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측메뉴타이틀
  • 파리가 사랑한 동양미술관
  • 최열의 그림읽기
  • 영화 속 미술관
  • 조은정의 세계미술관 산책
  • 미술사 속 숨은 이야기
  • 경성미술지도-1930년대
  • 김영복의 서예이야기: 조선의 글씨
  • 한국미술 명작스크랩
  • 도전! C여사의 한국미술 책읽기
  • 왕릉을 찾아서
  • 시의도-시와 그림
  • 근대의 고미술품 수장가
타이틀
  • [에르미타주미술관] 빛의 도시의 겨울궁전
  • 4376      

조은정(미술평론가)

  백야의 도시에서  밤 12시에도 빛나는 태양이 하늘을 지키는 백야(白夜), 얼마나 낭만적인 현상인가? 물론 구 소련을 상징하는 장소적 의미로 사용했지만, 그 산란하는 빛의 아름다움은 바르시니코프가 나오는 영화 〈백야〉에서도 살아 있었다. 하지만, 정말 피곤한 몸 이끌고 자리에 누웠는데 방안 가득 햇살로 차 있다면 보통일은 아니다. 피곤해서 눈 붙이는 것도 잠깐, “아, 실컷 잤다. 아니, 내가 늦잠을 잤나? 벌써 해가 중천에 있네!” 하며 부지런히 목욕탕으로 달려가 이닦고 세수하고 난 뒤 거울을 보는데 눈의 흰자위가 벌겋게 충혈되어 있다. 많이 피곤했나? 방으로 들어와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30분. 그렇게 오늘도 하루를 피곤하게 시작하는 곳, 백야의 땅이다. 

  수면부족으로 하루 종일 몸이 솜뭉치 같은 상태에서 휘적휘적 걷는 길은 넓고 깨끗하게 포장되어 있다.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그, 예전의 레닌그라드는 러시아 거의 대개의 지역이 그렇듯 백야의 햇빛 아래 빛나는 도시이다. ‘빛’이라는 추상적인 존재는 분명 이 도시에서는 사실로 존재하는데, 건물 꼭대기에 휘황찬란한 금이 발려진 양파같이 생긴 돔의 일종인 쿠폴이 커다란 성당과 궁전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넓고 아름다운 도시는 원래 늪지였다. 유럽의 변두리로 자리한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하여 유럽과 교통이 원활한 지역에 수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표트르 대제는 수많은 나무말뚝을 박아 기초를 두고 그 위에 돌로 집을 지었다. 당시 나무가 위주였던 건축을 영구불변의 재료인 돌로 하기로 하였지만, 도시를 건설할 만큼의 돌을 구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표트르 대제는 도시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통행세를 받았는데, 자기 머리보다 큰 돌덩이 2개가 바로 세금이었다. 도시 건설의 물자에 대한 사정이 이럴 정도였으니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게다. 그래서 이 도시에서 “사람은 침묵하고 돌은 말한다”는 비아냥이 생겨났던 것이다.

  키가 2미터에 이르렀고 몸소 과학을 익힌 계몽군주 표트르 대제에 의해 건설된 인공도시가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이다. 인간의 의지와 근대적인 과학에 근거하여 건설한 도시인만큼 이곳은 문화적인 중요성이 깊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한 문화적인 중요성을 증명하는 건축으로 이삭성당이나 요새, 여름궁전 등 여러 건물을 꼽을 수 있지만 특히 겨울궁전, 오늘날의 에르미타주는 상트페테르부르그의 건설과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동시에 근대기 군주가 백성을 위해 마음을 기울였던 여러 요소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오늘날 그 무엇보다 겨울궁전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그 궁전 안에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의 유수한 문화유산이 그득히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겨울궁전에서 에르미타주미술관으로
  겨울궁전은 1711년 표트르 대제가 재혼을 하고 결혼식 피로연으로 이용한 장소였다. 모스크바가 오랜 수도였으니 이미 자신의 집안이 오랫동안 기반을 마련하고 부와 권력을 축적한그곳에서부터 기꺼이 신도시로 이주할 귀족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그리하여 표트르 대제는 자신의 결혼식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졌던 것이다. 국가 최고 권력자의 결혼식에 이들 귀족이 참석치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식에 참석한 모든 이들에 대해 황제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이 도시를 떠날 수 없음을 천명함으로써, 상층부의 수도 이전은 단박에 이루어졌다. 


  여름정원 한켠의 좁은 궁전에 머물던 황제의 가족들은 두 번째 동궁을 석조로 만들었다. 이것이 현재 에르미타주극장 자리의 첫 번째 궁전에 이어 두 번째로 확장한 규모의 겨울궁전이었다. 표트르 대제의 둘째 부인은 다음 황제위에 올랐는데 바로 에카테리나1세이다. 그녀는 이 건물을 확장시켜 세 번째 동궁을 지었다. 표트르 대제의 딸인 엘리자베타 여제는 크고 곡선이 많은 엘리자베타식 바로크 건축으로 궁전을 확장하였는데, 1754년에서 1762년 동안 건축된 이 궁전은 1000개 이상의 방과 사방에 출입구를 둔 굉장한 것이었다. 그녀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만들 목적은 아니었지만 궁전을 장식하기 위해 유럽의 작품들을 소장하기 시작하였다.

  엘리자베타 여제의 며느리 예카테리나2세는 프러시아 프리드리히2세에게서 부채 상환금 대신 225점의 그림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에르미타주미술관 최초의 콜렉션이었다. 이후 예카테리나2세는 4,000점 이상의 작품을 콜렉션하였고, 작품수장을 위해 서로 떨어져 있는 건물들을 이어붙이는 공사를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소 에르미타주, 대 에르미타주가 건설되었고 옛 동궁 자리에 극장도 건설되었다. 1851년에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셋째손자 니콜라이1세가 신 에르미타주를 건설하였는데 역시 건물을 연결하여 오늘날의 에르미타주미술관 모습이 갖추어졌다. 물론 1837년의 30시간 이상 계속 타오르던 화재로 1층 벽만 빼고 전소되었지만 신속히 가구와 작품, 궁전 건설의 기록 등을 건질 수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에르미타주의 황금그림방

  오늘날은 겨울궁전이란 명칭보다 문화유산이란 뜻의 헤르미티지(hermitage)와 동일한 철자로 이루어진 러시아식 발음인 에르미타주로 더욱 유명해졌다. 에르미타주란 프랑스 궁전이나 저택의 정원에 있는 자그마한 은밀한 정자를 의미한다. 귀족들이 작은 정자인 에르미타주에 골동품을 보관하거나 독서를 하는 장소로 이용하기도 했는데, 바로 미술작품을 보관했다는 데서 그러한 용도의 이름을 따 에르미타주란 한 것이다. 1896년 8월 1일, 백야가 한창일 때 러시아를 둘러보러 온 민영환 일행은 일명 관온궁(觀溫宮)인 에르미타주에 들렀다. 『해천추범』의 “금으로 만든 대궐로 복도와 회랑이 서로 이어져 화려하고 넓고 크며 벽에는 역대 황제의 초상과 옛날의 전쟁화를 걸었는데 모두 유화이다.”라는 대목이나 “한 방에는 가운데에 한 그루의 금나무(가지와 꽃과 잎을 금으로 만듦)를 심고 금으로 만든 공작 1마리와 금닭 2마리(역시 금으로 만들고 속에 기계장치를 두었음)를 세워놓았다. 상고하건대 시간마다 날고 울어서 종을 대신하여 나타내니 참으로 기이한 물건이다.”고 한 기록을 통해 서양의 미술과 근대 과학을 에르미타주에서도 경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에르미타주의 니콜라이2세 서재


  황금유물에서 사금파리까지
  에르미타주 미술관에는 대단히 많은 방과 그 방에 들어차고도 남는 많은 유물과 미술작품이 있다. 원래 큰 규모로 지어진 궁전건물이기도 하지만 구 소비에트연방 시절에 루브르나 대영박물관에 견줄만한 미술관을 만들기로 작정하고 건물과 건물을 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2,000개가 넘는 창이 달린 건물에는 1,050여 개의 방이 꾸려지고 2,700,000점이 넘는 미술품을 담은 건물이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에르미타주미술관에는 그야말로 여러 시대와 여러 국가와 여러 종류의 것들이 엄청나게 소장되어 있다. 게다가 아프가니스탄의 침공 이후 발굴하거나 약탈한 실크로드의 유물들은 그 수를 더해가고 있다. 이들 미술품 중 스키타이 양식을 보이는 황금유물은 기마민족의 미술품으로서 우리 미술과의 친연성도 확인시켜준다. 


에르미타주 소장 페르시아 접시


  황금으로 만든 사슴과 허리띠장식 등의 동물무늬는 용감한 기마민족의 모습을 전한다. 또 사람 가죽으로 만든 화살통은 원시사회의 영웅의 모습과 무사들의 세계를 전달한다. 이러한 스카타이 미술품에서부터 실상 별 볼일 없는 것들도 끼여있는 중국, 일본, 한국의 일부 골동품이 구색을 갖추어 있다. 물론 유럽 여러 나라의 미술품은 러시아 특유의 광적인 수집에 의해 미술사 서적에도 반드시 등장하는 유명한 작품이 아주 많이 있다. 고갱 등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과 마티스의 <춤>, 피카소의 그림 등 유명작품이 벽에 걸린 가운데도 가장 유명한 작품은 렘브란트의 <다나에>이다. 렘브란트의 작품을 에르미타주가 보유하고 있다는 점 이외에도 이 작품은 어떤 관객이 물감과 천을 손상시키는 염산을 작품에 뿌렸는데, 최대한 과학적인 기법을 동원하여 복원한 작품이라는 점으로 더 유명하다. 표면에 흘러내린 액체의 자국이 분명한 캔버스를 보며 그러한 수난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바리케이드나 보호막 없이 친근한 듯 관객에게 그림을 열어 보이는 에르미타주의 관용을 확인한다.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춤Dance> 1910, 캔버스에 유화, 260×391cm, 에르미타주 미술관



렘브란트Rembrandt, <다나에Danaë> 1636, 캔버스에 유화, 185x203cm, 에르미타주 미술관


     
  
       
  
      

조은정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5 03:43

  

SNS 댓글

최근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