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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인 호안미로 미술관] 바르셀로나의 태양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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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정(미술평론가)
바르셀로나의 태양을 담다, 호안 미로 미술관
                                                                       
1992년, 분명 한국보다는 무더워 보이는 열기 속에서 작지만 다부진 체격의 한국인이 달리고 있었다. 그가 처음 텔레비전 생중계의 화면에 등장했을 때는 “그저 저런 속도로만 가 준다면…”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리고 그가 언덕을 힘차게 오를 때 그 바램은 환호로 바뀌고 있었다. 사진 속의 일장기를 오려내어야만 했던 손기정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이후 처음으로 한국인 마라토너가 세계 정상에 다가선 순간이었다. 바다 건너 멀리서 가정에 놓인 텔레비전 수상기 속에서 생생하게 보이던 바로 그 언덕에는 ‘달리는 한국인’, 황영조의 모습을 커다란 돌에 새겨 길가에 놓았다. 


  파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바르셀로나의 동산은 ‘몬쥬익’으로 불린다. 1929년에 세계박람회가 열렸던 이 곳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개최되며 축구장과 여러 조형물이 들어서 쾌적한 문화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몬쥬익은 이름 그대로 유대인들의 안식처, 죽은 자들의 공간을 품에 안고 있다. 호안 미로 재단의 이름으로 선 미술관은 바로 몬쥬익에 기대어 웅장한 정원과 아름다운 저택들 사이에서 도시 경관을 해치지 않는 나지막한 키로, 하지만 그 모습을 결코 잊을 수 없는 깔끔하고도 친근한 공간의 일부를 드러내고 있다. 미로 자신은 몬쥬익의 묘지들 속에 자신의 육신을 벗어놓았다.

바르셀로나를 굽어보는 곳에 눕다
스페인이 낳은 세계 현대미술의 대가 중 하나인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을 바르셀로나 시에 기증할 뜻을 비쳤다. 시는 즉각 미술관 건립위원회를 소집하였고, 여러 건축가 중에서 호세 루이 세르(Josep Lluis Sert, 1902-1983)를 건축가로 지명하였다. 세르는 “우리들이 정형이라거나 일반적인 방식이 아닌 해결방식을 시도할 때, 건물 내에서 일어나는 것을 정직하게 반영할 수 있는 표현적인 다양성을 얻을 수 있다. 그러한 경우가 많을 때, 구조 표현보다도 더욱 흥미가 있다.”라는 자신의 언명처럼 마치 화가가 표현하듯 건축도 다양한 표현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건축가였다. 그는 이미 피카소, 자코메티, 칼더 등 당대의 모더니즘을 이끈 작가들과 교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미로와는 10살이나 나이 차가 나지만 절친한 관계에 있었다. 건축가가 집을 만들고 작가는 그 안을 채우는 미술관, 즉 작품과 관계없는 미술관은 애초에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는 말이다. 


호안 미로와 호세 루이 세르

  스페인에서 지역 출신끼리의 유대감은 유별나기도 하거니와 같은 지역 출신자끼리는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다. 미로와 세르 모두 카탈루냐 바르셀로나 지역 출신일뿐만 아니라 이미 1937년 파리 세계박람회의 스페인관을 세르가 설계하고 미로가 벽화를 그리며 함께 작업하였던 적이 있으며 게다가 둘은 유별나게 정서적 유대감이 깊은 친분이 두터운 관계였던 것이다. 바르셀로나시에서 제공한 몬쥬익 언덕에 미로 작품을 근간으로 한 미술관을 건립함에 있어 작가인 미로와 건축가인 세르의 견해차에 의한 불협화음이 발생할 소지는 애초에 없었다. 세르는 연장자이자 작가인 미로의 견해를 대폭 수용하였다. 


호안미로 미술관 상층부. 미로의 조각.


  오늘날 미술관 건물의 일부가 카탈루냐지방 시골에 있는 작은 까사를 보는듯한 것은 바로 이들의 경험에 녹아 흐르는 추억의 집들이 미술관에 실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덕의 선과 같이 흐르는 나지막한 지붕, 흰색의 건물과 넓은 유리창 등은 미로의 작품을 통해 바르셀로나를 굽어보기도 하고 작품의 틈새를 통해 바깥을 내다보게도 하는, 그야말로 작품과 건축과 도시가 어우러지는 공간을 창조하였다. 겸손하지만 당당하고도 굳은 의지로 두 발을 곧게 땅에 딛고 선 작은 사람처럼 건물은 바르셀로나를 굽어보고 있다. 진입구에서 중정을 볼 수 있도록 하여 개방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좌, 우익으로 전시실을 벌려 놓아 유기적이면서도 변화있는 공간을 구성하였다. 크지 않으면서도 개별성이 도드라져 보이는 전시실을 이룩한 것은 미술 작품에 비하여 소박한 건축, 건축을 위한 건축이 아닌 내용에 충실한 건축이기 때문이다. 이 건축은 식상함이나 권위주의에 대한 반기가 현대 미술의 본질임을 일깨워준다.


호안미로 미술관의 중정

출입구


자연의 풍경, 자화상
1972년에 수립된 미로미술관 계획은 1975년에 건물의 완공을 보았고 이듬해 일반에 공개되었다. 그 어느 미술관보다 미로 작품을 소재로 한 많은 문화상품이 있는 미술관샵이 있는 것을 보면 애초에 기능적인 미를 무시하지 않던 미로의 또 다른 세계를 보는 듯하다. 그의 아버지는 시계 제작공이었고 어머니는 금고 제작공의 딸이었다. 미로는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지만 상업학교에 진학하여 졸업 후에는 경리원으로 일하다가 업무 부적응으로 건강을 해쳐 부모가 사두었던 몬트로그의 농장에서 요양하며 그림공부에 전념하기로 결심, 3년 동안 미술학교를 다녔다. 미술학교 졸업 후 화가로서의 길을 걸어 나간 미로의 세계는 그야말로 과감한 실험과 진지한 사고의 표출로 점철되었다. 


  25세에 첫 개인전을 가졌지만 파리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화가였고 많은 유명인사와 교유하였다. 평면회화를 시작하였지만 여러 가지 물질을 화포에 붙이기도 하는 등 오브제 작업도 하였고 부조, 조각 등을 해서 조각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하버드대학에 대형벽화를 남기고 있는가 하면 전문도예가가 실패한 재료를 개발하여 도자기 개발에 성공하였고, 판화에서는 독자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이 귀중한 것은 형태의 단순성, 색채의 화려함으로 일견 어린아이가 낙서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인류 문명의 기록과 해석들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는 숫자를 통해 인간을 보았는데 13에서는 팔을 늘어뜨린 여성의 유방을, 3에서는 남성의 고환을 보았다. 따라서 그에게서 13은 여성, 3은 남성인 것인데 이러한 사물의 수학적 사고는 실상 아주 오래 전의 철학자들이 지녔던 세계가 ‘수(數)’로 이루어졌다는 주장과 닿아 있다.   

  〈자화상〉은 그가 오랜 시간을 들여 탐구한 주제인데 형태상 요양하며 지냈던 스페인의 한가한 시골 몬트로그의 풍경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사람의 얼굴을 산, 들, 바람, 태양 등 자연현상과 연관지어 표현한 것이다. 구름 같은 눈썹, 해와 달 같은 눈, 산등성이 같은 입…. 이렇듯 그의 그림은 처음에는 웃음이 나오는 형태이지만 들여다볼수록 무릎을 치게 되는 관찰과 깊은 사유가 배어 있다. 〈달의 눈〉 같은 경우는 하늘에 뜬 달의 형태에서 인간의 눈과 같은 모습을 발견하고 달이 움직인다는 사실까지도 하나의 화면 안에 그려 넣는다. 그리고는 노랑, 파랑, 초록, 빨강과 검은색만으로 이 모든 사실을 표현한다. 사실 미로의 그림이 한국인들에게 친근한 것은 형태를 감싸거나 규정하는 선들 때문이다. 미로의 화면에서 굵고 힘 있는 선들은 아주 짙은 검은색들인 경우가 많아 붓에 먹을 듬뿍 묻혀 일필휘지하는 동양화의 전통에 익숙한 우리에게 결코 서양화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달의 눈> 1975





농담 속에 숨은 진실들
미로가 산 시대는 새로운 세기의 시작이었고 세계대전을 두 차례나 겪은 격동기였다.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실존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였고, 현실에서 새로운 꿈을 찾아 헤맸다. 초현실주의 조각은 일상의 여러 물건들에서 상상의 형태를 찾아내 결합하였다는 특징이 있는데, 미로의 조각은 인간을 표현함에 있어 일상 사물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촌철살인의 기지를 발휘한다. 프라이팬을 여성의 몸으로 삼기도 하고, 수도꼭지를 남성의 하체에 부착시키기도 하는 등 외면적으로는 유머를, 내용적으로는 사물의 진실을 인식시키는 조각을 보여준다. 실지로 그는 결코 둥그렇다고는 할 수 없는, 오히려 세모에 가까운 형태를 그리고 붉은색을 칠한 다음 태양이라고 이름 짓는다. 사물이라는 것은 그 이름에 의해 결정되는 것임을 인지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음악을 듣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리는 일도 가능하며, 사물을 흉내내어 그리지 않고 무의식으로 손을 놀려도 그림이 되는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1953년 작


  미로의 단순하고도 강렬한 형태들은 사물에 대한 이해, 세상의 질서에 대한 나름의 해석에 의한 것이다. 그 질서의 단순함은 분명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강렬한 태양과 상쾌한 공기 그리고 경건한 생활에서 온 것이다. 미로미술관의 몬쥬익 언덕의 선을 거스르지 않는 지평선을 닮은 외관이나 단순한 전시실로 이어진 공간 그리고 다른 작가의 기획전을 위하여 설비된 가장 넓은 공간에 대한 배려는 건축가와 화가의 예술에 대한 세계관을 가시화한 것이다. 자신의 미술관을 지으면서 심지어 가방을 맡겨놓는 락커까지 미로 그림에서 익숙한 색채로 구성되어 있지만 항상 동시대의 작품을 위한 전시실을 마련하여 놓았다는 사실은 넓고도 강고한 작가의 포용력을 드러낸다. 동시에 스페인이 미술견본시장인 아르코 등 세계의 주요 현대 미술시장으로 주목 받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임을 암시한다. 

조은정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5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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