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망봉
동망봉(東望峯)은 정순왕후의 정업원 동쪽에 솟은 산봉우리다. 일제 강점기 때 이곳의 바위가 좋아 채석장을 개설한 이래 온통 그 자취가 사라져버렸고 지금은 그저 숭인근린공원이 흔적처럼 조성되어 거기 동망정(東望亭)을 세워두었다.
동망정 (출처 홍미숙, 《왕곁에 잠들지 못한 왕의 여인들》)
정순왕후는 정업원에서 아침저녁으로 이곳 동망봉에 올라 동쪽 영월을 향해 간구했다. 남편 단종이 살아있을 적엔 안부를, 사약으로 승하한 다음엔 명복을 그렇게나 빌었다. 그 사연 너무나 기구해서 250년이 지난 뒤 영조는 ‘동망봉’이란 글씨를 친히 써서 동망봉 바위에 새겨두라 했을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그 흔적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가까이 보문동6가 주민들이 매년 음력 10월 초하룻날이면 동망봉 산신각(山神閣)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을 뿐이다.
자줏골
정업원에 세 시녀와 함께 살던 정순왕후는 그 신분이 왕후에서 평범한 부인으로 전락당해버렸으므로 생계가 막막했다. 처음엔 시녀들이 이곳저곳에서 얻어오는 음식으로 끼니를 때웠다. 하지만 정순왕후는 용기있는 인물이었다. 용기만이 아니라 지혜로운 인물이었는데 정업원 서남쪽 지금의 창신1동 종로구민회관 앞 길에 있던 쪽다리[藍橋] 어간에 염색장을 차렸다. 이곳에서 쪽빛 물을 들여 팔았으니 남의 신세 질 일 없이 그토록 맑고 곱게 살아갔던 것이다. 그 염색장조차 널리 알려짐에 사람들은 자줏빛 물들곤 하던 그 일대 고을을 자줏골이라고 불렀는데 20세기 중엽까지도 그 곳을 부를 때면 ‘자줏골’이라 했다고 한다. 자줏골 샘터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자줏골 샘터 -정순왕후의 염색공장 터(출처 홍미숙, 《왕곁에 잠들지 못한 왕의 여인들》)
정순왕후가 이처럼 일까지 해가며 초가에서 곤궁하게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세조가 동망봉과 영도교 중간쯤 어느 어간에 영빈정(英嬪亭) 또는 영빈전(英嬪殿)을 지어 주었다. 하지만 올곧은 정순왕후는 남편을 죽이고 자신을 그렇게 만든 세조의 호의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입주하지 않은 채 버려두었더니 세월이 흘러 그 일대를 또 사람들이 영빈정골[英嬪亭洞]이라고 불렀고 20세기 중엽까지도 그 지명이 전해내려왔을 정도였다.
재동
지금 헌법재판소가 자리잡고 있는 곳에 재동백송이 있다. 나이가 6백년이 넘고 또 백송 가운데 가장 뛰어나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는데 창덕여중고등학교가 이사가기 전까지는 학교 교정에 있었다. 그런데 이곳 일대를 잿골[齋洞], 횟골[灰洞]이라고 부른다. 그 이름의 연원을 《한국지명총람》에서는 다음처럼 썼다.
“단종 때 수양대군이 모사 한명회의 말을 들어, 단종이 그 누님 경혜공주의 집인 영양위궁에 간 기회를 타서 그 보빌파는 신하들을 꾀어 들여 학살하여 그 피가 내를 이루었으므로 잿골, 또는 한자명으로 회동, 재동이라 하였는데” 1)
수양대군이 김종서 장군을 쳐죽이고 군사를 이끌고 저 경혜공주 집에 들이닥치자 어린 단종이 살려 달라고 호소하였고 이에 수양대군은 걱정말라며 왕명으로 조야의 대신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미리 마련해둔 살생부(殺生簿)에 따라 거침없이 쳐 죽였으므로 이 일대의 땅이 그 피로 물들고 피내음이 진동하였다. 바로 이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권력을 장악하고서 피로 물든 온 마을에 재를 뿌려 감추고자 하였더니 사람들은 그곳을 잿골 또는 횟골이라 불러 피를 감추는 재의 뜻을 영원히 잊지 말자고 하였다.
채소시장과 송씨부인
도성 안팎의 숱한 부녀자들이 끼니가 되면 푸성귀를 들고 정업원으로 모여들었다. 소문이 나고 보니 더욱 많아 긴 행렬을 이루기 일쑤이니 시위와도 같아 보기 싫어 금지하였다. 하지만 그 부녀자들이 누구인가. 꾀를 내어 정업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모여들어 마치 푸성귀를 사고파는 장터를 개설하고서 정업원의 시녀들로 하여금 장을 보러 나오면 푸성귀를 한아름 안겨주곤 했다. 그리고 이 채소시장엔 온통 아낙네들 뿐이었으므로 남성은 발걸음 하지 못하게 하여 금남의 채소시장으로 알려졌다. 채소시장이라고 남성이 발들이지 말라는 법 없지만 아무래도 단속하는 자들이 병졸이라 남자이므로 그들을 막으려는 계책이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정순왕후의 사연은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고 따라서 그 기구함은 신앙의 세계가 되었다. 조선의 무당들에게 각자 모시는 신(神)이 숱하게 많고 또 자신만의 주신(主神)도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송씨부인이 가장 많아졌다. 송씨부인은 한이 맺혀 슬픈 조선의 여인들을 상징하는 정순왕후의 영혼이라고 한다. 자신의 알 수 없는 운명을 그렇게 의탁하고 싶었던 것인데 세상을 떠났어도 떠난 게 아니라 조선 곳곳 무당집에 들어가 슬픈 운명의 여인들과 나누고 있는 것이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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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1, 한글학회, 1966. 236쪽.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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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상, 《서울육백년》4, 대학당, 1996.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홍미숙, 《왕곁에 잠들지 못한 왕의 여인들》, 문예춘추사,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