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도판1 창릉 안순왕후 능침 뒷쪽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도판2 창릉 안순왕후 능 족석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도판3 창릉 안순왕후 능침 장명등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예종의 세자빈인 장순왕후 한씨가 승하하자 예종은 1462년 한백륜(韓伯倫)의 딸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韓氏 ?-1498)와 가례를 올렸다. 그 뒤 1468년 예종이 등극하자 왕비에 책봉되었고 뒷날 승하하자 남편 예종이 묻혀 있는 창릉을 차지했다. 계비였지만 정비인 장순왕후 한씨를 제치고 남편 곁에 누운 것이다.
안순왕후 한씨가 세자빈에서 왕후로 책봉될 적에 예종은 왕비로 봉하는 <봉왕비책문>을 이승소(李承召 1422-1480)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하였다. 여기서 예종은 다음처럼 회고하였다.
“내가 세자였을 적 묘선(妙選*세자빈으로 간택됨)을 받아왔지. 빈궁(嬪宮)으로 나를 경계하고 서로 이룩하여 오직 덕이 있는 행의로써 우리의 삼한(三韓)을 돕고 양궁(兩宮*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을 기꺼이 받들더니 이에 원자를 탄생하여 이로써 우리 방가(邦家)의 경사를 두터이 하였다네.” 1)
또 남편 예종이 죽은 뒤 성종이 왕위에 오른지 2년 째인 1471년 1월 성종은 안순왕후에게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라는 존호를 올렸다. 그 때 지은 <왕대비 상존호 책문>에는 다음처럼 안순왕후를 찬양하는 문장이 들어가 있다.
“공손히 생각건대 성품은 온유하시고 자비로움과 검소하심으로 몸소 행하사 이로써 내정(內政)을 닦으시었으니 국모의 도와 의범은 이미 융성해지셨습니다.”2)
공릉,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
도판4 공릉 장순왕후 하늘에서 본 풍경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도판5 공릉 장순왕후 능침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공릉은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韓氏 1445-1461)가 홀로 누워계신 곳이다. 지금 경기도 파주군 조리면 봉일천리에 있는데 이곳엔 세 개의 능이 모여있어서 공순영릉(恭順永陵)이라 부른다. 장순왕후 한씨의 공릉과 함께 성종의 비 공혜왕후(恭惠王后) 순릉(順陵),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眞宗)의 영릉(永陵)이다.
다른 능은 몰라도 역사를 아는 이는 이곳 공순영릉을 들러야 한다. 효장세자는 정조의 양아버지이자 정조의 친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형이니까 이곳 영릉은 영조-효장세자-사도세자-정조 3대에 걸친 대하소설이 흐르는 땅의 한 곳이며 또한 장순왕후와 공혜왕후 자매의 아버지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일대기를 엮어 나갈 매듭이 이곳에 있는 까닭이다.
예종이 세자 시절인 1460년 한명회의 셋째 딸인 장순왕후 한씨와 가례를 올렸다. 그리고 다음 해 1461년 11월 원손 인성대군을 낳았지만 한 달 뒤 산후 병으로 승하했다. 세조는 며느리의 죽음에 온순하고 너그러우며 자혜롭다는 뜻의 장순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고 또 뒷날 성종 때 왕후로 추존하여 그의 능호를 공릉(恭陵)이라 하였다. 장순왕후 한씨는 성종의 비인 공혜왕후(恭惠王后)와 친자매 사이다.
장순왕후는 겨우 17년을 살다가 갔으므로 세조는 어린 며느리의 죽음을 당하여 ‘요상(夭殤)하는 재앙(災殃)’이라 하였다.
“세자빈이 머무는 달 빛 궁궐인 섬궁(蟾宮*세자빈)의 혼백이 떨어지니 세자의 궁궐인 학위(鶴闈*세자)는 슬픔에 뒤얽혔도다. 기화요초와도 같은 요화(瑤華*자식)가 떨어져 없어졌음을 비통해 하면서 생각하면 네 아름다운 음성이 여전히 귀에 남아 들리는구나.”3)
뒷날 사림(士林)의 종장(宗匠)으로 추앙받았던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장순왕후 애책>을 지었는데 가슴이 사무치는 슬픔으로 넘치는 명문장이다.
“청주의 한씨 집이 이에 오로지 으뜸가는 공훈이 있어 크고 훌륭한 재원을 바로 탄생하니 비로소 동궁이 짝을 안으셨습니다. 지위와 인망이 이미 높으시매 그 타고난 자태가 능히 아름다우시고 이른 새벽부터 밤까지 경계하여 내조함에 허물됨이 없이 얼을 살폈습니다. 시어머니인 중전(*정희왕후 윤씨)의 뜻을 순종으로 따르고 맞추시니 그 아름다운 덕행과 언어를 익혀 이어받아 신령이 부러울만한 복을 내리시어 경사가 조화로운 화합을 받아 안으시기에 이르매 비로소 훌륭한 원손(元孫)을 탄강하시었습니다. 이에 여망(輿望)이 복속하는 바이고 크나큰 아름다움이 가이없어 하늘의 큰 경명(景命)이 뒤따름이 있었는데 대저 어찌하여 나쁜 기운이 저녁을 연하여 그 징조를 고하더니 경사의 환성이 미처 파하지도 아니하여서 애통스런 조문(吊問)이 졸지에 비등(沸騰)하는 것이란 말입니까.
이 산이 무너진 뒤 640년 뒤 성녀(聖女)가 나온다는 저 사록(沙麓)의 상서로움은 순간에 그치고 월궁(月宮*세자빈)의 의범(儀範)은 그 얼이 숨어 어슴프레 빛을 잃었습니다. 슬픔이 척리(戚里*청주)에 뒤얽히니 아픔이 대궐에 사무쳤습니다. 오호라 애통하옵니다.”4)
공릉은 처음에 세자빈의 묘로 조성하여 능의 격식을 갖추지 못했다. 그 뒤 남편인 예종이 왕위에 즉위함에 따라 왕후로 추존되어 능으로 격상되었지만 수렴청정을 하던 대왕대비 정희왕후 윤씨가 폐단을 없앤다고 능의 격식을 갖추지 못하게 막았다. 대왕대비의 남편 세조가 그렇게 아름답다 했던 며느리여서 그렇게 미워했던 것일까. 아니면 며느리의 친정 아버지인 한명회의 권세를 시샘해서 그런 것일까.
도판6 공릉 장순왕후 배위(홍살문 옆)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도판7 공릉 장순왕후 서쪽 문석인 앞면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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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승소, <봉 왕비 책문>, <<선원보감>>3권, 계명사, 1989. 187쪽.
2) <왕대비 상존호 책문>, <<선원보감>>3권, 계명사, 1989. 187쪽.
3) <장순왕후 시책>, <<선원보감>>3권, 계명사, 1989. 181쪽.
4) 김종직, <장순왕후 애책>, <<선원보감>>3권, 계명사, 1989. 182-183쪽.
1) 이승소, <봉 왕비 책문>, <<선원보감>>3권, 계명사, 1989. 187쪽.
2) <왕대비 상존호 책문>, <<선원보감>>3권, 계명사, 1989. 187쪽.
3) <장순왕후 시책>, <<선원보감>>3권, 계명사, 1989. 181쪽.
4) 김종직, <장순왕후 애책>, <<선원보감>>3권, 계명사, 1989. 182-1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