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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릉 3. 단종과 사육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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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莊陵) 단종(端宗 1441-1457 *재위1452-1455)

최열(미술평론가)

단종의 업적 그 위대함이여 

  단종은 왕위에 즉위하자 《고려사》 간행을 명하여 김종서가 다음해 《고려사절요》를 완성했다. 또한 《세종어제 악보(樂譜)》를 간행하였으며 또한 무기 제조를 위한 도회소(都會所)를 정하고 각각의 제조량을 정하거나 시전(市廛) 규모와 장인 등급을 등록함으로써 세금을 엄격히 통제하였다. 그리고 계유정난 뒤 비록 수양대군이 집정하던 때의 업적이긴 해도 단종 재위 중 양성지로 하여금 <조선지도>, <팔도각도>와 같은 지리지와 <황극치평도>를 편찬토록 하였으며 1455년 2월에는 《홍무정운 역훈(譯訓)》을 완성하였고 또한 환관(宦官)이 책방(冊房), 궁방(宮房)과 같은 곳의 직사(直司)를 맡지 못하게 하거나 여러 관청을 혁파해 나갔다. 
  이러한 업적은 단종이 직접 나서서 시행한 정책의 성과라고 보기 어렵지만 단종시대의 성취라는 점에서 그 시대의 업적임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재위 중의 업적은 단종이란 한 인물의 역사에서 매우 소략한 것에 불과하다. 단종의 위대한 업적은 그의 의지나 성품 그리고 쌓아나간 공훈과 무관하게 그가 살았던 짧은 시간 그리고 그가 별세한 뒤 길고 긴 시간을 모두 합쳐야 비로소 드러난다. 그가 남기고 간 '단종' 또는 '노산'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쌓여 온 그 강렬한 기억과 전설이 된 이야기들만으로도 부족하여 저 사육신과 생육신은 물론 그로부터 비롯한 끝없는 이야기들은 조선 오백년을 통털어 최고의 '역사 사실'이다. 
  저 강원도 영월 장릉을 포함하여 단종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진 그 많은 역사 서술이며 문학, 예술 작품은 모두 그의 위대한 업적이다. 



사육신 이야기 


장릉 석마 서쪽 좌측면 『조선왕릉2』국립문화재연구소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 있을 때인 1456년 6월 2일 집현전 학사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이 명나라 사신을 위해 상왕 단종과 금상 세조가 나란히 참석해 베푸는 잔치를 틈타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김질, 정창손이 세조에게 밀고함으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세조는 곧 가담자들을 잡아다가 가혹하게 국문하였는데 모두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는 작형(灼刑)으로 죽고, 하위자도 살육되었으며, 유성원은 집에서 자결하였으니 이들을 사육신이라 부른다."1

  세조는 단지 이들을 죽이는데 그치지 않았다. 권자신, 김문기를 비롯해 무려 70여명을 연루시켜 다스리고 1457년 6월에는 상왕 단종도 관련되었다면서 상왕을 폐위하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시키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시켜 버렸다. 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를 추폐(追廢)하여 서인으로 강등시키고, 금성대군도 관련되었다며 경기도 연천의 삭녕 땅에 유배를 보내버렸다. 
  세조는 여섯 대신을 손수 처형하였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분인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은 <사육신전>을 지었는데 사육신(死六臣) 중 한 분인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의 죽음을 다음처럼 묘사하였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상왕이 계시거늘 나리가 어찌 저를 신하라고 하겠습니까. 또 나리의 녹을 먹지 않았으니 만약 믿지 못하겠거든 저의 가산을 몰수하여 헤아려 보십시오'하였다. 세조가 매우 노하여 무사로 하여금 쇠를 달구어 그의 다리를 뚫고 팔을 자르도록 했으나 안색의 변화 없이 천천히 말하기를 '나리의 형벌이 혹독하기도 합니다'하였다."2

  여기서 말하는 '쇠를 달구어 그의 다리를 뚫고 팔을 자르도록'하는 형벌을 바로 '작형'이라 하는데 참혹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남효온은 덧붙여 "성삼문은 사람됨이 해학적이고 자유분방하며 농담하기를 좋아했다. 일상생활에 절도가 없어 겉으로는 지키는 바가 없는 하였지만 안으로는 지조가 확고하여 빼앗을 수 없는 뜻을 갖고 있었다"3고 하였으며 이개(李塏 1417-1456)에 대해서는 "야위고 약했으나 엄한 형벌 아래서도 낯빛이 변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장하게 여겼다"4고 하였고 하위지(河緯地 1387-1456)에 대해서는 세조가 작형을 시행치 않았다 하였으며 유성원(柳誠源 ?-1456)에 대해서는 스스로 자결하였지만 세조는 그의 "시체를 가져가서 책형(磔刑)을 가하였다"고 하였다. 책형이란 시체를 찢어 다시 죽이는 형벌이다. 
  마지막으로 무사 유응부(兪應孚 ?-1456)의 죽음은 한편의 서사시와도 같은데 남효온은 다음처럼 묘사했다. 

  "세조가 노하여 꾸짖기를 '그대는 상왕을 명분으로 삼고서 사직을 도모코자 한 것이다'하고 무사로 하여금 살갗을 벗기도록 하며 그 정상을 물었으나 죄상을 인정하지 않고 성삼문 등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이르기를 서생과는 함께 모의할 것이 못된다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지난 번 사신을 청하여 연회하던 날에 내가 칼을 시험하려 했으나 그대들이 굳이 저지하며 말하기를 만전의 계책이 아니다하여 오늘의 화를 불러들였다. 그대들은 사람이면서 계책이 없으니 어찌 축생과 다르겠는가 하고 임금에게 말하기를 '만약 정상 밖의 일을 듣고자 한다면 저 더벅머리 유자들에게 물어보시오' 하고는 입을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임금이 더욱 노하여 불에 달군 쇠를 배 아래에 놓아두기를 명하니 기름과 불이 함께 지글거렸으나 낯빛이 변하지 않았다. 천천히 쇠가 식기를 기다렸다가 쇠를 집어 땅에 던지며 말하기를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하고 끝내 죄상을 인정하지 않고 죽었다."5   

  남효온은 이렇게 사육신 이야기를 지은 다음 그 격정을 이기지 못하여 다음처럼 썼다. 

  "누군들 신하가 되지 않겠는가마는 육신의 신하 됨은 지극하기도 하다. 누군들 죽음이 있지 않겠는가마는 육신의 죽음은 참으로 장대하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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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종대왕 행록(行錄)>, 선원보감1, 계명사, 1989. 214쪽.
2.
 남효온 지음, 박대현 옮김, 국역 추강집, 민족문화추진회, 2007. 263-264쪽.   
3.
 남효온 지음, 박대현 옮김, 국역 추강집, 민족문화추진회, 2007. 265쪽. 
4.
 남효온 지음, 박대현 옮김, 국역 추강집, 민족문화추진회, 2007. 266쪽. 
5. 
남효온 지음, 박대현 옮김, 국역 추강집, 민족문화추진회, 2007. 269쪽.  
6. 
남효온 지음, 박대현 옮김, 국역 추강집, 민족문화추진회, 2007. 271쪽.  
글 최열(미술평론가)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5 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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