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열(미술평론가)
처음에 영릉(英陵)은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현 서울 서초구 내곡동) 서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세종 이도(李祹)는 자신과 부인 누가 먼저건 죽으면 헌릉 곁에 묻히기로 하고 그 대모산 자락에 터를 마련해 두었다. 1446년에 먼저 부인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그 자리에 묻었으며 또 몇 해 뒤인 1450년 자신도 그곳에 함께 누웠다. 이렇게 해서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 탄생했다. 동릉이실(同陵異室)로 봉분이 하나인데 속에 석실을 둘로 하는 형식의 합장릉이었다.
물 속에서 25년
그런데 아들 문종 때 영릉의 풍수가 적절치 않다는 논의가 일어났고 또 단종 때에도 논의가 줄어들지 않았다가 세조 때에도 다시 거론되었다. 그리고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지금의 여주 땅으로 옮길 것을 결정하고 1469년 끝내 천장(遷葬)을 단행했다.
사실 천장 논의는 소헌왕후를 대모산 자락 헌릉 곁에 묻으려 할 때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장사 지내려고 미리 만들어 둔 터인 수릉을 파 보니 물길인 수맥(水脈)이 있어 대신들은 강력히 반대하였다. 하지만 세종은 부모 곁에 묻히겠다면서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부인 소헌왕후를 대모산 자락에 묻었다. 그 터는 지금의 인릉(仁陵)인데 19세기의 23대 왕인 순조대왕릉이다.
만약 지금의 인릉 터인 이곳에 소헌왕후를 묻지 않았다면 이곳에 터를 마련한 우의정 하연, 예조판서 김종서, 우참찬 정인지와 같은 대신들과 풍수 지관들은 벌을 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종의 고집은 꺾기 어려운 것으로 효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다른 복지(福地)를 마련해서 사후에 복을 얻는다고 해도 어찌 부모 곁보다 더 좋겠느냐"는 명분으로 반대론을 물리친 세종은 또 다음에 자신이 죽으면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 소헌왕후가 잠든 능에 "봉분은 같이 하고 석실은 다르게 만들도록 하라"는 명도 내려 이곳으로 확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종과 소헌왕후가 누운 영릉은 물이 흐르는 길이었다. 예종 때 천장하기 위해 봉분을 파 보고서야 그 사실을 확인했다. 소헌왕후는 25년, 세종대왕은 19년을 물 속에서 그렇게 누워 계셨던 것이다. 부부가 물 속에서 헤엄치던 그 세월 동안 왕조는 불안과 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세종의 큰 아들 문종은 2년 3월, 문종의 큰 아들 단종은 3년 2개월에 그치고 말았다. 게다가 세종의 둘째 아들 세조 다시 말해 수양대군 이유(李 瑈)가 정변을 일으켜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가 불안했던지 사약을 내려 죽여 버리는 참극을 벌였다. 세조의 둘째 아들 예종은 심지어 1년 2개월 밖에 왕노릇을 하지 못했으니 세종의 고집은 참으로 참담한 후과를 불러왔던 것이다. 부인과 자신이 죽어서도 물 속에서 25년을 견뎌야 했던 것은 자신의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후손들로 하여금 못할 짓을 겪게 하였으니 풍수를 그토록 무시하였던 벌을 받은 것이겠다.
영릉 능침. 정면에 북성산이 아름답다.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 연구소 2011.
천릉 대역사
예종은 할아버지 세종대왕의 새 능 터로 경기도 여주, 지금의 영릉 땅을 골랐다. 이 터는 풍수를 아는 이들 모두가 입을 모아 탄성을 내지르는 명당이다. 누군가는 '뒷쪽에서 생기지맥이 들어오고 앞쪽에서는 주작이 춤추듯 다가오는 주작상무(朱雀翔舞)'의 지세라면서 다음처럼 묘사했다.
"앞쪽의 북성산 지맥이 이곳으로 뻗어 나와 다시금 영릉이 정남향으로 이를 쳐다봄에 회룡고조형이라 했고, 정작 영릉 자리의 강이 아주 단정하고 품위 있게 앉아 있어서 모란반개형이라 하기도 했다. 또한 주위의 산자락들이 봉황의 날개처럼 펼치고서 영릉을 품어 준다 하여 비봉포란형이며, 북성산이 봉황형상을 이루었기게 양봉상락형이다. 또한 앞쪽 안대에 해당하는 산세들이 순하게 복종하며 이곳을 향하여 읍하기에 이를 군신조회격이라 하며, 더 들추면 봉황포란형에 기치창검형까지 튀어 나온다." 1
좋은 것은 다 모아놓은 풍수지리의 땅이다. 풍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영릉에 서서 남쪽을 바라보면 아담하되 힘차게 솟아오르는 북성산(北城山)이 아름다운 줄은 누구나 안다. 게다가 동북쪽으로 흐르는 남한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를 것이다. 영릉에서야 강줄기가 안보이지만 조금만 걸어 나가면 한강 상류 여강(驪江)이 있어 절정의 승경을 자랑하는 땅이기조차 하였다.
예종은 사람을 보내 경기지방 전역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 중 뛰어난 일관(日官)이 "여주 북쪽 5리 지점에 자리를 얻어 점을 쳐 보니 만억년을 누릴 수 있다" 2하므로 예종은 이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예종은 단호했다. 5천명과 기술자 150명을 한 달 내내 동원했다. 부역에 동원된 민인들은 자신의 양식으로 쌀 2말을 가져와야 했는데 그 자리에 있던 경기관찰사 이계전(李季甸 1404-1459)의 무덤 마저 쫓겨나는 것을 보면 식량을 주지 않는 부역이야 가벼운 부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일대에는 명당터라 그랬는지 온갖 무덤들이 더욱 많았지만 예종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의 저주였을까. 예종은 그만 천장한 그 해 11월에 승하하고 말았다.
이 천릉으로 말미암아 조선왕조는 그 수명을 백년이나 더 연장했다는 '가백년설'이 널리 퍼졌는데 만약 그랬다면 예종이 몸을 던져 백년의 세월을 번 것이겠다.
지혜를 훔친 군주
세종대왕의 고집은 부모 곁에 묻힘으로써 그 왕릉이 왕실의 효성(孝誠)이며 더불어 인화(人和)를 상징하는 뜻을 머금도록 안팎에 과시하는 것이었다. 태조, 정종, 태종 세 왕실의 능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음에 자신은 부모를 곁에서 봉양하겠다는 바로 그 인화의 의지를 천명하였던 것이다. 이런 천명은 태조 이성계가 실현한 천시(天時), 태종 이방원이 이룩한 지리(地利)에 이어 자신은 인화를 이룩한 군주로3 개국 초기의 천지인(天地人)을 완성하는 과정의 끝자리에 자신이 서 있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왕조를 개창한 영웅 태조 이성계는 그 하늘의 시간을 훔친 군주였고, 오백년 왕국의 수도였던 개성을 버리고 천년 왕국의 수도를 되찾은 태종 이방원은 땅의 이익을 훔친 군주였으며,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거점으로 학술운동을 전개하여 인간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훔쳐낸 군주였다. 하늘의 이성계, 땅의 이방원, 사람의 이도 이 세 군주는 조선왕조 개국의 토대를 마련한 위대한 세 영웅이었던 것이다.
세종은 자신의 업적을 기리는 일보다도 선대의 왕이 이룩한 업적을 찬양하는데 앞섰다. <<연려실기술>> <세종조 고사본말>에 보면 1432년 박연이 '문무(文舞), 무무(武舞) 두 악장(樂章)을 지음에 마땅히 당세의 일을 노래해야 한다'고 아뢰자, 세종대왕은 "나는 다만 대를 이었을 뿐이니 무슨 공동을 찬송할 것이 있겠는가"라면서 다음처럼 말하였다.
"태조께서 전조의 말기를 당하여 백번 싸워서 백번 이기어 그의 공덕이 백성에게 흡족하여 어지러움을 헤치어 바른 세상으로 돌려서 큰 업을 창조하여 만세의 전통을 이루시었고, 태종께서는 예와 악을 지어 교화가 행하여 지고 풍속이 아름답게 되어 중외가 다스려지고 편안하였으니 마땅히 태조를 위하여 무무를 짓고, 태종을 위하여 문무를 지어서 만세를 통하여 행할 제도를 만들어야 하겠으나 혹은 말하기를 '무가 문에 앞서는 것이 타당치 못하다'하니 지난 역사 중에서도 역시 무가 문에 앞선 일이 있었던가, 박연, 정양 등과 더불어 의논하여 나에게 알리라"4
이 말을 들은 황희를 비롯한 대신들은 "태조와 태종의 문덕을 함께 찬송하여 문무를 만들고 태조와 태종의 무공을 함께 서술하여 무무를 만드소서"라고 하자 이를 따랐다고 한다. 이처럼 선조를 흠향(歆饗)하여 인화의 질서를 세운 세종대왕은 사후 그가 쌓은 업적으로 말미암아 '조선시대 최고의 인물'이요 '조선제일군주'라는 찬양을 아낌없이 받고 있으니, 살아생전 혼신을 다해 일을 다하는 사람은 자신이 살아있을 동안 칭송받기를 거절해도 죽은 뒤 찬양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영릉 신도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택현 군주
세종이 왕위에 오른 일은 차마 눈뜨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형 양녕대군이 무려 14년 동안이나 세자위에 있었으니까 결국 형과 조카를 밀어내고 자신이 왕이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태종은 세자를 폐위했다. 그렇다면 양녕대군의 아들로 세자 자리가 내려가야 했지만 태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인지는 <세종대왕 영릉 신도비명>에서 다음처럼 썼다.
"어린 손자를 세우신다면, 앞날의 현명함을 능히 보장할 수 없사오며, 하물며 그 아버지를 폐하고 그 아들을 세우는 일이 의리에 합당하다 하겠습니까. 그런 즉 현능한 분을 골라 국사(國嗣)로 세움만 같지 못할까 하옵니다."5
이러한 대신들의 견해에 따라 태종은 "그렇다면 여러 아들 가운데 충녕(忠寧)이 가장 현명하니 그를 세움이 마땅하리라"고 하며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세자로 세웠다. 그 뒤 명나라 황제는 이러한 일에 대하여 "왕께서 국가 장구(長久)의 책려(策勵)를 위하고 성쇠존망의 기틀을 잘 내다보아 현능으로 세자를 세우려 한다면 왕의 택현한 처사를 청허하겠소"라고 답변해 왔는데 그야말로 현명한 인물을 선택한다고 하는 '택현(擇賢)'의 성공이었던 것이다.
세종은 1397년 4월 10일 한양의 잠저(潛邸)에서 태어났다. 태종이 아직 왕위에 오르지 않았을 때이므로 셋째 아들 이도(李祹)는 왕족의 한 명일 뿐이었다. 이도가 4살 때의 일이다. 어머니가 꿈을 꾸었다. 꿈속에 아버지가 아들을 안고 둥그런 태양 속에 있었다. 어머니가 이 꿈을 꾼지 얼마 안되어 태종이 즉위하였고 또 세월이 흘러 그가 왕위에 올랐으므로 실로 세종은 4살 때 왕위에 오를 운명과 마주친 것이다. 아버지가 왕위를 차지하고 궁궐에 들자 왕자가 된 이도는 궁궐에 들어가 자라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을 소개한 정인지는 이어 다음처럼 썼다.
"궁에 계실 때부터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시고, 침잠(沈潛), 과묵(寡黙)하시며, 씩씩하고도 아름다운 위의(威儀)가 계셨다."6
또한 의정부에서 지었을 뿐 그 지은이를 알 수 없는 <세종대왕 행장>에는 다음처럼 묘사했다.
"천품의 자질이 영예하고 심중하고 후하며, 배우기를 즐겨하고 게으르지 않으셨다. 그 전에 병을 앓으면서도 글 읽기를 그치지 아니하므로 정종이 탄성을 발하기도 하였다. '충녕군이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참으로 천성이다'"7
이렇게 자라다가 갑자기 왕위에 오른 세종은 왕비와 공주, 왕자에게 어질고 자상함은 물론이려니와 자신에게 왕위를 앗긴 양녕대군 및 효령대군에게도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일가친척도 보살폈으니 선대의 왕들이 베풀지 못한 덕행을 보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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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영훈, <<왕릉풍수와 조선의 역사>>, 대원사, 2000. 66쪽.
2. <여주목>,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Ⅱ, 민족문화추진회, 1969.53쪽.
3. 장영훈, <<왕릉풍수와 조선의 역사>>, 대원사, 2000. 62쪽.
4. 이긍익, <<국역 연려실기술>>1, 민족문화추진회, 1966. 245-246쪽.
5. <세종대왕 영릉 신도비명>, <<선원보감>>2, 계명사, 1989. 183쪽.
6. <세종대왕 영릉 신도비명>, <<선원보감>>2, 계명사, 1989. 184쪽.
7. <세종대왕 행장>, <<선원보감>>1, 계명사, 1989. 1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