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은 왜 한강 건너편에 터를 잡았을까
해마다 음력 5월 10일이면 비가 내린다. 태종(太宗 1367-1422, 재위 1400-1418) 이방원이 승하하는 자리에서 "가뭄이 지금 심하니 죽은 뒤에도 아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이날에는 비가 오도록 하겠다"1)
고 했다. 그리고 그의 제삿날이면 조선 천지가 아니라도 그의 무덤이 자리한 곳 경기도 광주군 대모산(大母山)에는 비가 내렸다. 그 해 태종의 비[太宗雨]가 조선 천지 곳곳에 내리면 농민들은 풍년이 들 징조라며 좋아했었지만 그렇게 200년이 흐른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 1591년부터 멈추고 말았다. 외세의 침략을 경고하는 태종의 마음이었다고들 한다.
그렇게 또다시 오랜 세월 흐른 뒤 1834년 순조가 그 곁에 누우면서 비 내리는 건 그쳤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 가슴 속엔 이날을 찾아 비를 희망했다. 이 비를 사람들은 태종우라고 한다. 꼭 그날은 아니었어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찾아간 헌릉은 역시 장풍득수(藏風得水)의 형국을 띠고 있는 명당 중 명당이었다. 물론 지나치게 좋아서 기세가 넘실거리는 걸 둔한 사람도 쉽게 느낄 만 한 곳이다.
1415년이니까 태종이 왕위에 오른지 16년째 되던 해이고 자신의 나이 49살 때인데 이 때 지관을 시켜 자신과 부인이 누울 곳을 정했다. 서두른 느낌이 없지 않지만 형수이자 정종의 부인 정안왕후가 1412년에 별세한 얼마 뒤였고 또 형인 정종이 병석에 누워있음을 보고서 깨우친 바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묘지를 미리 잡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로부터 세 해 뒤인 1418년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던 사람이니까 죽음마저도 미리미리 준비하는 성품이었던 게다.
사람들은 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동구능에 터를 잡아두었는데도 멀리 그것도 한강을 건너간 까닭을 아버지와 아들이 아직 화해하지 못해서라고 하지만 이건 짧은 생각이다. 태조 이성계의 첫 부인 신의왕후가 개성시 판문군, 둘째 부인 신덕왕후가 성북 정릉동에 누워있음에도 태조 이성계는 경기도 구리시 동구능에 누웠고, 또 둘째 왕 정종과 정안왕후는 개성시 판문군에 누웠으니 어디 한 군데 모여 누워야한다는 건 애초 없는 규칙이었다. 더구나 민간처럼 선산(先山)제도 같은 것도 마련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왜 태종 이방원은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온 것인가 하는 의문 말이다. 그 어떤 기록도 없지만 헌릉 신도비 뒤쪽에는 헌릉의 위치를 설명하는 구절이 나온다.
"장백산(백두산)으로부터 내려와 남쪽으로 수천리를 넘어 상주 속리산에 이르고, 여기서 꺾여 북서쪽으로 또 수백리를 달려 과천 청계산에 이르며, 또 꺾여 북동으로 달려 한강을 등지고 멈추었는데 이것이 대모산이다."
백두대간의 끝인 속리산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경기도 안성으로 한남금북정맥이 이어지다가 여기서 또다시 한남정맥으로 달리는 산줄기의 끝에 대모산이 있다는 이야기니까 태종 이방원은 백두대간의 한남정맥을 차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는 한북정맥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둘의 거리는 한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가까운 듯해도 사실은 남한강, 북한강의 발원지까지 거슬러 갔다가 되돌아 와야 하는 너무도 머나먼 거리다.
그렇게만 보면 아버지와 아들의 거리가 왕릉의 거리만큼 멀다고 하겠지만 사실 이 두 부자의 정치이념과 통치철학 및 국가경영노선은 하나였다. 왕권중심의 중앙집권국가를 꿈꾼 이들 부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철저한 집권국가를 완성해 나간 왕이었다. 그러므로 태종 이방원이 자신의 무덤을 곰곰이 생각함에 첫째 왕 태조가 한양 동쪽에 군림하였고, 둘째 왕 정종이 임진강을 건너 북쪽에 터 잡았으니, 셋째 왕인 자신은 한강을 건너 남쪽에 자리하여 조선을 호령하고자 했던 것이다.
헌릉 항공촬영 서울 서초구 내곡동, <<조선왕릉>>1,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헌릉이 표기된 부분 <광주부>, <<해동지도>>, 45.7x30cm, 종이, 18세기 중엽, 규장각 소장.
지도의 한 중심에 헌릉이 있고 지도 아래 남쪽 성곽은 남한산성이다.
배신당한 비운의 왕비, 원경왕후
원경왕후(元敬王后 1365-1420)는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을 왕위에 등극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여장부였다. 여흥민씨(驪興閔氏) 명문가의 학자 민제(閔霽)와 송씨(宋氏) 사이에서 둘째 딸로 개성 철동(鐵洞)에서 태어났다. 변계량(卞季良 1396-1430)이 지은 <원경왕후 헌릉지>를 보면 원경왕후는 어린시절 다음과 같았다.
"태후는 태어나면서부터 정숙하고 아름다우며 총명하고 지혜롭기가 예사롭지 아니하였다."2)
그렇게 아름답게 자라던 1382년 그러니까 17살 꽃 다운 나이에 아버지 민제의 제자이던 이방원과 결혼하였다. 남편 이방원은 자신 보다 두 살 아래였다. 태조의 신하 정도전은 중앙집권국가를 설계하는 가운데 이의 장애요소인 사병(私兵)제도 혁파를 단행했다. 1398년 8월의 일이다. 이 때 이방원의 부인 민씨는 은밀하게도 사병과 무기를 친정 쪽에 빼돌려 숨겨두었다. 그로부터 열흘 뒤 정도전이 왕자들을 죽이고자 야밤에 궁궐로 불러들였을 적 민씨는 궁궐에 숙직하던 남편 이방원을 불러내 갑옷을 입혀주고 형제인 민무구, 민무질도 동원하여 정도전을 괴멸시키고 말았다. 이 1차 왕자의 난에서 승리한 이방원은 욱일승천의 기세를 보였는데 결국 태조 이성계는 왕위를 정종 이방과에게 물려주고 함흥 고향으로 퇴거해가고 말았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후 민씨의 지혜와 원호는 이방원에게 언제나 강력한 힘이었다. 변계량은 또 다시 "태후께서 능히 수습하여 집안을 다스렸고 음식 공궤(供饋)를 삼가고 아내의 직공을 힘쓰며 여러 아드님을 가르쳐 깨우치사 옳고 바른 데로 따르도록 하였으며 첩시(妾侍)를 예로써 대우하여 부도(婦道)를 능히 다하였다"3)
고 했는데 그야 그렇다고 해도 워낙 권력의 동향에 민감하였으니까 배후의 정치를 수행했을 터인데 그런 이야기를 여기 모두 서술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2차 왕자의 난에서도 민씨와 그 형제들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결국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고 또 자신도 왕비의 자리에 올랐던 것은 필연이었다. 그토록 권력에의 집념이 드셌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오를 수 있는 정상의 자리 왕비가 거꾸로 그녀에겐 내리막의 시작이었다. 태종은 이 때부터 후궁을 크게 늘려나갔다. 첫째 배신이었다. 후궁의 숫자를 늘리는 거야 그렇다고 해도 문제는 왕이 왕비의 처소를 찾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왕은 외척을 배신했다. 스승의 집안이자 부인의 가문을 억압했고 끝내 왕비의 형제와 조카 들을 죽음으로 밀어낸 것이다. 둘째 배신이었다. 더 이상 왕비로서는 나아갈 길이 없었다. 오로지 희망이 있었다면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일뿐인데 이마저도 매끄럽지 못했다. 동생 민씨 형제와 절친했던 세자 양녕대군(讓寧大君)이 1418년 폐위를 당했으니 왕비의 편에는 누구도 없었던 게다. 이것이 셋째 배신이었다.
원경왕후가 죽기 두 해 전인 1418년 남편 태종이 왕위에서 물러나고 자신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즉위하는 장면을 보았지만 배신으로 상처 입은 이 여장부에게 아무런 위안도 아니었다. 자신의 통렬한 복수극이 아니라 태종이 일을 그렇게 만들어나간 결과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1420년 7월 10일 56살의 원경왕후가 태종 보다 먼저 승하했다. 막내인 성녕대군이 14살에 홍역으로 세상을 떠나자 묘 앞에 대자암(大慈庵)을 지어놓고 명복을 빌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쓸쓸히 세상을 떠난 뒤 태종은 자신이 터를 잡아 둔 대모산 기슭에 안장하고 헌릉(獻陵)이라고 하였다. 윤회(尹淮 1380-1436)는 <원경왕후 시책>에서 원경왕후를 다음과 같은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가지런하고 장려(莊麗)하시되 곧고도 고요하셨으며, 깊고 아름다우시며 따뜻하고 공손하시면서도, 경계하여 깨우치심에 어그러짐이 없으셨고 능히 중궁(中宮)의 길한 자리에 합치하심이 있으시며, 부드럽고 훌륭하되 오로지 법도를 받들어 행하여 이로써 언덕을 아래에까지 미치게 하심이 있었습니다."4)
얼핏 읽으면 그저 그런 글일 뿐이지만 되새겨 보면 여장부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글이다. '가지런하고 장려하다[齊莊]'든지 '곧고 고요하다[貞靜]'는 낱말이나, '경계하여 깨우치심에 어그러짐이 없다[儆戒無遠]'는 문장은 원경왕후의 품성만이 아니라 그 강인하고 올곧으며 미래를 철저히 준비하여 성공에 이르게 하는 치밀함까지 갖춘 인물임을 담고 있는 바가 있다. 태종 때 출사하여 세종 때 대제학까지 이른 문장가 윤회는 겨우 56살 밖에 안된 이 비운의 왕비가 승하하심에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오래도록 누리실 것이라고들 일컬으며 더욱 큰 복을 받으실 줄 알았는데, 어찌하여 신기(神機)가 세상을 싫어하시어, 문득 구름타고 선계에 오르시기에 이르렀사옵니까."5)
더 살면서 복을 받을 줄 알았는데 그만 승하한 까닭을 '신기가 세상을 싫어하여[神機之厭世]'라고 표현한 그 내용이 무척 의미심장해 보인다. 윤회는 온 몸과 마음 다하여 남편의 출세를 위해 헌신했지만 목표에 도달한 순간 배신당한 채 살아가야 하는 왕비의 운명을 바로 그 한 문장에 숨겨두었던 것이다.
헌릉 원경왕후 봉분 병풍석 십이지상 부분, <<조선왕릉>>1,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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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긍익, <태종조 고사본말>, <<연려실기술>>(<<국역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1권. 민족문화추진회, 1966. 197쪽.)
2) 변계량, <원경왕후 헌릉지>, <<선원보감(璿源寶鑑)>>3, 계명사, 1989. 134쪽.
3) 변계량, <원경왕후 헌릉지>, <<선원보감(璿源寶鑑)>>3, 계명사, 1989. 134쪽.
4) 윤회, <원경왕후 시책>2, <<선원보감(璿源寶鑑)>>3, 계명사, 1989. 131쪽.
5) 윤회, <원경왕후 시책>2, <<선원보감(璿源寶鑑)>>3, 계명사, 1989. 1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