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판1 창릉 정자각 왼쪽이 예종능 오른쪽이 안순왕후능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도판 2 창릉 산릉도 <창릉지> 18세기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서오릉의 유래
서오릉(西五陵)을 택지한 이는 세조다. 세조는 정변을 일으켜 조카의 왕위를 빼앗아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는데 그 벌이었던지 왕세자로 내세운 의경세자(懿敬世子 1438-1457)가 겨우 20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비통해 마지 않던 세조는 두 달 동안에 걸쳐 경기도 일대를 뒤지도록 하고서 추천받은 길지(吉地)를 둘러 보고서 손수 이곳을 묘 자리로 정하였다. 이것이 서오릉의 시작이다. 의경세자 묘소는 처음엔 대군묘(大君墓)로 조성하였지만 뒷날 그의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덕종으로 추존하여 사후에 왕이 되었고 그 대군묘는 능으로 격상되었으니 그게 바로 경릉(敬陵)이다. 하지만 의경세자는 세자였을 뿐 왕위에 오르지 못했고 세조의 대를 잇는 왕은 의경세자의 아우 해양대군(海陽大君)으로 그는 형이 요절함에 따라 왕세자가 되었다가 1468년 9월 7일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조선 제8대 왕 예종(睿宗) 이황(李晄 1450-1469)이다.
그런데 예종은 즉위 13개월만에 승하했다. 예종은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韓氏 1445-1461)와 둘째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韓氏 ?-1498)다. 정비인 장순왕후는 예종보다 9년이나 일찍 산후 병세로 승하했다. 이 때 세조가 상왕으로 건재하고 있었는데 풍수 전문가인 세조는 며느리를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파주삼릉 땅에 묻었다. 이 때 며느리 장순왕후는 세자빈이었으므로 왕릉이 아니라 세자빈묘로 조성하였다.
그리고 9년 뒤인 1469년 예종이 승하해 왕릉을 택지했는데 당연히 앞서 누워 있던 세자빈묘역을 왕릉으로 개수하면서 그 곁에 누울줄 알았건만 엉뚱하게도 자신의 형인 의경세자가 누워있는 땅 옆으로 가서 새로운 왕릉 다시 말해 창릉(昌陵)을 조성해버렸다. 아마도 당대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하던 예종의 어머니 정희왕후가 그렇게 결정했을 것이다. 또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 한씨가 살아있었으므로 남편의 첫 부인 장순왕후 곁에 눕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바로 둘째인 안순왕후는 예종보다도 30년을 더 살다가 1498년 첫째인 장순왕후 한씨를 제치고 예종 곁에 누웠으니까 뜻을 이룬 셈이다. 뒷날 이곳 일대로 숙종의 명릉, 숙종비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 영조비 정성왕후 서씨의 홍릉이 들어섬으로써 다섯 릉이 조성됨에 따라 서오릉이라 불렀다. 그 밖에 명종의 첫째 아들 순회세자의 순창원이 있고 또 경종의 생모인 장희빈의 묘인 대빈묘도 있다. 그 중 장희빈의 대빈묘는 1970년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서 이장해 온 묘소다.
장영훈은 <<왕릉풍수와 조선의 역사>> <창릉> 편에서 동구릉과 서오릉의 풍수를 비교해 두었는데 두 왕릉풍수에서 형세(形勢)는 족보가 같지만 ‘바람을 감추는 장풍(藏風)’은 다르다고 했다. 동구릉은 ‘산줄기들로 겹겹이 둘러싸여 장마철 습기가 빠져 나가지 못해 그대로 차곡차곡 쌓이는 데서 보듯이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中央集權)’이고 서오릉은 동구릉과 달리 ‘자연스레 흩어져 있어 적당한 통풍을 허용하는 장풍 국면이라 자유분방한 지방자치(地方自治)’라는 것이다.
창릉 풍수
도판 3 창릉 예종능 능침 뒷면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도판4 창릉 예종능 능침 앞면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중국 동진(東晉) 시대 사람인 곽박(郭璞)의 <<장서(葬書)>>에는 “죽은 사람은 생기(生氣)에 의지해야 한다”고 하고서 다음처럼 썼다.
“그 기(氣)는 바람을 타면 흩어지고 물에 닿으면 머문다. 그래서 바람과 물을 이용하여 기를 얻는 법술을 풍수라 일컬었다.”
따라서 능묘 터를 잡을 때면 앞에 냇가를 중시했고 그 능묘 앞을 흐르는 냇가 위에는 다리를 설치하는데 이것을 대체로 금천교(禁川橋)라 한다. 궁궐 앞이나 절집 입구에도 금천교를 설치하곤 하는데 창릉에도 바로 그 금천교가 있다. 이렇게 시작하는 창릉 풍수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간행한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2권 <창릉>편에 다음처럼 기록하고 있다.
“풍수형국적 지형의 맥은 북한산 비봉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려오며, 향로봉과 불광사 뒷봉우리를 거쳐 박석고개에서 통일로를 넘어 산봉우리를 이루어 앵봉과 용두동에서 혈을 이루고 있다. 이를 <대동여지도>에서는 효경봉으로 일컬으며, 서오릉의 주산이 된다.
효경산은 일명 응봉, 앵봉, 서달산이라고 하며, 수색 방향으로 산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있으며, 벌고개를 지나 봉산과 증산 봉우리를 솟구치고 난지도에서 산세가 소멸된다. 북쪽의 효경봉(앵봉)을 중심으로 동에서 서로 이르는 능선의 하부인 남사면의 중심에 경릉이 자리잡고 있으며, 좌측 능선에는 창릉이 자리하고 있다.“
장영훈은 <<왕릉풍수와 조선의 역사>> <창릉> 편에서 서오릉이 지방자치와 닮은 장풍 국면이라고 하는 가운데 그게 서오릉에 안장된 왕의 인격까지 닮았다고 지적했다. 왕권과 신권의 대립구도로 보면 통치 13개월 동안 예종의 왕권은 어머니와 신하 신숙주, 한명회에게 옮겨 가 있었다. 권력이 흩어져 있었던 게다. 그렇게 보면 ‘장풍 국면에서 지방자치’란 지나친 비유이긴 해도 권력의 분산이라는 점에서 정곡을 찌르는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