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열(미술평론가)
영월가는 길
도1 영월부 해동지도 47.5x30cm, 18세기중엽. 규장각
도2 영월 청령포 전경
도3 월중도 중 <청령포도> 28.9x33.4cm, 1800년전후. 장서각
도4 영월 청령포 옆 망향탑
세조는 어린 조카를 노산군으로 강봉하는 것도 성에 차지 않아 그 6월 21일에 강원도 영월 땅으로 유배길을 떠나 보냈다. 당연히 함께 갔어야 할 왕비 정순왕후 송씨를 떼어놓고서 말이다. 물론, 단종의 뜻이 아니라 저 세조의 뜻이었으니까 부부의 인연마저 자른 것이었다. 멀고 먼 길을 옮겨 7월 초순 어느 날 영월 서강(西江) 청령포(淸泠浦)에 도착했다. 이 때 단종을 호송했던 금부도사가 밤이 깊자 곡탄(曲灘) 언덕에 앉아 슬픈 노래를 지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맘과 같구나 울어 밤길 예도다
당시 호송 책임자는 어득해였지만 그가 저 곡탄가를 지은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임무를 수행한 어득해는 세조의 명에 따라 단종이 이곳 청령포를 벗어나선 안된다는 '금표(禁標)'를 세워두었는데 이 금표비는 지금껏 전해내려 오고 있다. '동서 300척, 남북 490척(尺)'이라고 써두었는데 세조의 단호한 의지를 새긴 것이지만 두려움의 표시이기도 했다. 오직 여섯 명의 궁녀와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것은 세조의 명령에 따른 게 아니라 단종이 상왕시절 데리고 있던 궁녀들 스스로 따라 나선 것이었고 또 내시 두 사람도 따라 왔는데 뒤에 이 사실을 알아 챈 세조는 모른체 하고 말았다. 단종은 청령포 이곳 저곳에 흔적을 남겨두었다. 지금도 여전한 관음송(觀音松)이며, 가파른 절벽에 쌓아 둔 돌탑인 망향탑(望鄕塔)이 그 외로움을 증거하고 있다.
청령포는 삼면이 강이요 나머지 한면은 험악한 절벽이어서 말 그대로 철창없는 감옥이었다. 더불어 세조는 군사를 주둔시키고 감시를 철저히 하도록하였다. 어느 달밝은 밤 단종이 꿈을 꾸었다.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차례로 현몽하여 수양의 비리와 복위운동의 실패를 추연히 호소하며 일면 위로 하며 슬피 울더니 '육륙봉에 구름이 감돌고 청령포에 물소리가 높거던 소신들이 뵈오러 온 줄 아십시오'라고 하였다. 단종 또한 의지하던 선왕의 유신들을 꿈속에 만나니 한편 반갑고 한편 자기를 위하여 충의에 죽어간 일을 생각하니 억울하고 서러움이 복받쳐 군신간에 서로 붙잡고 소리내어 울다가 놀래 깨니 꿈이었다."1
꿈을 깨고서도 서러움에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있었는데 웬 사람이 강을 건너 헤엄쳐 오는 것이었다. 누구냐고 묻자 "이 고을 호장 엄흥도이옵니다"라 하면서 울음소리가 들려 걱정이 되어 건너왔다 하였다. 단종은 탄식하면서 다음처럼 말했다.
"내 이곳에 유배온지 오래로되 누구하나 찾아 주는 이 없더니 그대가 야심함을 무릅쓰고 강을 헤엄쳐 건너와 나를 위로해주니 참으로 고맙구나. 내 조금전 꿈에 성삼문 등 사육신을 보았는데 그대를 보니 사육신을 생시에 만난 것처럼 반갑도다."2
엄흥도는 그 뒤 밤만 되면 군사의 눈을 피해 강을 건너 문안을 올리곤 했다. 이러던 어느 날 홍수가 밀어닥치자 금표의 거리를 넓게 해석하여 읍내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겼다. 낮에는 근처 매죽루(梅竹樓*자규루)(도5, 도6) 에 오르고 밤이면 피리를 불어 그 소리 멀리까지 퍼져 나갔는데 어느 날엔가 소쩍새라 부르는 두견새 또는 자규의 울음소리 들리자 <자규사(子規詞)>를 친히 읊으셨다.
달 밝은 밤 자규새 울면
시름 못 잊어 다락에 기대었네
네 울음 슬프 내 듣기 괴롭구나
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 없을 것을
이 세상 괴로운 이에게 말을 보내 전하노니
춘삼월 자규루에는 삼가 부디 오르지 마소3
단종은 이렇게 단 한 수만 읊은 건 아니다. 또 다른 <자규사>가 전해 온다.
한 마리 원한맺힌 새 궁중을 나선 뒤
외로운 몸 짝없는 그림자 푸른 산 속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못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없어라
두견새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엔 달빛만 희고
피뿌린 듯 봄 골짜기 지는 꽃만 붉어라
하늘은 귀머거리지 애달픈 하소연 왜 듣지 못하나
어쩌다 수심 많은 이 사람 귀만 홀로 밝은가4
이 때 영월 사람 가운데 누구 하나 공경하지 않는 이 없었고 또한 가뭄이 들때면 향을 피우고 하늘에 빌어 단비를 내리게 하기도 하여 놀라움과 기쁨을 함께 누리곤 하였다.
도5 영월 관풍헌
도6 영월 자규루, 관풍헌 동쪽
죽음 그리고 생육신의 노래
1457년 6월 27일 경상도 순흥 땅에 유배를 와 있던 금성대군이 단종복위운동을 펼치고 있다는 밀고가 경상도 안동 관아에 접수되었다. 이 날은 단종이 영월 땅을 향해 가고 있던 도중이었다. 금성대군은 옮겨 온 유배지 경상도 순흥 땅에서 순흥부사 이보흠을 포섭했다. 순흥의 군사력을 근간으로 영남을 장악하여 마침 가까이 오고 계시는 단종을 모셔 오고 세력이 증강되면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밀고를 받은 세조는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리고 순흥의 향리는 물론 숱한 군민들마저 사형에 처해버렸다.
"순흥에 사는 사람들이 말에 연루되어 도륙을 당하니 죽계(竹溪)의 물이 모두 붉어졌다."5
9월 2일 세조에게 뜻밖의 일이 생겼다. 스무살 건장한 세자가 급작스레 죽어버린 것이다. 세조는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를 서인으로 추폐(追廢)하고 옥체를 현릉에서 파내 저 서해안 바닷가에 버렸던 것인데 저 이를 하늘에서 지켜 보던 현덕왕후가 복수의 하나로 세조의 아들인 세자의 목숨을 거두어 갔다는 것이다.
세조는 저 금성대군의 복위운동을 핑계삼아 영월에 있는 단종을 죽이고자 하였다. 이 때 정인지가 백관을 거느리고 단종을 제거하자고 하였고 드디어 10월 24일 사약이 내려왔다.
사육신의 그 뜨거운 분노와는 또 다른 분노의 여섯 인물이 있었다.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원호(元昊 ?-?), 이맹전(李孟專 1392-1480), 조려(趙旅 1420-1489), 성담수(成聃壽 ?-?), 남효온(南孝溫 1454-1492) 그 여섯 이름은 사육신과 더불어 빛나는 생육신이다. 이들은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은 채 은일지사의 생애를 살아갔다. 심지어 원호, 성담수 같은 이들은 생몰년마저 알 수 없을만큼 그렇게 세상을 등지고 살아갔다.
나는 그 분 들 가운데 김시습과 남효온 두 분을 사랑한다. 그 분들의 시가 아름답기 그지 없어서다. 그래서 나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번역해 1980년에 간행한 《매월당집》6 다섯권과 김성언이 번역해 1997년에 간행한 《남효온의 삶과 시》7 그리고 민족문화추진회가 2007년에 간행한 《국역 추강집》8 두 권을 늘 머릿맡에 두고 산다. 그러다 보면 가끔 멀리 영월 장릉이며 청령포 풍경이 아스라이 떠오르곤 한다.
<숨어사는 이를 찾아-향산>9
김시습
한 번 숨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에
그 맑고 꽃다운 곳 천년 두고 읍하네
나 역시 얽매이지 아니한 사람
자취를 푸른 산 구름에 의탁했네 (김시습, <숨어 사는 이를 찾아-향산>, <매월당 시집> 제3편.)
<친구의 집 벽에 적다>10
남효온
경술년 이봄도 반 넘어 지나니
백목련 꽃 처음 피기 시작하오
세상의 풍진에 옷이 다 물들고
머리 위에는 반백만 엉성하구려 (남효온, <친구의 집 벽에 적다>, 《추강집》)
도7 장릉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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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의윤, <엄흥도의 충정>, 《향토의 전설》, 강원도, 1979. 282-283쪽.
2. 정의윤, <엄흥도의 충정>, 《향토의 전설》, 강원도, 1979. 283쪽.
3. <단종대왕 행록(行錄)>, 《선원보감》1, 계명사, 1989. 214쪽.
4. 이성무, 《조선왕조사》, 수막새, 2011. 202쪽.
5. 이긍익, <단종조 고사본말>, 《국역 연려실기술》1권, 민족문화추진회, 1966. 407쪽.
6. 김시습, 《매월당집》1-5,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80.
7. 남효온 지음, 김성언 옮김, 《남효온의 삶과 시》, 태학사, 1997.
8. 남효온 지음, 박대현 옮김, 《국역 추강집》1-2, 민족문화추진회, 2007.
9. 김시습, <숨어 사는 이를 찾아-향산>, <매월당 시집> 제3편, 《매월당집》1권,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80. 247쪽.
10. 남효온 지음, 박대현 옮김, <친구의 집 벽에 적다>, 《국역 추강집》1, 민족문화추진회, 2007. 2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