(雙魚文) 동경ㅣ금金ㅣ지름 12.5cmㅣ한국 개인소장 |
동자유희문(童子遊戱文) 동경ㅣ금金ㅣ지름 14.5cmㅣ 한국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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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미술은 모방에서 시작되는데 동경 역시 당나라때부터 한나라 동경을 베겨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전통을 계속돼 청나라때가 되면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감상용으로 한, 당의 동경을 모방했다. 청나라때 동경은 건륭 연간(1736~1795)에 유리 거울의 사용이 확대되면서 점차 쇠퇴했지만 19세기말 20세기초까지 제작되기는 했다. 하지만 민간에서 만들어 쓰던 동경중에 볼만한 것은 거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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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회용봉문(彩繪龍鳳文) 동경l 청淸ㅣ지름 40.8cmㅣ 한국 개인소장 (동경 뒷면에 칠을 바르고 그 위에 문양을 그린 것으로 다섯 발톱으로 보다 중국 황실의 혼례용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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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유럽에서도 애초에는 금속을 갈아 거울로 사용했으나 1317년 베네치아의 유리 제조공이 주석 아말감을 유리 뒷면에 부착시키는 방법을 개발해 최초로 유리 거울을 만들었다. 유리 거울은 청나라때 유입되는데 일본은 이보다 빨리 1549년 스페인 선교사 프란시스 자비에르가 일본에 올 때 가져와 규슈의 다이묘(大名)를 만나면서 망원경과 함께 이것을 예물로 선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알미늄이나 은을 유리 뒷면에 증착시키는 거울은 1835년 독일인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크가 발명했다. 우리나라에 유럽식 유리거울이 언제부터 들어왔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연구가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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