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열(미술평론가)
단종, 태백산 신선이 되다
단종 이홍위(李弘暐)가 이곳 영월 땅으로 유배를 왔다. 1457년 7월 초순의 일이었다. 그리고 4개월 뒤인 10월 24일 세조가 보낸 사형 집행관에 의해 살해 당했다.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단종조 고사본말>을 보면 일찍이 단종을 죽여 후환을 막자고 하여 영월로 유배보내기에 앞장선 당시 영의정 정인지(鄭麟趾 1396-1478)가 또 백관을 거느리고 단종을 제거하자고 주장함으로써 끝내 단종을 살해했다고 기록해 두었다. 그런 까닭에 단종을 살해한 죄를 논한다면 "정인지가 으뜸이고 신숙주가 다음이다"라고 적고서 정인지야말로 "참으로 간흉의 우두머리"라고 하였던 것이다.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굴렀다. 도사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도사가 대답을 못하였다. 통인 하나가 항상 단종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뒤의 창구멍으로 그 끈을 잡아 당겼다. 그 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통인이 미처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하였다."1
정작 금부도사는 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 곁에서 수발들던 통인이 나서서 목을 졸랐다고 하니 그 통인은 자신이 그렇게 하면 세조에게 이뻐보여 출세라도 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인간의 탐욕이 이러하다. 하지만 통인을 뺀 나머지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시녀와 종인들이 다투어 고을 동강에 몸을 던져 죽어서 뜬 시체가 강에 가득하였고 이날에 뇌우가 대작하여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고 강렬한 바람이 나무를 뽑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꽉 끼어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2
제 목숨 버린채 주군의 뒤를 따랐다는 게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落花巖)이 의연하고(도1) 또 투신했던 99명의 충혼을 봉안한 민충사(愍忠祠)가 여전하므로 믿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의심스러운 건 요즘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가 아닐까. 그러니까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요즘 사람들은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단종은 유배 중 항상 객사에 좌정하였고 이에 고을 백성들이 누각 아래까지 와서 뵙곤 했다고 한다.
도1. <월중도> 낙화암 민충사 금강정 28.9x33cm
"해를 당하던 날 저녁에 또 일이 있어 관아에 들어가다가 길에서 단종임금께서 백마를 타고 동쪽 계곡으로 달려 올라가는 것을 만났는지라 길가에 엎드려 뵈오며 '어디를 가시는 길입니까'하고 물었더니 임금께서 돌아다보며 말하시기를 '태백산으로 놀러간다'하였다. 백성이 절하며 보내고 관아에 들어가니 벌써 해를 당하였었다."3
단종은 죽어 태백산 신선이 된 것이다. 단종을 왕위에 복귀시키려 했던 금성대군이 이미 소백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어 있었으니까 아마도 삼촌과 조카 두 신선이 오가며 하늘의 세월을 누리고 있을 거다.
엄흥도와 영월의 비밀
너무 멀어 한 번 가기에도 힘겨웠던 시절이 있었다. 영월 땅. 영월 엄씨의 시조 엄임의(嚴林義)가 당나라에서 왔다가 되돌아가지 않고 이곳 영월 땅에서 살 작정을 하고 그 땅을 살펴 보니 모양이 배의 형극이라서 영월읍 하송리에 은행나무를 심었다. 나무가 자라서 배의 돛대 구실을 하도록 한 것이다. 지금까지 은행나무가 살아 영월이라는 배가 뒤집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고 있거니 이제 그 나이 무려 1,200년이라 지금껏 자라난 높이가 29m나 되어 장엄하다.
은행나무 구경할 때마다 나이 많은 그 모습에만 감탄하곤 했지만 어느 날엔가 은행나무를 심은 이가 영월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의 시조라는 사실을 듣고서야 그 돛대의 뜻을 새길 수 있었다. 단종이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당해 이곳 영월로 유배를 오자 고을 수령인 엄흥도 호장은 매일 밤 단종이 머무시는 어소를 향해 요배(遙拜)를 하며 지냈다. 청령포에 머물 때 이야기다.
어느 날 어소에서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마음으로 급히 헤엄을 쳐 강을 건너 예를 올리니 단종이 웬일이냐고 물었다. 엄흥도는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고 이에 단종은 "내 조금 전 꿈에 성삼문 등 사육신을 보았는데 그대를 보니 사육신을 생시에 만난 것처럼 반갑도다"라고 하면서 기뻐하였더니 엄흥도는 그로부터 밤만 되면 남몰래 강물을 건너 문안 드리곤 했다는 것이다.4
끝내 세조가 단종을 죽여버렸는데 세조는 그 무덤을 만들어 두면 또 이곳을 거점삼아 저항세력이 창궐할 거라고 생각해서 아예 그 시신을 강물에 버려 흔적조차 지우라 하였다. 그렇게 하였더니 단종의 옥체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데 옥같은 가는 열 손가락이 물위에 떠 있었다. 이에 아전(衙前)이 집에 노모를 위해 미리 만들어 둔 관이 있어 가만히 옥체를 거두어 염하여 장사를 지냈다. 하지만 단종의 어머니로 일찍이 세상을 떠난 현덕왕후 권씨의 아우가 단종복위운동에 참가했으므로 세조는 현덕왕후의 옥체를 현릉에서 파내어 경기도 시흥 바닷가 10리 바깥으로 내쳐버렸다. 남편 문종과 강제로 헤어진 현덕왕후의 무덤을 소릉(昭陵)이라 하는데 이런 소릉의 사건도 겹치고 해서 세조는 단종의 무덤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또 파서 물에 던지라고 명령하였는데 저 아전이 차마 파지 못하고 거짓 파는 것같이 하고 도로 묻었다.
이런 기록도 있고 또 다른 기록도 있지만 지금은 저 엄흥도의 이야기가 정설로 되어 있다. 세조의 어명에도 불구하고 엄흥도는 다음처럼 했다는 것이다.
"엄흥도가 옥거리[獄街]에 왕래하며 통곡하면서 관을 갖추어 이튿날에 아전과 백성을 거느리고 마을 북쪽 5리되는 동을지산(冬乙旨山)에 무덤을 만들어 장사를 지냈다 한다. 이 때 족당들이 화가 있을까 두려워서 다투어 말리는데 엄흥도가 말하기를 '옳은 일을 하고 해를 당하는 것은 내가 달게 생각하는 바다'하였다."5
이 기록은 간략하게 압축한 것이고 실제로는 훨씬 번거로운 과정이 있었다. 앞서 말한 대로 단종의 옥체가 강물을 떠다니고 있을 때 엄흥도는 읍내 감옥 거리를 오가면서 통곡을 하더니 친척을 모아 장례를 치룰 뜻을 밝혔다. 하지만 모두 반대하므로 '옳은 일을 하고 해를 당하는 것은 내가 달게 생각하는 바다'라고 말하고는 몰래 강 하류 동강과 서강이 합수하는 지점인 금봉연(金鳳淵)에 가서 대기하였다. 비로소 옥체가 보이므로 건져내 평소 마련해 두었던 관을 꺼내 염습을 하고 모셨다.
적절한 때를 기다려 아들과 함께 관을 등에 메고 몰래 자기 집안 산인 동을지산에 도착했다. 때는 음력 시월 하순인데 눈이 내려 땅이 모두 얼어버려 묻을 곳을 찾지 못했다. 헤매는 중 산등성이에 웬 노루 한 마리가 앉아 있다가 인기척에 뛰어 달아나니 그 자리가 녹아 있어 쓸만 하므로 이곳을 파서 묻었다. 봉분이 있으면 안되므로 평지처럼 평토장(平土葬)을 해서 아무도 모르게 하고 또 자신도 가솔을 이끌고 종적을 감추었다.6 어쩌면 신선을 찾아 태백산 골짜기로 숨어들었을지 모르겠다.
이 사건을 엄흥도의 밀장(密葬)이라고 하는데 뒷날 중종 때인 1516년 12월 국가가 나서서 묘소를 찾고 제사를 지내기 전까지는 그 자리에 늘어 놓은 돌마저 없었지만 영월 사람들 모두가 저 동을지산을 가리켜 임금의 산소라고 하고, 또 어린 아이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고 한다.7 그 시절 무덤 가에는 돌을 옆에 늘어 놓는 풍습이 있었던 것인데 단종의 능묘에만은 돌을 늘어 두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외지 사람들로하여금 모르게 감추려는 뜻이었을 게다.(도2)
이 사건을 엄흥도의 밀장(密葬)이라고 하는데 뒷날 중종 때인 1516년 12월 국가가 나서서 묘소를 찾고 제사를 지내기 전까지는 그 자리에 늘어 놓은 돌마저 없었지만 영월 사람들 모두가 저 동을지산을 가리켜 임금의 산소라고 하고, 또 어린 아이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고 한다.7 그 시절 무덤 가에는 돌을 옆에 늘어 놓는 풍습이 있었던 것인데 단종의 능묘에만은 돌을 늘어 두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외지 사람들로하여금 모르게 감추려는 뜻이었을 게다.(도2)
도2. 장릉 전경
영월호장 엄흥도는 저 영월엄씨의 후손으로 하송리 은행나무를 보고 자랐을 터인데 그게 왜 돛대인지 궁금했을 것이다. 훌쩍 자라 자신이 단종의 옥체를 수습하고 보니 비로소 깨우쳤다. 세상 인심의 균형을 잡아 배가 뒤집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말이다.
"다만 읍사람들이 지금까지 애통하게 여겨 제물을 베풀어서 제사지내고 길흉화복에 이르러서도 모두 묘소에 나가서 제사 지내었다. 부녀자라도 오히려 전하기를 '정인지 간적 놈들에게 핍박되어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자기 명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슬프다. 자고로 충신의사가 반드시 대가 세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당시 임금을 팔고 이익을 꾀하던 무리들은 반드시 자기 임금을 혹심한 화에 몰아넣고야 마음에 쾌함을 느꼈으니 이런 자들을 엄흥도에 비하여 보면 어떠한가."8
----------------
1. 이긍익, <단종조 고사본말>, 《국역 연려실기술》1권, 민족문화추진회, 1966. 408쪽.
----------------
1. 이긍익, <단종조 고사본말>, 《국역 연려실기술》1권, 민족문화추진회, 1966. 408쪽.
2. 이긍익, <단종조 고사본말>, 《국역 연려실기술》1권, 민족문화추진회, 1966. 408쪽.
3. 이긍익, <단종조 고사본말>, 《국역 연려실기술》1권, 민족문화추진회, 1966. 409쪽.
4. 정의윤, <엄흥도의 충정>, 《향토의 전설》, 강원도, 1979. 283쪽.
5. 이긍익, <단종조 고사본말>, 《국역 연려실기술》1권, 민족문화추진회, 1966. 409쪽.
6. 정의윤, <동을지산 밀장>, 《향토의 전설》, 강원도, 1979. 286쪽.
7. 이긍익, <단종조 고사본말>, 《국역 연려실기술》1권, 민족문화추진회, 1966. 413쪽.
8. 이긍익, <단종조 고사본말>, 《국역 연려실기술》1권, 민족문화추진회, 1966. 4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