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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릉 1. 이승의 짧은 행복, 저승의 길고 긴 고통 1 - 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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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릉(顯陵) : 문종(文宗 1414-1452 *1450-1452)+현덕왕후(顯德王后 1418-1441) 권씨(權氏)

최열(미술평론가)


현릉 항공촬영, <동구릉> 『조선왕릉 종합학술보고서 2』, 국립문화재연구소


문종 사후, 그 서글픈 운명 

  문종 재위 중 국가의 지관(地官) 다시 말해 나라의 풍수를 본다는 국풍(國風) 최양선과 지관 목효지, 이현로 세 사람 모두 억울하게 처단 당했다. 문종이 자신의 사후 묘지를 선택하게 하였을 무렵의 일인데 이현로는 효수당하고 목효지는 노비로 전락당했으며 국풍 최양선 또한 삭탈관직에 유배까지 당했던 것이다. 현장풍수 장영훈은 《왕릉풍수와 조선의 역사》에서 그 일이 모두 국풍을 능가하는 풍수 전문가 수양대군(*세조)이 저질렀다고 했다. 문종이 자신의 왕릉 자리를 잡으라고 명했을 적에 워낙 풍수에 밝은 수양대군이 나서서 뒤쪽 산줄기가 오른팔 쪽으로 꺾어져 들어오는 우선룡(右旋龍)을 택하도록 했다. 
  바로 이 우선룡은 생명이 끊긴다는 가장 흉악한 선택인데 사람들이 이런 선택을 모를 리 없었다. 택지에 관련된 대신들 가운데 뒷날 누군가는 화려한 출세를, 또 누군가는 참혹한 처형을 당했는데 그 갈림길의 기준은 수양대군 편을 들었는지 여부였다. 마찬가지로 저 세 사람 지관의 운명도 수양대군의 행위에 대한 천기누설(天機漏泄)을 예방하는 조치였다. 
  우선룡의 위력은 대단했다. 실제로 문종 자신이 왕위에 오른지 2년 6개월만에 요절했고 아들 단종은 왕위에서 쫒겨나 끝내 죽음을 당하였으며 일찍이 요절했던 현덕왕후마저 사후에 폐비를 당하여 그 능묘의 유골이 저 멀리 경기도 시흥의 바닷가로 내쳐졌으니 우선룡의 택지가 불러 온 결과는 너무도 참혹했던 것이다. 
  물론 이 일이 문종 능묘에 대한 우선룡 택지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태조 이성계가 경복궁을 백악산 아래 정궁으로 선택하면서 예정된 일이었다. 당시 무학대사가 경복궁 풍수를 보아하니 백악산 왼쪽팔로 이어지는 낙산(駱山)의 좌청룡(左靑龍)이 너무도 허약해서 큰아들로 이어지는 '장자입국(長子立國)'이 어렵다고 경고한 바 그대로였던 것이다. 그 어렵다는 장자계승을 처음으로 성취한 문종, 두 번째로 성취한 단종 부자가 나란히 하루아침의 이슬처럼 단명하고 말았던 일이 그렇다. 


동구릉(양주목-해동지도) 


세종의 후예, 문종    

  1414년 10월 3일 소헌왕후 심씨의 큰아들이 태어났다. 이향(李珦)은 아홉 살 때인 1422년 세자에 책봉되었고 성균관에서 학문을 익히던 시절 빈객과 사부를 대함에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무려 30년 가까이 세자로 살았는데 학문을 사랑한 세자는 달 밝은 밤, 인적이 고요한 날이면 어김없이 다음처럼 하였다고 한다.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집현전의 숙직하는 방까지 걸어와서 선비들과 더불어 토론하였다."1)

  신숙주가 지은 <문종대왕 행장>에는 세자가 1445년부터 국정을 참결(參決)했는데 그 정무가 의(義)에 합당하고 또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학문에도 소홀함이 없었다고 하였다. 

  "왕이 왕위를 계승한 뒤 상국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리기를, 모두 선왕의 유지를 계승하여 더욱 경건하고 부지런히 했다. 구신들을 바꾸지 않고, 옛 법을 따라 부지런히 다스리는데 힘썼다. 옥사는 원통하고 억울하기가 쉽다 하여 안팎의 옥사를 맡은 관리들에게 경계하였다." 2)

  또 문종은 신하들에게 다음처럼 당부하였다. 

  "백성을 사랑하고 가혹한 형벌을 쓰지 말고, 농사를 힘쓰고, 군사를 훈련시키라" 3)

  또 문종은 관리를 승진시킬 때 규정에만 따른다면 어진이와 어리석은 이가 나란히 섞여 있을 것이므로 승진과 폐출할 때 골라 보고하도록 하면서 의정부에 교서를 내렸다. 

  "옛날 어진 임금들은 천하 사람들의 이목을 자신의 총명으로 삼았기 때문에, 중인의 의견에 따라 일을 추진해도 저절로 하늘의 뜻에 맞았다. 그러나 우매한 임금은 다른 사람의 간언을 싫어하면서 스스로 총명하다고 믿고, 여러 사람들엑 자문을 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화는 소홀한 곳에서 발생하지만 이 때는 이미 후회해도 소용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좋은 말을 구하는 데 힘쓰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지기(志氣)가 고매하여 국사(國士)의 풍도가 있는 사람, 절조(節操)가 뛰어나서 과감하게 직언을 하는 사람, 용맹스럽고 힘이 세어 외침을 막을 수 있는 사람, 강한 상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관직의 수행을 집안 일처럼 하는 사람, 사리에 통달하여 일 처리를 명민하게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모두 크게 등용시킬만한 인물들이다." 4)

  문종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세종을 닮았고 따라서 거의 그의 정치를 따라하여 문예를 숭상하고 무예를 중후히 여겨 이른바 '숭문중무(崇文重武)'하였던 것인데 군사 분야에서도 오위(五衛)를 설치하고 친히 《진법구편(陣法九編)》을 저술하였으며 《고려사(高麗史)》나 《동국병감(東國兵鑑)》을 편찬케 하였던 것이다. 신숙주는 그의 치적을 다음과 같이 함축하였다. 

  "왕이 비록 나라를 다스린 기간은 짧았지만 동궁으로 30여년 있으면서 도운 공은 실로 많았다. 즉위함에 이르러 서무를 재결하여 그 공적이 더욱 성대하였다. 왕이 재위한 기간은 비록 얼마 안되었으나 백성에게 끼친 공덕은 또한 더욱 깊었다." 5) 

  그러나 명이 짧아 겨우 39살에 요절하였는데 그렇게 일찍 죽을 줄 알고서 집현전에서 어린 세자를 무릎 아래 앉혀두고 손으로 그 등을 만지며 "내가 이 아이를 그대들에게 부탁한다"고 하면서 몸소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에게 내려와 술잔을 들어 권하였다. 신하들이 모두 술에 취하여 쓰러지자 문종은 그들을 보살펴 누여주었다. 이긍익은 <문종조 고사본말>에서 이 일을 기록한 <축수록(逐睡錄)>을 인용해 두었는데 다음과 같다. 

  "그날 밤에 큰 눈이 왔는데 이튿날 아침에 신하들이 술이 깨어 보니, 이상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고, 온 몸에는 돈피 갖옷이 덮혀 있었다. 임금께서 손수 덮어 준 것이었다. 서로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특별한 은혜에 보답하기를 맹세하였다. 그 후에 숙주의 거취는 저 모양이 되고 말았다." 6)

문예군주, 문종  

  문종은 문예군주였다. 스스로 시서화를 두루 잘 하였다. 이긍익은 <문종조 고사본말>에서 "조자앙의 필법을 본받아 간혹 등불 밑에서 그 글씨를 그대로 모방하여 정묘함이 지극한 데에 들어갔으므로, 조그만 쪽지를 얻은 이도 천금같이 중히 여겼다"7)고 하였고 김안로는 <용천담적기>에 임금이 해서를 잘하였는데 "정묘하여 필력이 굳세고 살아 꿈틀거리는 참기운" 8)이 넘친다고 하였다. 
  세자 시절 양화나루의 희우정(喜雨亭)에 갔을 때 문득 집현전으로 금귤 한 쟁반을 보내주었다. 학사들이 다투어 금귤을 집어들자 바닥에 한 편의 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초행서(半草行書)로 세자가 직접 쓴 글씨였다. 

"전단향(旃檀香)은 코에만 향기롭고 
기름진 고기는 입에만 맞는다 
코에도 향기롭고 입에도 다니 
동정귤(洞庭橘)을 가장 사랑하노라"9)

  아버지 세종이 양화나루의 희우정에 나가 여러 날을 묵을 때 일이다. 그 때 안평대군이 성삼문, 임원준을 데리고 양화나루 강변에 이르러 술을 마시며 달구경을 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세자가 동정귤 두 쟁반을 보냈다. 세자가 쟁반에 시를 써두었고 이를 본 세종은 모인 이들로 하여금 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안평대군은 이 일을 글로 쓰고 또 화가 안견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였으며 서거정도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렸다.10)

  또 문종은 그림도 잘 그렸다. 스스로 <설리매화(雪裡梅花)> 한 가지를 그리고 화제로 칠언율시(七言律詩) 한 수를 써서 안평대군에게 주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았다. 

"얼음 눈 수북히 쌓인 속에서 
봄바람에 흐르는 향기를 훔쳐 얻었네" 11)

  시와 글씨와 그림 모두에서 빼어난 그였으므로 당대에 그의 재주는 '절대기보(絶代奇寶)'였다는 것이다. 
  그가 시서화에 뛰어난 문예군주였지만 자신의 무덤을 자신의 감각으로 꾸미는 데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사후의 일이라 불가능한 일이었겠는데 다만 세련된 기술로 아로새긴 문석인, 무석인이 모두 개성이 있어 보인다. 문종의 석인 얼굴은 펑퍼짐한데 문석인은 입가의 수염이 돋보이고 잘 다물어 단아하고 강건하며 무석인은 무서운 표정으로 눈을 치켜뜬채 부라리고 있어 용맹해 보인다. 현덕왕후 능묘의 문석인은 얼굴을 위로 치켜 보고 있어 눈꼬리가 쳐져 있는 그 눈매가 간절해 보이면서도 볼이 부어 있는 듯 후덕함이 두드러진다. 무석인은 수염이 멋진 입을 앙당물어 볼이 부은데다 눈은 유난히 둥근 것이 튀어나올 듯 활력이 넘친다. 
  이러한 문무석인의 조형을 가리켜 해학성이 강하다는 평도 있지만 문무석인 모두 강렬한 인상을 두드러지게 표현하고자 했던 조각가의 의도가 그렇게 드러난 결과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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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안로,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이긍익, <문종조 고사본말>,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2) 신숙주, <문종대왕 행장>, 《선원보감 1》, 계명사, 1989. 205쪽.   
3) 신숙주, <문종대왕 행장>, 《선원보감 1》, 계명사, 1989. 205쪽.     
4) 신숙주, <문종대왕 행장>, 《선원보감 1》, 계명사, 1989. 206쪽.    
5) 신숙주, <문종대왕 행장>, 《선원보감 1》, 계명사, 1989. 212쪽.      
6) <축수록(逐睡錄)>(이긍익, <문종조 고사본말>,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7)  이긍익, <문종조 고사본말>,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8) 김안로,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이긍익, <문종조 고사본말>,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9)  이긍익, <문종조 고사본말>,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10) 서거정, 《사가집(四佳集)》(이긍익, <문종조 고사본말>,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11) 윤근수, 《월정만필(月汀漫筆)》(이긍익, <문종조 고사본말>,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글 최열(미술평론가)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21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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