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은정(미술사학자, 미술평론가)
덴마크의 여름 낮은 정말로 길기만 하다. 오후 대여섯 시쯤인가 보다 하면 벌써 밤 11시가 훌쩍 넘어 있기 일쑤고, “아이고, 해가 중천에 떠있을 때까지 잤네” 하면서 일어나 시계를 보면 새벽 서너 시이다. 하지만 이것은 여름 이야기이다. 이미 8월 중순만 되도 그 춥고 을씨년스런 겨울은 낌새를 드러낸다. 정오의 그림자가 이상하게도 길고, 오후 서너 시만 되면 대낮의 반팔차림이 뼈저리게 후회스럽다. 비라도 조금 뿌릴라 치면 윗니와 아랫니가 상하로 부딪치며 코트를 몸에 두르게 한다.
이런 기후조건의 나라에서 목을 넘기는 시원함을 즐기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맥주가 생산된다는 것은 기이하기도 하다. 하지만 콸콸 쏟아지는 물줄기에서 내뿜는 석회향과 불투명할 정도로 뿌연 액체가 물인 컵을 마주하게 되면, 그 땅에서 맥주가 애용된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뜨거운 태양빛이 필요한 포도를 재배할 수 없으니 물 나쁜 대개의 나라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동안 맥주를 마실 수밖에. 세계에서 독일 맥주가 가장 유명하다지만 독일에서 얻은 두 통의 원액을 실은 마차에 얼음을 채워가며 배양균을 죽이지 않고 덴마크로 들여온 야콥센은 효모발효법으로 세계 맥주의 역사를 바꾸었다. ‘칼스버그’라는 맥주이름이자 회사명은 야콥센의 아들 칼(Carl)이 회사운영을 맡은 이후부터였다. 칼과 그의 아내 오틸리아는 칼스버그 맥주의 제조법을 발전시키고 판매를 증진시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칼과 오틸리아는 유럽에서도 변두리에 속한 덴마크의 예술을 진흥시키고 자국의 위상을 높이고 싶어했다. 이는 칼스버그맥주회사가 갖는 공공적인 성격, 즉 기업의 이익을 자국의 국민에게 환원한다는 의도와도 일치한다. 그들은 덴마크의 예술 전반을 발전시키고 홍보하는 재단을 세워 사업을 벌였다. 덴마크 하면 떠오르는 인어공주상은 1913년 에드바르트 에릭슨(Edvart Eriksen)이 만든 것인데 왕립극장에서 발레극 〈인어공주〉를 본 칼 야콥슨이 동상을 설치하는 아이디어를 내고 후원까지 한 때문이었다. 오늘날 덴마크를 상징하는 조형물인 인어공주상 근처에는 ‘칼스버그 제공’이라는 안내판 하나 발견할 수 없다. 기업의 사회환원이란 생색내기와는 거리가 있고 그것이 유럽의 변방에서 촌스러움을 걷어낸 힘이다.
놀이동산 건너편 미술관
코펜하겐 중앙역 앞의 티볼리공원은 세계적으로 아주 오래된 놀이동산 중 하나이다. 공원 건너편에 있는 이 미술관은 칼 야콥센이 자신의 조각 소장품과 건물을 기증한 뉘 칼스버그 글리토텝을 기본 콜렉션으로 출발하였다. 글리토텍(Glyptotek)이란 ‘조각컬렉션’이란 뜻으로 칼 야콥센은 덴마크 미술은 물론 당대 프랑스 회화와 지중해 지역의 미술에 관심이 많았고 방대한 조각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현재 건물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칼 야콥센 당시의 건물로 19세기 후반의 고풍스런 건물, 그와 중정을 통해 연결된 새로운 모던한 건축공간이 그것이다. 이들 공간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계단까지도 조각의 쓰임새에 따라 전시하는 통합적인 시각을 보인다. Winter Garden이라 불리는 원형의 중정에서는 하늘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밝은 태양빛 아래 만발한 꽃과 멋진 나무들, 그 사이를 흐르는 물과 분수가 어우러진 정원에 자리한 고대 조각을 보며 마치 르네상스시대 쯤의 빌라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조각 콜렉션은 실로 방대하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에트루리아, 로마제국 등 고대 세계와 자국인 덴마크의 조각과 19세기부터 20세기 유럽전역의 조각이 고루 소장되어 있다. 물론 콜렉션의 후발주자이므로 명품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로댕의 방이 따로 있을 정도이고, 한때 유럽 전체를 주름잡은 카르포의 작품들도 방을 넘쳐 외부 회랑까지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다. 고대 근동의 단단하며 생명력 넘치는 조각들 사이에 자리잡은 루이즈 브루주아의 현대적인 작품은 모든 예술이 미를 근원으로 하여 특유의 범주 안에서 이해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집트 전시실은 고요하고 적막한 피라미드 분위기를 재현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조명을 받은 작은 전사들과 서기, 한 시대 가장 중요한 인간이었을 피라미드의 주인공 미이라는 아주 소중히 모셔지고 있다. 루브르에서 대강 맞는 자리에 다닥다닥 전시되어 있는 미이라들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자신의 방을 따로이 가지고 있으며 온갖 부장품들도 여전히 함께하고 있어 고대 이집트로 슬쩍 미끄러져들어간 듯한 기분마저 들게 한다.
고대 유물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유럽에서 덴마크의 문화적 위치를 반영한다. 바이킹의 후예로 그 어느 나라보다 가난하고 소외받던 나라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부를 이룬 나라가 갖는 문화적인 열정을. 또한 자국과 유럽의 우수성을 심는 서유럽과 달리 덴마크 특유의 편견없음, 비내셔널리즘적인 성격을 드러낸다고도 할 수 있겠다.
기업, 사회를 바꾸다
이 미술관이 소장한 회화는 고흐, 고갱, 보나르, 마네, 모네, 드가 등 인상주의에서부터 현대 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조각에 중점은 둔 칼 야콥센이 사망한 이후 그의 아들 헬지 야콥센이 심혈을 기울여 모은 것들이다. 아버지 대의 조각, 아들 대의 회화에 대한 콜렉션 덕에 콜렉션은 다양하고 알찬 것이 되었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
그 중에는 고갱의 〈타히티 여인〉 등이 있는데, 고갱은 특별히 덴마크와 인연이 깊은 프랑스 화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는 덴마크 여인과 결혼하였는데 고갱은 그녀의 강한 성격과 큰 키에 담겨진 고귀함을 찬미했었다.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한 큰 체구에 독립성이 강한 덴마크 여인의 특성이 고갱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주식중개인에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에 들어선 뒤 프랑스에서부터 덴마크로 처가살이를 온 고갱은 예상과 달리 척박한 덴마크의 환경과 추위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타히티에서 제작한 밝은 빛이 가득한 화면과는 전혀 딴판인, 그래서 “고갱 것 맞아?” 라는 의문마저 드는 고갱의 덴마크를 볼 수 있다.
마네의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에서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등장하는 철학자 이미지의 넝마주이를 발견한다. 머리에는 실크햇을 쓰고 몸에는 커다란 망토를 두른 남자 발밑에는 술병이 굴러다니고 그의 옆에는 녹색빛 압생트 술잔이 있다. 압생트는 쑥에서 추출하여 여러 가지 허브를 넣어 만든 리큐어(Liqueur)로 알콜 도수가 68도나 되어 강한 중독성을 보였다. 따라서 압생트를 마시는 계층은 중하층민이 될 수밖에 없었고, 상대적으로 맥주나 포도주는 몸에 좋은 것이 되었다. 급작스런 사회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아노미현상을 증언하는 작품이지만 맥주회사인 칼스버그가 소장하기에도 또한 딱이다. 소장품은 개인 콜렉션이라고 보기에는 광범위할뿐만 아니라 전 유럽을 통괄하려는 의욕을 보이고 있다. 특히 고대문화에 대한 폭넓은 콜렉션과 교육적인 전시방식은 유럽 전체에서 덴마크 문화의 위상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마네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유럽 변두리 가난한 나라에서 세상에서 가장 복지가 잘 된 나라가 되기까지의 눈물겨운 노력 속에서 기업의 공헌은 절대적이었다. 기업 이익의 사회환원은 경제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을 교육하고 고양시키는 것, 그래서 사회 전체가 높은 교양을 소지하고 원하는 모든 이에게 문화적인 혜택을 고루 베푸는 것까지 포함한다. 매주 일요일과 수요일이면 어느 박물이나 미술관 모두 무료로 개방되는 것도 적어도 입장료 없어서 문화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계층이 없기를 바라는 제도이다. 경제적인 부의 축적이 인생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시대에 작품, 건물 그리고 이후의 유지비까지 사회에 기증한 한 집안 덕분에 덴마크의 미술관 중에서도 이곳은 더욱 빛난다. 대기업의 문화사업이 결국은 문화적 독점을 의미하는 천박한 자본주의 세계에 사는 이들에게 이 미술관은 저 멀리서 별처럼 반짝인다.
NY CARLSBERG GLYPTOTEK
주소 Dantes Plads 7 DK-1556 Copenhagen V Denmark
전화 +45 33 41 81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