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정(미술사, 미술비평가)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미술이라고 할까?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기술이라는 문자 그대로를 의미로 풀어내자면 미 자체보다 ‘기술’에 치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미술의 어원은 라틴어의 '기술'과 연관되어 있으며, 아주 오래전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시각미술에 한정하지 않고 문학, 음악, 무용 등을 총괄하여 이르는 말이었다. 하지만 평면이나 공간에 실현된 예술인 시각예술이 미술이라고 불린 이래 우리는 회화, 조각, 판화, 드로잉 등등 머릿속에 그려지는 형태를 미술로 규정하여 왔다. 그런데 20세기가 들어서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새로운 재료의 등장, 기계의 발달 등이 머릿속에 그려온 미술의 모습을 변화시킨 것이다.
어느 날 새로 만들어진 프로펠러를 구경하고 감탄한 두 미술가가 있었다. 한 사람은 뒤샹, 다른 한 사람은 브랑쿠지였다. 두 친구의 눈앞에 돌아가고 있는 번쩍이는 금속의 프로펠러는 이 세상 어느 작품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감탄사를 연발하던 두 사람은 이후 확연히 다른 세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뒤샹은 남자의 소변기를 갤러리에 전시하여 ‘레디메이드’라는 미술의 영역을 창안하여 이제 미술가는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선택하는 사람임을 천명하였다. 한편 브랑쿠지는 인간의 기능을 믿었다. 그는 기존의 재료인 청동을 갈고 다듬고 윤을 내 오늘날에나 볼 수 있는 스테인레스스틸처럼 빛나 보이게 하였다.
1920년, 이들 앞에 한 여성이 나타났다. 대부호 집안의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1898-1979)은 뉴욕에서 파리로 건너와 몽파르나스의 화가들과 문인들 그리고 여러 예술가들과 교유하였고, 뒤샹은 기꺼이 앞장서 전위적인 현대미술가들을 그녀에게 소개하였다.
개인 콜렉션의 귀감, 페기 구겐하임
페기 구겐하임의 아버지 벤자민은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구리광산으로 돈을 벌은 부호였으나 타이타닉호에 타고 말았다. <타이타닉> 영화 속에서 연미복을 차려입고 우아하게 죽음을 맞은 신사가 바로 벤자민 구겐하임이다. 21세에 재산을 상속받은 그녀는 파리로 건너가 문화인들과 사귀던 중 조각가인 로렌스 바일과 결혼하였으나 곧 이혼하였고 두 번째 남편은 막스 에른스트였으나 결혼 5년 뒤 이혼하였다. 그녀는 유명한 문학가와 미술가들과 연애하였고 이들을 후원하였다. 초현실주의와 추상미술을 후원하던 그녀는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파리의 콜렉션을 모두 미국으로 옮겼고 ‘금세기예술’이라는 이름의 갤러리를 열였다. 갤러리가 문을 열던 날 페기 구겐하임은 당시 유행하던 유럽 최첨단의 의상에 한쪽 귀에는 초현실주의의 이브 탕기가 디자인한 귀걸이를, 다른 한쪽에는 추상미술의 알렉산더 콜더가 디자인한 귀걸이를 걸었다. 자신의 취향이나 선택이 추상이나 초현실 어느 한쪽으로 경도된 것이 아님을 알리려는 의도에서였다.
붉은색의 립스틱을 바르고 긴 담뱃대를 문 이 여성은 넘쳐나는 돈과 높은 안목으로 20세기 초, 중반 새로운 예술의 중심에 있었다. 그녀 자신의 높은 안목만으로 화상이 무시하던 미술가들과 평론가들이 관심갖지 않던 미술가들을 옹호하고 후원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옳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후원한 미술가들은 미술사의 한 장에 기록되는 현대의 미술가들이 되었다. 그녀는 상업성이 지나친 미국의 팝아트에 대해서는 경박하다고 비판하였는데, 자본주의의 최대 수혜자인 그녀가 단지 호사취미가 아닌 예술에 대해 진정 즐기고 이해하였음을 인정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엄청난 돈을 미술품을 사들이는 데 사용한 그녀가 비행기를 타고 대륙을 오갈 때조차 편하고 조용하며 최상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퍼스트클래스가 아닌 이코노미클래스를 고집하였다는 사실을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1979년 그녀 사후, 콜렉션의 소유권은 숙부가 세운 구겐하임미술관으로 돌아갔다. 미술재단은 그녀의 소장품을 그대로 두고 미술관을 ‘베니스구겐하임’으로 명명하였다. 이것이 바로 구겐하임미술관 세계화 전략의 첫걸음이 되었다. 구겐하임미술관을 확장한 뒤 맨하튼의 소호에 분관을 내어 소호구겐하임을 열었고, 스페인의 빌바오시에 빌바오구겐하임을, 독일은행의 후원으로 베를린에 미술관을 열어 은행의 명칭을 그대로 살린 도이체구겐하임을 열었다. 이러한 광대한 사업은 경영학을 공부한 미술사학자 토마스 크란츠에 의해 실현되었고 라스베이거스에도 문을 열었지만 자유의 여신상 가까이 미술관을 설치하려던 계획을 뒤로 한 채 구겐하임의 세계화 전략은 일단 주춤한 상태이다.
회색도시 빌바오의 꽃
빌바오는 스페인 바스크 지역의 대표적인 도시 중 하나이다. 철광석을 기반으로 한 중공업에서 선박사업까지 빌바오는 공업도시로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중공업경제의 쇠퇴로 말미암아 1975년 이후 빌바오는 엄청난 실업률의 증가를 맞아 스페인 중앙정부의 정책에 반감을 갖게 되었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인 바스크분리주의의 중심점이 되었다. 바스크주는 경제적이며 문화적으로 고양된 생활환경을 지역민에게 제공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고, 중앙정부 또한 바스크 지역의 분리를 막기 위하여 그럴 필요를 절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세운 원대한 정책 중 하나가 빌바오를 경제적인 중심지로 만드는 일이었다. 경제적인 부흥을 위하여 미술관을 짓고, 오페라하우스를 건립하고 국제적인 규모의 회의장을 건설하였다. 공장을 지어 이룬 경제의 한계를 절감하였던 때문이다. 문화적인 투자를 이룬 결과는 물론 이 유럽 변두리 조용한 시골의 중소도시를 세계인의 시선 안에 두게 하였고, 경제적인 번성에 다가서게 하였다.
바스크 주정부는 세계화전략을 진행하던 구겐하임재단에 도시재건을 위한 제안서를 제출하였다. 구겐하임재단은 빌바오구겐하임의 장기적인 전략을 발표하였고, 중앙정부의 투자 없이 공공부문의 투자에 의해서만 미술관이 건립되었다. 1997년 10월, 개장될 때만 해도 수도인 마드리드에서 1시간이나 비행기로 날라가야 하는 이 도시에 있는 미술관을 찾는 관광객은 기껏해야 3만 명일 것으로 예견되었다. 하지만 1년 동안 130만 명, 3년 동안 350만 명이 다녀갔고 그 숫자는 계속 증가하는 추세이다. 관광객의 증가는 경제적으로도 활기를 가져오고 투자를 불러일으켰다. 뉴욕타임즈는 미술관을 통해 이룬 기적의 빌바오를 보고 이렇게 평했다. “이제 문화는 권력의 장식물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가 된 시대이다.”
거대한 회색의 공업도시는 물 가에 한 송이 꽃을 피운 듯한 건축물을 통해 경제적으로 되살아났다. 어느 위치에서 보건 그 형태가 다르기만 한 비정형의 해체주의적인 건물은 프랑크 O. 게리에 의해 설계되었다. 이 건물의 가장 큰 특색은 베이직 색상의 스페인산 석회암과 은색의 티타늄 그리고 유리로 뒤덮여 있다는 점이다. 이 건물은 가장 가벼우며 내구성도 좋아 비행기나 우주선의 재료로도 사용하는 0.5밀리미터 두께의 현대적인 금속인 티타늄판을 뒤덮어 건물 전체가 물고기 비늘처럼 감싸여 있어 ‘메탈플라워’로 불리우기도 한다. 또한 전면의 벽을 유리로 하여 자연광선을 최대한 끌어들여 친화적인 공간을 만들고 전체 19개의 전시실은 아기자기한 공간으로 분절되어 다양한 전시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빌바오구겐하임에 들어서면 미술관이라는 이 건물의 용도에 의문이 들 것이다. 내부의 나선형으로 인지되는 공간과 철골구조와 산란되는 빛은 예민한 이들에게 멀미를 느끼게 한다. 게다가 19개의 전시실은 너무 작기도 하고 벽면이 안정된 감도 없어 작품에 집중하기 어렵게 한다. 게다가 강하기만 한 그 건물의 위용에는 맞설 수 있는 현대미술작품은 아마도 찾기 힘들 것이다. 미술작품을 위한 공간으로서 미술관이 아니라 미술관을 위한 미술관 건물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빌바오구겐하임의 작품이란 입구에 선 제프 쿤스의 살아있는 이끼와 꽃으로 만든 거대한 강아지, 강가에 인접하여 설치된 루이즈 부루주아의 거미를 이토록 근사하게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리차드 세라의 거대 강철 구조작품인 ‘뱀’을 이렇게 적정하게 장치하여 놓을 수 있는 장소 또한 빌바오구겐하임 말고는 없을 것이다. 구겐하임재단은 넘쳐나는 콜렉션을 담을 공간을 찾았고, 빌바오시는 1억불 이상을 투자하는 모험을 하였지만 건물만 좋은 이 미술관 덕택에 도시 전체가 살아나는 성공을 맛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