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은정(미술사학자, 미술평론가)
반고흐미술관
헌신적인 목회자에서 화가로
고흐에 대한 금전적 명성은 네덜란드에 있는 고흐미술관 지붕이 뜯기고 벽에 걸린 초기작품 2점이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정도가 되었다. 이때 사라진 <누에넨의 교회>와 <스헤베닝겐 해변>을 포함한 초기 작품은 네덜란드의 전통회화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바르비죵파의 장대한 풍경화를 연상시킨다. 색은 어둡고 가라앉았으며 서사적이며 우의적인 내용이다. 그럼에도 이들 작품에서는 이후 고흐가 자신의 특징으로 일군 빠른 붓질, 물감을 겹겹이 쌓아올린 기법 등이 드러나 있는데, <스헤베닝겐 해변>에서는 심지어 바닷가에서 해질녘까지 충실히 그리다가 나중에 자신의 작업실에서 정리함으로써 작업을 마친 인상주의자의 흔적인 바람에 날려 붙은 모래가, 작가 스스로 나이프로 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화면 물감층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었다.
누에넨의 교회, 1884, 캔버스에 유채, 41.5x32cm, 반고흐미술관
고흐가 전적으로 그림을 그린 시간은 8년에 불과함에도 900여 점의 그림과 1700여 점의 스케치를 생산하고, 스스로 귀를 잘라냈다는 일화를 남겼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신화의 세계에 속함은 어쩌면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의 신화적인 명성은 이례없이 동양과 서양 모두의 작가에게 영향을 미치고, 콜렉션하게 하고, 전시회장 앞에 줄을 서게 한다.
작품에 대한 사회적, 심리적, 광학적 분석이 다각도로 시도되고 그의 작품에 대한 진위판단에 대한 논란이 가라앉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흐는 아직 연구중에 있는 작가이다. 그가 그린 그림의 진위 논란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작품에 서명이 별반 없다는 사실이고 이는 그가 극심한 정체성의 혼동을 경험하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청년 고흐는 갤러리에서 그림을 파는 화상이었다.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목사관에서 자라났으며 화랑을 한 숙부들 그리고 동생 역시 화랑의 경영자였던 것이다. 아버지를 제외한 세 명의 숙부는 네덜란드의 유명화상이었고 그가 근무했던 구필화랑 또한 원래는 숙부의 것이었다. 그는 좋은 교육을 받았으므로 프랑스어와 영어를 구사함에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첫사랑에 실패하고 낙담한 청년 고흐는 교회의 성직자가 되어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기로 결심하였다. 가난한 마을의 농부들에게 자신이 지닌 옷가지까지 주며 선교활동을 한 고흐는 매우 정열적으로 복음전파에 힘썼다. 이들 농부들과 함께 할 때 그린 그림이 <감자>, <구두> 등이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대로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까지 나누어 주자 교리에 위배된다는 평가를 받아 정식 목회자로서 발령받지 못한 고흐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화상이 된 청년이 목회자에서 화가로 걸어간 여정은 극히 드라마틱한 점이 있지만 그의 집안을 들여다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감자먹는 사람들, 1885, 캔버스에 유채, 82x114cm, 반고흐미술관
고흐의 삶을 드러내는 미술관
전업작가가 된 후 가난했지만 동생 테오가 고흐에게 보내준 보조금은 당시 빈민, 도시노동자보다 많았으며 심지어 자신의 모델이 되어 준 세 자녀를 거느린 가장 우체부 조제프 룰랭의 1년 수입보다 1.5배 많은 것이었다. 이것이 어쩌면 오늘날 고흐를 가장 잘 이해하는 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파리에서 고흐는 유명화가가 아니었다. 그의 그림은 유명화랑에 걸릴 수 없었으며 그의 그림 구입가를 정기적으로 송금하던 동생 테오도 자신이 근무하는 화랑이 아닌 좁은 아파트 벽에, 방바닥에 줄 세워 놓고 그리고 침대 밑에까지 보관해야 했다. 파리에서 고흐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줄리앙 프랑수아 탕기의 가게에 자신의 그림을 맡겼다. 물감이나 캔버스 같은 재료를 팔던 탕기 영감의 가게에서는 2류화가들의 작품도 거래되고 있었던 것이다. 탕기 영감 진열장 덕에 고흐의 작품은 자유극장 로비와 『르 뷔 앙데팡당』을 발행하던 유명 미술이론가 펠릭스 페네옹의 사무실에도 걸릴 수 있었다. 즉 고흐의 그림이 당시 한 점도 팔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며, 고흐의 생활 또한 그리 비루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천재적인 화가의 비극적 죽음을 둘러싸고 더해진 신화적인 상상력에 의해 고흐는 가난하고 이상한 광기의 천재화가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까마귀가 있는 밀밭, 1890, 캔버스에 유채, 50.5x103cm, 반고흐미술관
오늘날 암스텔담의 강한 햇빛 아래서 몇 시간이고 줄을 서서라도 고흐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충분히 만족시키는 고흐미술관은 팔리지 않은 테오의 그림 수집 덕분이었다. 1973년에 문을 연 이후 1999년 일본인 건축가가 설계한 미술관의 날개가 덧붙여진 외형은 배와 같고 외면과 이어지는 공간은 물과 공기에 의해 구분된다. 배에서처럼 둥근 창에서 빛이 쏟아져들어오는 계단실은 완전히 배 안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고흐 작품 이외에도 특별전시실에서는 동료화가들의 작품이나, 고흐의 영향을 볼 수 있는 작품의 전시 혹은 고흐가 세계미술에 끼친 영향을 증명하는 기획전시가 대규모로 열린다. 한 작가를 보러 들른 미술관에서 의의로 많은 세계적인 작품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광장 근처의 시립, 국립 미술관이나 박물관보다도 많은 인파가 몰리는 고흐미술관에서 우리는 그의 그림뿐만 아니라 그가 수집했던 일본의 그림들도 볼 수 있다. 또한 일본의 골동품과 장식장 등 당시 파리에서 꽤 인기있었던 상품들을 볼 수 있다. 고흐가 받은 일본의 영향은 당시 대개의 화가들이 침몰했던 오리엔탈리즘적인 동방취미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서양의 작가는 예외적으로 이미 20세기 초반인 1920년대 동양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것은 일본을 받아들인 고흐에 대한 동양식 해석의 결과였다. 서양에서 초기에는 고흐 그림의 양식에 대해서만 언급되고 있던 것과는 달리 이미 일본과 중국에서는 고흐의 인성(人性)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고흐의 발작과 관련하여 서양에서는 정신이상으로 분류되던 ‘광기’도 동양에서는 전통적인 천재의 창조적 광기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밤을 그린 화가 고흐
고흐의 작품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콜렉션되고 있지만 고흐미술관의 소장품은 연도별로 일목요연하게 고흐의 작품세계 변화상을 보여준다. 한 작가의 세계가 빠르게 변화하는 것을 보며 인간이 사회로부터 받는 영향, 특히 문화적 충격의 여파를 확인할 수 있다. 감성적인 고흐는 일본의 단순한 구성, 강한 색채와 면 분할 등에 충격을 받았다. 어둡고 침침한 초기 그림은 사실 네덜란드 회화의 전통이었다. 북구의 자연을 그리던 고흐에게 일본의 눈부신 색채는 일본의 자연풍광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하였다. 그래서 태양빛이 넘치는 아를르를 보고는 프랑스의 일본이라고까지 표현하였다.
고흐에게 있어 일본은 단순한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서양 세계의 반대편에 있는 동양의 대명사로 이해되었다. 고흐는 동양식의 붓질, 자연에 대한 생각 등을 일본을 통해 배웠던 것이기 때문에 고흐는 동양미술의 본질을 일본의 그림을 통하여 얻은 것이었다. 특히 〈별이 빛나는 밤〉을 보면 이 그림이 지닌 시간과 공기의 흐름 등이 서양화의 전통에서라기보다는 다른 세계관과 과학적 근거에 의해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서양화의 밤 풍경은 주로 어두운 살육이나 전쟁 또는 신화에나 등장하는 주제이다. 하지만 동양화에서 밤은 흰 꽃을 더욱 빛나게 하고 달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요소로, 달이 있는 그림은 매우 빈번히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나 이글거리는 태양의 표현은 바로 자연의 기와 흐름을 표현하는 동양 그림의 본질을 파악한 것이다.
한 불우했던 미술가를 기리는 미술관은 오늘날 세계 어느 박물관에 못지않은 곳이 되었다. 고흐라는 인물에 동, 서양 모두 매료된 것은 바로 그의 동양과 서양을 모두 이해한 시각, 가난한 자와 중산층의 삶을 모두 이해한 몸으로 산 생활, 그리고 무엇보다 정신적인 순수성 때문일 것이다. 푸른 하늘 아래 노란 밀밭 사이로 날아오르는 검은 새가 그려진 화면을 보며, 그 누구도 인생에 대한 상념을 떨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의 마지막 해에 그린 이 그림이 인간 삶의 여정에 대해 묻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