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열(미술평론가)
어여쁜 현덕왕후의 원한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왕위에서 끌어 내린 뒤 유배를 보냈다가 그것도 부족해 끝내 목을 졸라 죽인 뒤 꿈을 꾸었다. 단종의 어머니이자 형수인 현덕왕후가 나타났다.
"나도 네 아들을 데려가야 겠다."
그리고 얼마 뒤 멀쩡하던 수양대군의 아들이 죽고 말았다. 또한 현덕왕후가 내 뱉은 침에 맞은 얼굴과 온몸에 불치의 피부병이 번져 죽음에 이르기까지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현덕왕후능 석상 받침 <동구릉> 《조선왕릉2》국립문화재연구소
현덕왕후는 1431년 세자궁에 들어와 있었는데 당시 세자빈인 순빈(純嬪) 봉씨(奉氏)가 동성애 사건으로 폐빈당했다. 이에 1437년 세자빈이 되었고 1441년 원손(元孫)인 단종을 낳았지만 곧바로 승하하고 말았다. <현덕왕후 시책>에 현덕왕후 권씨는 "맑은 재원(才媛)"1)이라 하였고 <현덕왕후 소릉지>에는 "자태가 한정(閑靜)"하였다면서 다음처럼 그 모습을 묘사하였다.
"부드럽고 은혜로운 덕과 순하고 어여쁜 용모로 양궁께 귀여움을 보이시어 그와 같은 책봉을 받으셨네. 이로써 세자빈의 규칙을 닦고 능히 원량의 짝이 되시어 원손을 이어 탄생하시니 그 울음소리 우렁찼도다. 경사로움이 종묘사직에 널리 퍼지고 기쁨이 조야에 넘치는데 하늘은 무슨 연고로 연한을 내려주지 아니하여 문득 세상을 사별하여 복락을 누리실 길 없게 하는가." 2)
산후병으로 승하한 세자빈은 예비 묘소로 경기도 안산군 고읍산(古邑山)에 묻혀 그 능의 이름을 소릉(昭陵)이라 하였다. 이승에서의 삶은 기껏 24년이었지만 사후 그가 겪은 세월은 그보다 훨씬 길었고 갖은 곡절과 풍상으로 점철되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안산의 소릉을 떠나 남편이 묻힌 동구릉으로 옮겨와 함께 누웠고 종묘에 남편의 신주와 더불어 봉안되었다. 아들 또한 왕위에 올라 이제 평안히 하늘로 가는가 했지만 1455년 6월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면서 사후세계의 운명도 바뀌었다.
기구한 사후 운명
세조가 된 수양대군은 1456년 5월 사육신을 주살하고 단종을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보냈다. 이 때 현덕왕후의 어머니 아지(阿只), 아우 권자신(權自愼 ?-1456)이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당했다. 수레에 묶여 온몸이 찢겨 나가는 거열형(車裂刑)으로 세상을 떠나야 했고 아버지 권전(權專) 또한 서인으로 전락당해야 했다. 이 때 세조는 현릉에 남편과 함께 묻혀 있던 형수 현덕왕후의 왕후 자격을 빼앗아 서인으로 강등시킨 뒤 종묘의 신주(神主)를 철거하고 남편과 합장한 능을 파헤쳐 그 뼈를 경기도 시흥 군자 바닷가 10리 바깥에 묻어버렸다. 형의 뜻을 물어 볼 수도 없는 상황에서 형수를 떼어 내버린 건 작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형과 형수의 아들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끝내 죽여버린 수양대군으로서야 아무 일도 아니었을 게다.
아들은 동쪽 강원도 영월에, 남편은 경기도 구리에, 자신은 서쪽 바닷가에 천리나 떨어져 다시는 만나지 못할 세월을 삭이던 1513년 4월 21일 그러니까 무려 73년이나 지나고서야 남편 곁으로 돌아 왔다. 당시 중종은 문종이 홀로 외로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옮기자고 결정했지만 그나마도 종묘에 벼락이 떨어진 바로 뒤의 일이니 하늘의 벌이 무서워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김안국은 이 때 <현덕왕후 천릉지>에 "행여 우리 왕후께서 유원(幽寃)한 가운데 품으셨던 억울함이 50여 년이 지난 이후에나마 풀리심을 억었기를 바라거니와"3)라고 썼지만 참으로 풀렸을지는 의문스럽다. 현덕왕후가 복권되었음에도 자신의 아들 단종의 부묘(祔廟)와 친정 가문의 복권은 이뤄지지 않았고 1699년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권되기 훨씬 전, 1478년 생육신 남효온은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소릉을 폐위시키는 데에 미쳐 그 이후로 20여 년에 이르도록 원혼이 의탁할 곳이 없어졌습니다. 신은 그런 즉 하늘에 계신 문종의 영혼이 종묘의 제사인 약사증상(禴祠烝嘗)을 홀로 흠향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4)
이어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기운에 불순하는 것은 바로 천심과 천기에 불순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서 다음처럼 단언하였다.
"천심과 천기에 불순하는 것이 재앙이 내리는 까닭인 것입니다. 신의 우매하고 망령된 소견으로는 소릉을 폐한 것이 인심에 미순(未順)하고 천심에도 미순한 것임을 따라서 가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5)
곡절 끝에 현릉으로 옮겨 온 뒤에도 문종과 현덕왕후 봉분 사이에 소나무가 까닭없이 말라갔고 이에 나무를 베어내고나니 막힌 데가 없이 트여 서로 잘 보임에 사람들은 모두 "정령(精靈)이 감응한 바"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가까이 와서도 사이를 가로막은 소나무마저 견디지 못했음을 보면 문종과 현덕왕후의 원한이 얼마나 사무쳤던 것인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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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덕왕후 시책>, 《선원보감 3》, 계명사, 1989. 143쪽.
2) <현덕왕후 소릉지>, 《선원보감 3》, 계명사, 1989. 147쪽.
3) 김안국, <현덕왕후 천릉지>, 《선원보감 3》, 계명사, 1989. 143쪽.
4) 남효온, <현덕왕후 복위사실>, 《선원보감 3》, 계명사, 1989. 150쪽.
5) 남효온, <현덕왕후 복위사실>, 《선원보감 3》, 계명사, 1989. 150쪽.
현덕왕후 서측 문석인, 무석인. <동구릉> 《조선왕릉2》국립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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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덕왕후 시책>, 《선원보감 3》, 계명사, 1989. 143쪽.
2) <현덕왕후 소릉지>, 《선원보감 3》, 계명사, 1989. 147쪽.
3) 김안국, <현덕왕후 천릉지>, 《선원보감 3》, 계명사, 1989. 143쪽.
4) 남효온, <현덕왕후 복위사실>, 《선원보감 3》, 계명사, 1989. 150쪽.
5) 남효온, <현덕왕후 복위사실>, 《선원보감 3》, 계명사, 1989. 1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