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세조는 1417년 9월 29일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 사이에 두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세조대왕 행장>에 따르면 “하늘로부터 받은 자질이 영명하여 배우기를 좋아하고 게으르지 않았다”면서 “성품이 지극히 효성1)”스럽다고도 하였다. 세조가 16살 때 부친 세종대왕을 따라 왕방산(王方山)에서 강무(講武)를 할 적에 사슴과 노루 수십 마리를 쏘았더니 피가 바람에 날려 겉옷이 다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에 늙은 무사들이 그러한 세조의 모습을 보고서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다음처럼 아뢰었다고 한다.
“오늘 뜻 밖에 다시 태조의 신무(神武)를 뵙는 듯 합니다.” 2)
또한 그의 형 문종(文宗)은 아우 세조의 활에다가 다음처럼 써주었다.
“철석 같은 그 활이여, 벼락인냥 그 살이로다. 버티임은 보겠으나, 풀어짐을 못 보겠네”3)
도판1. 광릉 세조능 석상 아래 받침 족석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세조, 다재다능한 군주
세조는 왕위에 오른 뒤 1459년 대신들과 더불어 후원에서 활쏘기를 즐기는 가운데 자신의 어린시절을 다음처럼 회고하였다.
“나는 소년 시절에 웅장하고 마음이 씩씩하여 스스로 유예(遊藝)를 평생의 업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구나.”4)
조카의 왕위를 찬탈했으므로 웅장한 꿈을 꾼 소년이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여러 가지 기술을 뜻하는 ‘예(藝)’ 속에서 노니는 인간을 희망했었다는 사실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해괴한 변명인 셈인데 여기서 ‘예(藝)’를 문예가 아니라 문무 겸전의 기술로 해석하면 모순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만큼 세조는 문과 무 전반에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세조대왕 행장>은 세조가 과단성도 있고 용기도 있으며 지혜로웠다고 하면서 다음처럼 묘사하고 있다.
“경사(經史)와 제서(諸書)를 한 번 보면 잊지 아니하였고 고금을 두루 통하였으며, 역산(曆算), 음률(音律), 의복(醫卜)의 이치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연구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5)
그와 같았던 세조는 조카의 왕좌를 빼앗아 스스로 왕위에 올랐지만 왕위에 오른뒤 다음처럼 하였다.
“밤낮으로 척려(惕慮 *위태롭고 두려워하여 몸을 수양함)하고, 서정(庶政 *백성을 위한 정치)을 근심하며 부지런히 하셨다. 항상 농사와 학문을 일으키는 것에 힘쓰고 어진이를 구하고 군사를 기르는 것으로써 선무(先務*먼저 힘씀)를 삼았다.”6)
도판2. 광릉 세조능 서쪽 무석인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세조의 군주학
세조는 왕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체득한 군주였다. 세자에게 주는 <훈사(訓辭)>를 손수 지어주면서 늘 외우도록 하였는데 그 훈사의 내용 열 가지 항목은 곧 세조가 생각하는 군주의 태도였다.
“늘 변함없이 한결같은 덕을 가질 것[恒德], 신을 공경하여 섬길 것[敬神], 간언을 받아들일 것[納諫], 음해를 막을 것[杜讒], 사람을 쓰는 일[用人], 사치하지 말 것[勿侈], 환관을 부리는 일[使宦], 형벌을 신중히 하는 일[愼刑], 문무 배양과 부모의 뜻을 잘 따를 것[善述].”7)
이러한 군주의 소명을 세조는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는데 등극한 바로 첫 해 7월에 각 지방의 목민관인 감사(監司)에게 하교하는 말에서 그 태도와 노력하는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대저 나라가 나라된 까닭은 군민(軍民)일 따름인데 백성의 폐단을 알고서도 조치하는 바가 없다고 하면 내가 목민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감사는 수령을 독려하고, 나는 감사를 독려하면 체통이 서로 이어져 강거목장(綱擧目張 *아래는 위에서 하는대로 다루어 진다)해지는 것이니 이것이 곧 나라의 큰 정사(政事)인 것이다.”8)
세조는 세심한 인물이었다. 그렇게 대강만 말하지 않고 매우 자상하게 그 내용을 열거하였다.
“지금부터 만일 성심으로 학문을 손에서 놓지 않고, 농상(農桑)에 힘을 쓰며, 종축(種畜)을 부지런히 하며, 병마(兵馬)를 기르고, 지체되는 죄수가 없게 하며, 자기 몸을 받들기를 가벼이 하고, 늙고 병든이들에게 은혜롭게 하며, 학교를 일으키는 자가 있으면 내가 반드시 뽑아쓸 것이요, 그러나 조금이라도 이를 어기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무겁게 다룰 것이다.”9)
이어서 세조는 착한 이를 상주고, 악한 자를 벌 줄 것이라면서 “내가 감히 사사로움을 두어 하늘의 마음에 누를 끼치겠느냐”고 호령하였던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았다. 1458년에는 감사보다도 훨씬 가까이서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인 각도의 수령(守令)들에게 “요순(堯舜)이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다스리는 데에는 반드시 고굉(股肱)의 도움이 있어야 했다”고 하면서 “그대들은 나의 고굉이요, 사방을 나눠 근심하는 신하들이 아닌가. 대개 하늘이 백성을 낳아 임금을 두는 까닭은 하늘이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므로 반드시 임금을 빌어서 하는 것이며, 임금은 홀로 친히 다스릴 수 없으니 정치를 백관에게 맡기는 것이다”라면서 다음처럼 하교하였다.
“인주(人主)는 백관과 더불어 함께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니, 마땅히 하루하루를 삼가야 하는 것이오, 항상 천심에 합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해야 할 것이오, 임금이 만약 함부로 방종하여 백성의 일을 돌보지 아니하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다.”10)
그러므로 세조는 국가재정을 튼실하게 하면서도 백성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관료와 대지주를 억제하는 직전제(職田制)라는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또 사회안정을 위하여 호패법(號牌法) 실시를 재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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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조대왕 행장>, 《선원보감》1권, 계명사, 1989. 218쪽.
2) 이긍익, <세조조 고사본말>, 《국역 연려실기술》1, 민족문화추진회, 1966. 491쪽.
3) 이긍익, <세조조 고사본말>, 《국역 연려실기술》1, 민족문화추진회, 1966. 491쪽.
4) <세조대왕 행장>, 《선원보감》1권, 계명사, 1989. 220쪽.
5) <세조대왕 행장>, 《선원보감》1권, 계명사, 1989. 224쪽.
6) <세조대왕 행장>, 《선원보감》1권, 계명사, 1989. 218쪽.
7) <세조대왕 행장>, 《선원보감》1권, 계명사, 1989. 219쪽.
8) <세조대왕 행장>, 《선원보감》1권, 계명사, 1989. 218쪽.
9) <세조대왕 행장>, 《선원보감》1권, 계명사, 1989. 218쪽.
10) <세조대왕 행장>, 《선원보감》1권, 계명사, 1989. 219-2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