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판1 광릉 정희왕후능 뒤에서 바라본 풍경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도판2 광릉 정희왕후능 정자각에서 바라본 풍경 -최열 촬영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 윤씨는 윤번(尹璠)의 따님으로 세조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정희왕후가 세상을 떠나던 1483년에 지은 <정희왕후 광릉지>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태어나면서 맑고 고왔으며 타고난 자질이 범상치 아니하였는데 세종 10년 1428년에 세조대왕이 비로소 공궐을 나설 때 세종대왕께서 그 어진 베필을 오묘히 고르시는데 태후(정희왕후)가 그 덕용과 가문의 성망으로 뽑힘을 입어 왕실에 시집을 왔다.” 1)
정희왕후는 자신이 왕비의 자리에 오를 줄 모르고 결혼했다. 이후 남편이 왕위에 올랐는데 따라서 왕비가 되었지만 그저 가만히 앉아 있다가 얻은 자리는 아니었다. 1453년 세조가 계유정난이라는 정변을 일으킬 때에 정희왕후는 몸소 나서서 망설이는 남편을 독려했다. 협력자 정도가 아니라 주도자라 할만큼 나섰던 것이었다. 여장부란 별명이 생긴 건 이 때의 일이다.
도판3 광릉 정희왕후능 서쪽 무석인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그러나 남편이 등극한 뒤로는 정치 일선에 나서지 않았다. 세조의 강력함에 기가 눌렸던 것이겠다. 정희왕후는 무척 검소하고 부지런한 여성이었다. <정희왕후 광릉지>는 다음처럼 하였다고 기록했다.
“빨아 세탁한 옷을 다시 입으시었고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배척하여 물리치셨으며, 후궁과 궁녀를 예로써 접하시고 은혜를 깊이 하심이 아래에까지 미치니 비록 천한 여례(女隷)에 이르도록 반드시 인륜을 공경하는 덕으로 사랑하시었다.”2)
남편 세조가 승하하자 둘째 아들 예종이 즉위하였는데 이 때부터 정치가의 자질을 발휘했다. 수렴청정(垂簾聽政)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예종이 일찍 승하했다. 이 때 왕통을 이을 사람을 고를 지위에 올라 있던 정희왕후는 첫째 아들 의경세자가 낳아둔 두 아들 가운데 둘째 아들 다시 말해 정희왕후 자신의 둘째 손자를 왕위에 올렸다. 순서에 맞지 않는 선택이었지만 거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손자가 바로 성종인데 겨우 열 세 살짜리였다. 정리하자면 살아 생전에 정희왕후는 세 명의 남자를 왕으로 탄생시킨 여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66년의 생애가 결코 행복하기만 한 일생은 아니었다. 첫째 아들 의경세자가 겨우 20살에 요절했고 또 왕위에 오른 둘째 아들 예종도 의경세자와 같은 20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두 아들 모두 자신보다 먼저 저세상에 보내는 불행을 맛보았던 것이다.
정희왕후는 성종을 보위에 올려두고 자신이 정무를 관장했다. <정희왕후 광릉지>에서는 성종이 태후(太后)인 정희왕후에게 청정(聽政)을 청하였고 또 “오직 군정(軍政)의 중대한 일만을 겨우 품결케 할 뿐이었고 그것도 얼마 있지 아니하여 전하에게 환정(還政)시켜 다스리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문장에 이은 다음 문장에서 이 때의 정희왕후를 다음처럼 묘사했다.
“태후께서 성종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정무에 또한 정신을 기울이시니 일찍이 한가히 쉬며 일락(逸樂)을 가질 겨를이 없었으나 자애와 인덕과 어머니의 따스히 기르는 정으로 만물이 봄볕과 더불어 즐기게 하니 여러 해 동안 조야가 편안하고도 조용하였다.”3)
국정 일선에 매우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것이다. 물론 정희왕후가 태후의 수렴청정을 하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니다. 열 세 살 짜리 성종은 당시 권세를 누리던 세조의 신하 한명회의 사위였고 이를 의식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또 자신이 무려 7년 동안이나 수렴청정을 한 까닭도 아직 미약한 성종을 보호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의 수렴청정에 대하여 <정희왕후 광릉지>에서는 사람에게 죄와 허물이 있으면 은혜로써 용서해 주려는데 힘썼고 또 자신이 법에 어두어 다스리고자 하지 않았고, 나아가 지극히 공평하여 친척이라고 해서 사사로운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고 한다.4) 그녀는 결단력 넘치는 과감한 정치인의 자질을 아낌없이 발휘하여 왕권을 안정시키고 평화로운 시절을 누리도록 했으며 1476년 정치일선에서 물러나는 철렴(撤簾)을 한 뒤에는 그야말로 정치와는 담을 쌓았다.
도판4 광릉 정희왕후능 서쪽 문석인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도판5 광릉 정희왕후능 최열 촬영
<정희왕후 광릉지>의 필자는 정희왕후의 업적으로 특별히 성종을 왕위에 세운 일을 꼽았다. 바로 그 어린 손자가 무려 20살이 될 때까지 성장시켜 놓은 뒤에 철렴을 하고 보니 세월이 무척 많이 흘러갔고 자신은 쇠약해져 있었다. 병 든 몸이었으나 성종의 지극한 배려로 거의 약물을 물리칠 수 있을만큼 병세가 호전되었다. 그리하여 1482년 봄 정희왕후는 경복궁으로 옮겨 한가한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한 해가 흘렀고 1483년 봄 온양온천(溫陽溫泉)으로 행행했지만 효험도 없이 악화됨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나이 66살이었다. 정희왕후는 이 때를 당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겼다고 한다.
“내가 국가에 공이 없으니 내가 죽거든 후한 장례를 행하지 말라” 5)
그러면서 정희왕후는 자신의 수의를 만들어 두었는데 “모두 면포를 사용하고 무늬 비단이나 화려한 물건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6) 정희왕후는 불심이 깊었다. 세조가 광릉에 묻히자 근처의 봉선사(奉先寺)를 광릉의 원찰(願刹)로 지목하고 돈을 내어 크게 확장했다. 고려시대 광종 때인 969년 법인국사가 창건한 절집이 세조 덕분에 중창의 계기를 맞이한 것이다. 봉선사는 한국전쟁 때 불타고 말았는데 그 뒤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쪽으로 갈린 능의 풍경
광릉이 대단한 명당이라 하는데 입구를 걸어 들어가 홍살문을 지나면서 그 장엄함은 끔찍할 정도다. 복판의 정자각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젖가슴이 치솟는데 그 꼭지점에 두 개의 봉분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 양쪽 젖꼭지를 유두혈(乳頭穴)이라 하고 부부가 각자 바로 그 두 개의 꼭지를 하나씩 차지하고 누운 것이다. 이것을 능묘의 양식으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라 한다. 조선 건국이래 처음으로 조성된 이 형식은 조금 기묘한 느낌을 준다. 부부가 저렇게나 멀리 따로 갈라져 있어야 하는 것인가 싶었다. 게다가 젖가슴이 하도 커서 그 언덕이 너무 가파르므로 봉분까지 가려면 등산하는 기분으로 올라야 하는데 이렇게까지 했구나 싶은 마음이 들정도다.
왜 이런 곳을 골랐는지는 그저 명당이기 때문이라는 말만으로는 공감하기 어렵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세조의 후손이 마지막까지 배출되었으니 명당은 명당인 모양이라고 굴복할 밖에.
오늘날까지 이곳 광릉 일대가 잘 보존된 까닭은 자명하다. 조선 440년 동안 풀 한 포기를 뽑는 것조차 금기였던 왕릉이었기 때문이지만 세조 이후 자손들이 고스란히 왕위를 마지막까지 지켜나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잘 보존되었으므로 일대에는 오늘날 국립수목원이 그 숲을 자랑한다. 어느 왕릉인들 그렇지 않을까마는 유독 이곳 광릉 일대는 숲으로 울창하여 하늘마저 가려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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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희왕후 광릉지>, ≪선원보감≫, 계명사, 1989. 175쪽.
2) <정희왕후 광릉지>, ≪선원보감≫3, 계명사, 1989. 177쪽.
3) <정희왕후 광릉지>, ≪선원보감≫3, 계명사, 1989. 176쪽.
4) <정희왕후 광릉지>, ≪선원보감≫3, 계명사, 1989. 177쪽.
5) <정희왕후 광릉지>, ≪선원보감≫3, 계명사, 1989. 177쪽.
6) <정희왕후 광릉지>, ≪선원보감≫3, 계명사, 1989. 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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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희왕후 광릉지>, ≪선원보감≫, 계명사, 1989. 175쪽.
2) <정희왕후 광릉지>, ≪선원보감≫3, 계명사, 1989. 177쪽.
3) <정희왕후 광릉지>, ≪선원보감≫3, 계명사, 1989. 176쪽.
4) <정희왕후 광릉지>, ≪선원보감≫3, 계명사, 1989. 177쪽.
5) <정희왕후 광릉지>, ≪선원보감≫3, 계명사, 1989. 177쪽.
6) <정희왕후 광릉지>, ≪선원보감≫3, 계명사, 1989. 1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