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열(미술평론가)
명당, 그 많은 이야기들
세조는 그 누구보다 풍수를 중시하던 인물이었으니까 결코 단종에게 능묘 터를 주어 그 어떤 풍수의 기운도 제공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므로 아예 그 싹을 자르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냥 그 옥체를 강물에 떠나 보내버리는 방법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단종의 능묘인 장릉은 서슬퍼런 공포 속에 은밀하게 그것도 이름난 풍수가가 아니라 영월의 토박이 관료일 뿐인 엄흥도 호장이 마련한 자리다. 그런 능묘자리가 무슨 풍수꺼리나 될 것인가.
세조는 그 누구보다 풍수를 중시하던 인물이었으니까 결코 단종에게 능묘 터를 주어 그 어떤 풍수의 기운도 제공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므로 아예 그 싹을 자르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냥 그 옥체를 강물에 떠나 보내버리는 방법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단종의 능묘인 장릉은 서슬퍼런 공포 속에 은밀하게 그것도 이름난 풍수가가 아니라 영월의 토박이 관료일 뿐인 엄흥도 호장이 마련한 자리다. 그런 능묘자리가 무슨 풍수꺼리나 될 것인가.
현장풍수 장영훈은 《왕릉풍수와 조선의 역사》에서 장릉은 '명당의 충족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이런 명당 터를 잡은 엄흥도 후손이 선조 때 세금을 면제받았고 현종 때 출사의 특혜를 얻었으며 숙종 때는 엄홍도 자신이 공조참의, 정조 때 공조판서 벼슬을 얻었다. 게다가 사육신과 더불어 영월 창절서원(彰節書院)에 배향되었고 또한 장릉에 엄홍도 정려각(旌閭閣)까지 세워졌는데 (도1) 이런 결과를 보면 명당은 명당인 모양이다. 물론, 이 터는 영월 엄씨네 집안 산인데다 심지어 노루가 잡아 준 터이니까 어찌 명당이 아닐 수 있겠는가. 아니면 엄흥도 스스로 터득한 풍수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도1. 장릉 엄흥도 정려각
장릉은 처음부터 장릉이 아니었다. 처음엔 영월 사람들만이 아는 비밀 능묘였고 그로부터 59년이 지난 1516년에서야 처음으로 나라에서 공식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으며 1580년에 묘역을 다듬고 주위에 상석과 표석, 장명등, 망주석이며 석인, 석수를 세워 그나마 사대부 수준의 묘소 정도가 되었다. 아니 오히려 평민 신분의 인물에게 과분한 것이었다. 그 때까지도 왕위를 회복하지 못했기 떄문인데 숙종은 그 다음해인 1681년 노산대군으로 추봉하여 왕자의 지위를, 1698년 단종으로 추복(追復)하여 왕위의 지위를 완전히 복권시켰다. 그리고 이 때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하여 비로소 역대 군주와 나란히 섰으며 영월의 능묘는 처음으로 장릉이라는 능호(陵號)를 가질 수 있었다.
장릉은 왕릉으로써 지위를 회복했지만 다른 여러 왕릉과 뚜렷하게 다른 모습이다. 무엇보다 무석인이 없고 또한 돌짐승도 말, 양, 호랑이 세 쌍에 불과하다. 이건 뒷날 추봉했던 능묘인 서울 성북동 신덕왕후의 정릉(貞陵)과 추존왕인 서오릉의 덕종(德宗)과 소혜왕후(昭惠王后)의 경릉(敬陵)이 이미 그렇게 했으므로 그 예를 따라 간단하게 시설하라는 왕명에 따른 것이다. 숙종이나 영조가 그 간략함에 대하여 겸손하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라고 했던 것이지만 왜 단종이 겸손해야 하는지, 간략해야 하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다.
사대부 수준의 간단한 능묘 구성이지만 능역 전체를 보면 또 다른 능묘에는 없는 배견정(拜鵑亭), 배식단사(配食壇祠), 엄홍도 정려각, 낙촌공(駱村公) 기적비(記蹟碑)며 영천(靈泉)까지 그 무엇인가가 즐비하다.(도2,3,4) 특히 재실은 동구릉의 재실보다도 훨씬 규모를 잘 갖추고 있다. 배견정은 청령포 건너편 낙화암에서 순절한 시녀의 넋이 두견새가 되어 단종 능묘를 찾아와 배알하였던 사실을 기리는 정자다. 1792년 영월부사 박기정이 창건하였고 그가 직접 쓴 '배견암'이란 글씨를 바위에 새겨두었다. 배식단사는 장판옥(藏版屋)이라고 부르는데 단종의 복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종친, 충신, 궁녀 268명의 위패를 모신 건물이다. 1791년 정조가 영월부사 박기정으로 하여금 건립하게 하였다. 배식단은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이들을 제향하는 단이고 정려각은 엄흥도를, 기적비각은 중종 때 감춰진 단종 능묘를 찾아낸 영월군수 박충원(朴忠元 1507-1581)을 기리기 위한 시설이다. 영천은 물론 이미 있던 우물을 가리키는데 1791년 정조가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1417-1456)의 후손 박기정(朴基正)에게 명하여 그 우물에 비석을 세우게 한 사연이 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입구에서 홍살문을 지나면 동쪽으로 거대한 용의 등처럼 가파르게 치솟아 오르는 언덕의 풍경과 그 능선 드높은 곳에 자리한 봉분의 아름다운 위용이다. 그리고 하나 더 덧붙이자면 그 누군가가 그린 화첩 《월중도(越中圖)》(도5) 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이 특별하다. 다른 어떤 능묘라고 해도 8폭에 이르는 아름다운 그림을 남기고 있는 경우는 없다. 오직 장릉 뿐이다. 윤진영은 <단종의 애사와 충절의 표상: 월중도>1라는 글에서 1820-30년 무렵에 제작한 작품이라고 추정하였고 이예성은 <월중도>2란 글에서 1840년 이후에 제작한 작품이라고 추정하였다.
도2. 장릉 장판옥(배식단사) 『조선왕릉2』국립문화재연구소
도3. 장릉 영천비
도4. 장릉 배식단 『조선왕릉2』국립문화재연구소
하지만 그 무엇보다 입구에서 홍살문을 지나면 동쪽으로 거대한 용의 등처럼 가파르게 치솟아 오르는 언덕의 풍경과 그 능선 드높은 곳에 자리한 봉분의 아름다운 위용이다. 그리고 하나 더 덧붙이자면 그 누군가가 그린 화첩 《월중도(越中圖)》(도5) 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이 특별하다. 다른 어떤 능묘라고 해도 8폭에 이르는 아름다운 그림을 남기고 있는 경우는 없다. 오직 장릉 뿐이다. 윤진영은 <단종의 애사와 충절의 표상: 월중도>1라는 글에서 1820-30년 무렵에 제작한 작품이라고 추정하였고 이예성은 <월중도>2란 글에서 1840년 이후에 제작한 작품이라고 추정하였다.
도5. 월중도
이 모든 일들이 단종 사후에 펼쳐진 일들이다. 사후 능묘를 둘러싸고 이토록 많은 일들이 벌어진 왕도 없었고 또한 왕과 관련하여 그토록 숱한 이야기들이 남아 인구에 떠도는 왕도 없었다. 명당 터에 자리를 잡았다고 해도 그 기운을 물려 받을 후손이 없는 단종이었으므로 명당이 명당답지 않다 여길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그가 그 눈부시게 독특한 생김의 명당에 터를 잡음으로써 영월 엄씨는 물론, 영월 땅 전체가 그 기운으로 뒤덮여 슬프고도 아름다운 영월이 될 수 있었던 것이고 또한 사육신과 생육신을 비롯한 관련인물 모두가 후세까지 기억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명당 그러니까 단종의 명당 장릉은 제 후손들만을 위한 아주 편협한 그런 땅이라고 생각하는 탐욕을 버리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단종
도6. 장릉 문석인 서쪽 『조선왕릉2』국립문화재연구소
세종대왕 23년인 1441년 7월 23일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왕세손이 탄생했다. 왕세손의 이름은 이홍위(李弘暐)로 뒷날 왕위에 오른 단종(端宗 1441-1457 *재위1452-1455)이다. 다음 날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가 세상을 떠났으니 어린 핏덩이의 비극은 이 때 시작된 것이었다. 여덟살 때인 1448년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1450년 아버지 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문종도 그로부터 두 해 뒤인 1452년 5월 14일 붕어함에 따라 왕세자 이홍위는 5월 18일 왕위에 올랐다. 겨우 12살의 어린 나이였다. 문제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해 주며 어린 왕을 보살필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마저 세상을 떠나 없다는 데서 왔다.
이런 어려움에 대비하여 문종은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1453)과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1390-1453), 좌의정 남지(南智 ?-1453)를 비롯한 문신들에게 단종을 보좌하라는 유명(遺命)을 내려두었다. 하지만 문종의 아우이자 단종의 삼촌 수양대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모두 7대군이 버티고서 날로 위세를 키워나갔고 이에 왕을 보필하는 신하들 특히 지략이 뛰어나 큰호랑이[大虎]라 불리우던 김종서는 7대군 가운데 가장 위험한 수양대군을 견제하였다. 갈등, 그 한치의 양보도 없는 권력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누가 지은 글인지 알 수 없는 <단종대왕 행록(行錄)>에는 저 수양대군이 다음처럼 했다고 묘사했다.
"이 가운데 야망과 수완이 뛰어난 수양대군은 모신(謀臣) 권람(權擥 1416-1465)의 천거로 한명회(韓明澮 1415-1487)를 얻고, 한명회의 꾀로써 유능한 무사들을 며칠 안에 모두 사귀어 앞날에 대비하였다." 3
수양대군은 그 해 10월 무사들을 이끌고 김종서 집으로 쳐들어가 직접 살해한 뒤 '김종서가 모반하므로 주살하였으나 갑작스런 일이라 미리 아뢸 틈이 없었습니다'라고 거짓하고서 왕명을 빌어 여러 신하들을 입궐하라 하였다.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 찬성 이양 등을 궐문에서 살해하고 좌의정 정분을 유배한 뒤 죽였으며, 안평대군을 황보인, 김종서 등과 결탁하여 불궤를 꾀하였다고 하여 역시 강화에 유배한 뒤 사사하였다."4
왕실과 신하 양쪽 모두의 적을 제거한 뒤 스스로는 영의정, 병조판서, 이조판서, 내외병마 도통사를 겸직하는 화려한 직책을 차지하였다. 이 사건을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고 한다. 이에 격분한 함경도 절제사 이징옥(李澄玉 ?-1453)이 스스로 대금황제를 칭하고 여진족에게 후원을 청하여 수양대군을 공략하고자 하는 일이 발생했다.
모든 권력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엉뚱하게도 부친 상중인 어린 왕에게 궁중이 공허하다며 왕비를 맞이하도록 했다. 결국 단종은 1454년 1월 22일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고 또 뒤이어 한명회, 권람, 정인지로부터 선위(禪位)를 강요받아 1455년 윤6월 친히 대보(大寶)를 전수하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났다.
"상왕이 수강궁(壽康宮 *昌慶宮)으로 나올 때에는 어둔 밤에 불도 없었고, 종루에 내려 올 때에는 좌우 행랑에서 모두 통곡하여 그치라고 해도 듣지 않았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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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진영, <단종의 애사와 충절의 표상: 월중도>, <<월중도>>,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 이예성, <월중도>, 《조선 왕실의 행사그림과 옛지도》, 민속원, 2005.
3. <단종대왕 행록(行錄)>,《선원보감》1, 계명사, 1989. 213쪽.
4. <단종대왕 행록(行錄)>,《선원보감》1, 계명사, 1989. 213쪽.
5. 이긍익, <단종조 고사본말>,《국역 연려실기술》1권, 민족문화추진회, 1966. 3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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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진영, <단종의 애사와 충절의 표상: 월중도>, <<월중도>>,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 이예성, <월중도>, 《조선 왕실의 행사그림과 옛지도》, 민속원, 2005.
3. <단종대왕 행록(行錄)>,《선원보감》1, 계명사, 1989. 213쪽.
4. <단종대왕 행록(行錄)>,《선원보감》1, 계명사, 1989. 213쪽.
5. 이긍익, <단종조 고사본말>,《국역 연려실기술》1권, 민족문화추진회, 1966. 3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