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은정(미술사학자, 미술평론가)
“스케치하면서 아이들이 느꼈을 두려움 때문에 나도 울었다. 그때 내가 지고 있는 짐을 진심으로 느꼈다. 그들을 대변해 주는 사람이 되는 게 내 임무다, 나는 거기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건 끝나지 않을 일이다. 이제는 태산 같은 사람들의 고통을 입 밖에 내어야 한다. 그게 내가 맡은 임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해내는 건 정말 쉽지 않다. 흔히들 일을 하면서 마음이 가벼워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이 포스터를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빈에서는 날마다 사람들이 굶주려 죽어간다면, 과연 일이 내 마음을 가볍게 할 수 있을까?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 전쟁에 관한 그림을 그릴 때, 전쟁이 계속해서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는데도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단연코.”(케테 콜비츠)
투명한 엘리베이터
하루종일 웃음소리와 사람들의 발자국소리가 멈추지 않는 대성당말고도 독일 쾰른에는 26개의 뮤지엄이 있다.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 1867-1945년) 사후 40년을 기리기 위하여 1985년에 문을 케테콜비츠미술관도 그 중 하나이다.
노이마르크 파사지
케테콜비츠미술관이 자리한 곳은 노이마르크 파사지이다. 노이마르크는 쾰른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데, 쾰른대성당과도 연결되는 도로에는 갑자기 중세교회가 불쑥 몸을 드러내기도 하고 꽃과 와인이나 아름다운 물건들을 파는 가게들도 즐비하다. 그래서 노이마르크를 쇼핑 거리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노이마르크의 중심부에는 꽃과 와인, 수공예품을 파는 좌판들 외에 차와 간단한 요깃거리를 파는 카페들도 있다. 우리나라 재래시장의 한가운데 같은 곳에 들어선 쇼핑센터가 바로 노이마르크 파사지인데 작은 가게들을 지나 중정에 이르면 갑작스레 상가 위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만난다. 옷을 사는 상점으로 데려다주기도 하는 엘리베이터 문 옆에 뜬금없이 케테 콜비츠 포스터가 붙어 있다. 케테콜비츠미술관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바로 이 엘리베이터인 것이다. 케테콜비츠미술관은 복작이는 시장통인 노이마르크 파사지 쇼핑 아케이드 가장 위층에 자리 잡고 있는데 쾰른의 건축가 한스 쉴링이 디자인하였다. 1985년에 문을 연 미술관이지만 1989년에 이곳으로 장소를 옮겼는데, 이른바 저잣거리 한가운데 위치한 미술관이란 점에서 케테 콜비츠 미술관답다라고 생각하는 게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지상으로부터 무한의 공간으로 상승하는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면 이내 투명한 엘리베이터 안에 카페의 지붕들이며 가게들이 발 아래 펼쳐진다. 웃음소리, 화사한 꽃들과 커피향기가 진동하는 공간에서부터 그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을 뿐인데 시공을 초월하는 생경함에 놓이는 자신을 발견한다. 세속의 즐거움이 가득한 곳으로부터 소음이 사라진 조용하고도 경건함마저 자아내는 다른 곳에, 다른 세상에 이르러 있는 것이다.
케테콜비츠미술관행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미술관에서 처음 만나는 장소는 자료실과 서비스 공간이다. 이어 곧바로 케테 콜비츠의 작지만 힘 있는 조각과 깊고도 강한 정신적 충격을 수반하는 그녀의 판화들로 뒤덮인 벽을 마주한다. 작고 흰 벽으로 칸막이를 이룬 전시실이 이어지고 제법 넓은 한 방안에 마련된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에서는 강의를 들을 수도 있고, 기대어 앉아 그 판화에 나타난 인간의 역사와 강한 압력을 극복하는 힘의 원천에 대하여 깊은 생각에 잠길 수도 있다.
딸, 아내, 노동자의 어머니
케테 콜비츠는 우리나라 현대미술에 영향을 미친 미술가 중 하나이다. 1980년대 시위현장에 걸리곤 하였던 걸개그림과 판화는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자유를 유포하는 도구 중 대표적인 것이었다. 당시 사회의 여러 문제를 판화에 담아내는 케테 콜비츠의 표현방식과 사회운동에의 헌신은, 자유국가를 열망하는 한국의 미술가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케테 콜비츠의 아버지 칼 슈미트는 원래 법을 공부하였으나 세속적인 출세를 거부하고 미장이가 되어 후에 건축가로 성공하였다.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당시 독일의 복음주의가 아닌 자유신앙을 지지한 율리우스 루프였고 그의 아버지가 후에 장인의 사무실을 물려받았다. 오빠의 친구이자 그녀의 남편인 칼 콜비츠는 의료조합운동을 벌인 의사로 노동자 주거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녀는 미술작품을 통해 사회에 대해 발언하였지만 종교, 사회주의 또는 자유주의 어느 한쪽에만 치중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작품에는 민중과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애정과 그들의 당당한 삶을 위한 투쟁이 자리잡고 있다.
<쌍둥이를 안은 어머니> 1932-36
케테 콜비츠에게 있어 이 특이한 가족력은 환경이었지 그녀가 급작스레 영향을 받은 대상들은 아니다. 그녀 자신 미술가로서 뛰어난 천재성으로 일찍이 주목받았고, 작가의 공부를 충실히 하였다. 그녀는 그녀 바로 전 시대의 인상파 여류화가들이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의 생활과 부르주아식 삶을 표현한 것과는 달리 자신이 속한 사회와 이념을 그려내었고, 주장을 담은 작품을 양산하였다. 당시 서구사회의 명멸하는 사조 속에서 이 작가는 숭고한 예술의 세계를 구축하기보다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한 인간, 주변의 소외받은 이들의 이웃으로서, 역사의 현장을 외면하지 않은 작가로서 우뚝 섰다.
슬픔 앞에서
많은 화가들이 자화상을 남기고 있는데 그것에는 자기애 혹은 정체성이 투사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미술관에 소장된 케테 콜비츠의 자화상은, 작품에 등장하는 노동자나 이웃아낙의 모습처럼 앉아 있는 평범한 한 여인을 보여준다. 세상에 대한 관찰자로서 미술가인 자신을 드러내는 여타의 자화상과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세상과 유리되어 관조자로서 기록의 임무를 띤 예술가가 아니라 삶과 노동 자체를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애에 받아들여 함께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자화상> 1910
미술관에는 현재 265점의 드로잉과 471점의 판화 그리고 포스터와 15점의 조각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그녀는 초기에는 유화를 그리다가 이후 콘테를 이용한 드로잉과 판화작업을 하였다. 노동운동을 담은 〈직공들의 반란〉(1895-98) 시리즈 이후 농민전쟁 당시 가난하고 힘없는 많은 이들이 권력 아래 스러져 가는 것을 고발하였고, 그들에게 직접적인 도움도 주었다. 특히 농민전쟁 자체를 주제로 하여 제작한 〈농민전쟁〉(1902-1908)은 부조리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어서 농민전쟁의 실상을 사회적으로 알리는 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이후 1차 세계대전의 전쟁의 공포와 정치성에 대한 〈전쟁〉(1922-23), 〈프롤레타리아트〉(1925)를 발표하였다. 죽음의 이미지는 그의 전 작품에 공통적인 것이지만 〈죽음〉(1934-35) 연작은 열여덟 살에 1차세계대전에 나가 전사한 작은아들을 잃은 기억의 편린들이다.
<전쟁은 다시는 안돼> 1924
이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들은 전쟁과 혹정에 의한 민중의 굶주림과 비참함, 현실적인 곤궁한 삶을 그림에 그대로 담아냄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호소력있는 작품으로 각인된다. 케테 콜비츠는 자신의 이념에 충실한 동시에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로서, 권력과 선동에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분노의 어머니로서 그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나는 냉정한 태도로 작품을 한 적이 없다. 차라리 내 피를 끓이며 작업을 했다는 것이 옳다.”고 한 그의 작품에 드러나는 모든 분노의 이면에는 짙게 드리운 슬픔이 감지된다. 그 슬픔의 실체는 역사, 민족, 인간, 계급을 포용한 한 예술가의 절박한 영혼으로서, 오늘 우리에게도 그 성숙한 케테 콜비츠의 지성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