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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헌릉 2. 들뜬 청년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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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열(미술사학자)

  누가 쓴 글인지 알 수 없지만 <태조대왕 행장>을 보면 태종 이방원의 인물됨이 정말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묘사하였다. 


  "왕은 부지런하고 검소하고 너그러우며 어질었다.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사랑했으며 학문을 높이며 제사(祭祀)에 신중하고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착함을 좋아하였다. 정사(政事)를 보는 여가에도 밤중이 되는 줄도 모르고 경사(經史)를 읽었다. 의장(儀章)과 법도(法度)는 한결같이 옛 제도를 따라서 크게 구비하였다." 1 

  


  이방원(李芳遠)은 1367년 5월 16일 함흥에서 이성계 장군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33살의 장군 이성계는 전환기의 정세 속에서 눈부시게 성장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있었다. 대륙은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왕조가 바뀌는 거대한 전환기였고 고려는 그 수명을 다하여 새로운 왕조의 출현을 기다리는 쇠퇴기이자 여명기였다. 

  

  "왕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해서 일찍부터 아름다운 소문이 있었다. 우왕 9년인 1383년 열 일곱 살 때 고려의 과거에 급제하고 1388년 10월 서장관으로 문하시중 이색(李穡)을 따라 명나라에 들어가서 황제에게 세배를 드렸다."2 



  젊은 날 세계의 중심 도시를 방문하여 급변하는 정세를 파악한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가 명나라 정벌의 명을 어기고 위화도에서 멋대로 회군을 해버릴 적 빼어난 공로를 세울 줄 알만큼 영민하게 자라났다. 끝내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 조선을 창업하자 그 누구보다 희망에 들뜬 사람은 이방원이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대를 이을 세자를 이복동생 이방석으로 지명했고 이에 반발한 이방원은 창업군주인 아버지에 맞서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그 결과 이성계는 이방원이가 아니라 이방원의 형 이방과에게 양위하였고 형의 치세 아래 차신의 등극을 차차 준비하다가 1400년 11월 11일 드디어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길고 긴 곡절 끝의 일이었지만 이방원은 아직도 겨우 34살의 청년이었다. 


헌릉 봉분과 안대(사진의 오른쪽이 태종, 왼쪽이 원경왕후 봉분) -조성왕릉1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왕국을 반석위에 올려놓다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재위하면서 수도 없는 업적을 쌓아 나갔다. 사병을 혁파하여 군사력을 국가로 환원했고 거북선을 개발하여 해군력을 강화함으로써 왜구의 침탈을 제압하였다. 그리고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여 인력자원을 경영하는 기반을 마련했고 특히 극도로 부패한 불교를 혁신하여 전국 242개 사찰만 남기고 모두 폐쇄하였으며 전 농지의 1/8을 차지하고 있던 사찰 소속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여 국가 재정을 건실하게 하였다. 저폐(楮幣)를 만들어 유통경제를 활성화하였고 벽골제(碧骨制) 보수를 대규모로 전개하는 수리사업에 전념하여 국가의 생산력을 증대해 나갔다. 또한 이성계가 시작했다가 권력 있는 신하들의 저항으로 실패한 한양 천도를 완결 지었으며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언로를 터주었다. 그러나 왕권에 도전하는 자에게는 그가 누구건 가차 없이 처단했다. 그리고 행정제도로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하여 국왕 중심주의 통치체제를 확립하였던 것이다. 육조직계제란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장관들이 상급기관인 의정부를 통하지 않고 곧장 국왕에게 보고하는 제도로 의정부중심의 신권통치체제를 무력화하는 제도였다. 

  이익(李瀷 1681-1763)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태종의 그 같은 행위를 다음처럼 평가해 두었다. 


  "나라를 세운 뒤 우리나라의 여러 임금께서는 주도면밀 하셨다. 예컨대 태종 때 민씨와 심씨가 심한 화를 당했지만 이는 먼 훗날을 생각하고 깊이 생각해 그런 것이었다."3 

 


  민씨와 심씨는 모두 외척으로 태종은 이들을 주살해 버린 이들의 성씨다. 이처럼 이방원은 신권(臣權)의 나라로 만들려는 신하 정도전 무리의 의지를 꺾고 왕권(王權)의 나라로 만들어 조선을 왕조국가로 우뚝 세운 왕이었다. 건국 초기에 자칫 흔들릴 뻔했던 혼란을 완벽하게 평정하고 천년왕국의 토대를 반석으로 다져놓은 위대한 왕이었던 거다. 하지만 지나치고 또 과도한 그의 기질에 최고의 혁명가였던 아버지 이성계마저 진저리를 쳤다. 왕위에서 물러난 이성계는 제 형을 제치고서 스스로 왕위에 오른 이방원을 두 눈 뜨고서는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해서 마침 조사의라는 장수를 동원해 함흥 일대의 친위군과 여진족 군대까지 포함한 1만여 대군으로 떨쳐 일어섰다. 태종이 왕위에 오른지 2년만인 1402년의 일이다. 

  하지만 태조의 군대는 대규모 정부군에 의해 제압당했고 이성계는 아들을 응징하는 일을 그만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함흥차사(咸興差使) 이야기는 너무도 흥미롭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그 이야기가 자세한데 태종은 함흥에 가 머무는 상왕 태조에게 계속 사자(使者)를 보냈다. 활이라면 백발백중 명궁이던 태조는 태종이 보내는 사신이 보이는 족족 쏴 죽여 버렸다. 돌아오지 않는 사자 함흥차사 전설은 여기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러던 언젠가 우여곡절 끝에 무학대사까지 나섬에 따라 태조는 태종의 간절한 요청에 따라 한양으로 환궁 길에 올랐다. 


  "태조가 함흥으로부터 돌아오니, 태종이 교외에 나가서 친히 맞이하면서 성대히 장막을 베풀었더니, 하륜 등이 아뢰기를 '상왕께서 성난 것이 아직 다 풀어지지 아니하였으니, 모든 일을 염려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차일(遮日)을 받치는 높은 기둥을 마땅히 큰 나무를 써야 할 것입니다'하니, 태종이 허락하고, 열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로 기둥을 만들었다. 

  태조와 태종이 서로 만나매, 태종이 면복을 입고 나아가 뵈었는데, 태조가 바라보고 노한 얼굴빛으로 가졌던 동궁(彤弓)과 백우전(白羽箭)을 힘껏 당겨서 쏘았으나, 태종이 급해서 차일 기둥에 의지하여 몸을 가리웠으므로, 화살은 그 기둥에 맞았다. 태조가 웃으면서 노기를 풀고 이르기를, '하늘이 시키는 것이다'하고, 이에 나라의 옥새를 주면서 '네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니, 이제 가지고 가라'하였다. 

  태종이 눈물을 흘리면서 세 번 사양하다가 받고 잔치를 열어 베풀고, 받들어 헌수(獻壽)하려할 때 하륜 들이 몰래 아뢰기를 '술통 있는 곳에 가서 잔을 잡고 잔을 올릴 때 친히 하지 말고 마땅히 내시에게 주어 드리시오'하므로 태종이 또 그 말대로 하여, 내시가 잔을 올렸다. 태조가 다 마시고 웃으면서 소매 속에서 쇠방망이를 찾아내어 자리 옆에 놓으면서 이르기를 '모두 하늘이 시킨 것이다'하였다."4 

 


  이성계가 이방원을 용서하였던 것인데 이런 과정을 거치고서야 비로소 이방원은 정통성을 지닌 참된 왕이 되었다.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커다란 약점이었다. 그래서 이방원은 그토록 오랜 세월에 걸쳐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국내 과제였고 또 하나의 과제가 있었다. 당시 중국대륙을 차지한 주인은 황제가 되어 주변지역의 주인들을 제후로 인정해 주는 책봉을 통해 이른바 동북아시아 세계질서를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새롭게 왕이 된 이방원은 중국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아야 했다.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가 명나라로부터 승인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임명장인 고명(誥命)과 도장인 인신(印信)을 받아내지 못했으므로 이 문제는 신생 조선에게는 국제질서에 편입하기 위한 매우 긴요한 현안이었다. 

  이 천하질서는 하나의 체제로 자리 잡고 있어서 여기서 이탈한다는 것은 국제무대로부터의 고립을 뜻하는 것이었다. 태종은 재빠른 외교 감각으로 그것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물론 명나라가 내전상태에 빠져 있었으므로 이를 활용한 외교술로 얻은 것이다. 재미있는 건 명나라에서 내전이 끝나고 황제가 바뀌자 태종이 다시 한 번 고명과 인신을 요청했다는 사실이다. 정변을 일으켜 조카를 내쫒고 황제에 오른 명나라의 새 황제 영락제(永樂帝)는 조선의 태종이 새로운 책봉을 청함에 따라 자신을 황제로 인정하는 그 뜻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임명장 및 도장을 또 다시 보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조선과 우호관계를 지속해 나갔다. 탁월한 외교 책략의 성취였다.
 


릉 홍전문에서 본 전경 -조선왕릉1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신성한 존재 


  태종은 부인 원경왕후 민씨와의 사이에 4명의 아들과 네 명의 딸을 두었다. 당연히 장남 양녕대군을 세자로 내세웠는데 무려 14년이나 지난 1418년 8월에 접어들어 세자를 폐하였다. 세자 양녕대군은 제왕의 학문과 덕행 보다는 끊임없이 기이한 언행을 일삼았다. 양녕을 폐위시킨 태종은 셋째 왕자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가. 여러 가지 주장이 넘쳐나지만 태종의 판단과 선택이 가장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태종은 자신이 왕위에 오른지 4년 째 되던 해에 장남인 양녕을 세자에 책봉했다. 일찍이 군주의 자질을 육성해 주기 위한 배려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조건들이 바뀌었다. 그 조건이란 첫째, 양녕이 외가에서 자라남에 외척과 밀착되어 있어 외척의 발호를 우려하는 태종의 의심이 대단했다는 것이다. 둘째, 그 14년 동안 양녕이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한 것이다. 셋째, 그 14년 동안 국내외 정세가 변화했는데 태종 통치 18년 동안 불안했던 내치와 외교 전반이 안정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넷째, 이제 창업(創業)의 시대가 지나가고 수성(守成)의 시대가 오고 있었으며 다섯째, 따라서 무력통치가 아니라 문화통치의 시대를 이끌 미래의 군주가 필요했다. 

  이러한 기준으로 보면 세자 양녕대군은 창업군주의 자질을 갖고 있었고, 충녕대군은 수성군주의 자질이 넘쳐났으니까 이를 파악하고 있던 태종은 망설임이 있었으나 끝내 양녕을 폐위하고서 충녕을 세자로 책봉했으며 또 얼마 뒤 자신이 상왕으로 물러나 저 충녕을 왕위에 올려놓은 뒤 성장을 돕는 후견인으로서 후계구도를 완전하게 숙성시켰던 것이다. 

  충녕이 왕위에 오른 지 4년째이던 1422년 5월 10일 태종이 숨을 거두었다. 그 때 나이 56살이었다. 지은이를 알 수 없는 <태종대왕 시책>에는 태종에 대하여 "총명하고 신성하시며 용맹 있고 지혜로우며 너그럽고 어지셨다"고 묘사하였는데 이어지는 문장의 다음과 같은 글귀가 크게 드러난다. 


  "무(武)의 위엄은 바람과 천둥보다 엄숙하셨고[武威肅於風霆], 글로 다스림은 해와 달보다 밝으셨습니다.[文治昭於日月]"5

 


  그야말로 태종 이방원은 천지가 뒤흔들려도 범하기 어려운 엄격한 절대자(絶對者)였고 아무도 그를 대적해서 견딜 수 있는 이가 없을 카리스마(charisma) 넘치는 신성(神聖)한 존재였다. 

  그와 같이 장엄한 인물도 젊은 날엔 나름의 풍류가 있었다. 물론, 고려왕조의 집정자 정몽주를 포섭하기 위한 의도로 지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가 지닌 그 멋은 어찌할 수 없다. 대모산 헌릉에 당도한 이라면 언제나 이 시 한 수쯤은 읊어야 할 것인데 그를 되받아 치는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 또한 저절로 꼬리를 물고 흘러나오는데, 허투로 세상을 속이며 살아가는 자들의 심장을 깊숙이 찌르는 바가 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 <하여가(何如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 <단심가(丹心歌)>) 

 

  덧붙이는 말 한 마디. 서로 얽혀 살자는 이방원은 군주의 자리에 올랐고 의리를 지키자는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격살 당했다. 어찌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살펴 볼 일이다. 이방원은 말로야 저렇게 어울려 살자 해놓고서 정몽주도 죽이고 아버지와 부인도 배신했으며, 수도 없는 이들을 숙청했다. 결코 어울려 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더욱 상황이 나빠진다. 말과 행동이 다른 이방원이 군주에 올랐고 같은 정몽주는 살해당했다. 어찌 살아야 할까. 

  


____________________
1. <태종대왕 행장>, <<선원보감(璿源寶鑑)>>1, 계명사, 1989. 195쪽. 
2. <태종대왕 행장>, <<선원보감(璿源寶鑑)>>1, 계명사, 1989. 195쪽. 
3. 이익, <인사문>, <<성호사설(星湖僿說)>>. 

4. 이긍익, <태조조 고사본말>, <<연려실기술>>. 
5. <태종대왕 시책>, <<선원보감(璿源寶鑑)>>2, 계명사, 1989. 171쪽. 


글 최열(미술평론가)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2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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