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시절
세자 이방원은 이러한 정종의 처신을 깊이 인정하고서 자신이 왕위를 물려받은 뒤 정종을 상왕(上王)으로 극진히 모셨다. 상왕으로 물러난 정종은 개경의 백룡산 기슭 인덕궁(仁德宮)에 머무르며 '한가하게 수양하기를 열아홉 해' 내내 '격구와 사냥, 온천, 연희'와 더불어 여생을 보냈다. 그 열아홉 해에 대해서는 그렇게 놀기만 한 게 아닌 듯하다. 변계량(卞季良 1396-1430)이 지은 <후릉지(厚陵誌)>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왕위에 3년간 계셨고, 20년간 한거하여 병환을 다스리셨는데, 이것이 대왕의 영화와 슬픔에[終始哀榮] 관한 개요이다."4)
그러니까 상왕으로 인덕궁 시절 20년에 한거(閑居)와 양병(養病)을 거듭하였다는 것이고, 또 왕위에 있던 3년은 영화(榮華)이며 물러난 세월은 애상(哀傷)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긍익이 《연려실기술》에 기록한 것처럼 "대개 이씨조선에서 정종과 같이 복을 누린 임금"이라고 한 것은 뒷날의 해석일 뿐, 병환과 슬픔의 열아홉 해라고 하는 것이 올바를 듯하다. 그 슬픔 가운데 가장 커다란 것은 왕비 정안왕후의 승하다.
추억의 정안왕후 김씨
정안왕후는 권근(權近 1352-1409)의 아우 권우(權遇 1363-1419)가 지은 <정안왕후 애책(哀冊)>에 따르면 "좋은 집안에서 탄생하셨고 천성이 참되다" 5)고 하였다. 또 변계량은 <후릉지>에서 "성품이 투기하지 아니하여 잉첩과 시녀들을 예로 대우"하였다고 했는데 그래서였는지 남편 정종은 부인의 존호를 '순덕왕대비(順德王大妃)'라고 했다. 그렇게 착하고 참한 정안왕후였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다. 따라서 정종은 6명의 잉첩과 4명의 후궁으로 하여금 무려 아들 열다섯, 딸 여덟을 두었다. 하지만 정안왕후는 이들을 자매와 자식으로 대하고 키워나감으로써 화평을 이루었고 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왕자와 공주 모두 자손이 번성하여 이름난 재상을 많이 배출했다고 한다.
정안왕후가 6월 25일 승하하고서 예를 다 한 뒤 8월 8일 상여가 떠나려 할 적에 "별과 달마저 그 늘어선 행렬을 슬퍼하고, 의장대는 좌우로 뻗어" 도열해 있었다고 한다. 먼저 정안왕후가 묻히고 그 뒤 정종이 승하함에 그 곁에 또 하나의 봉분을 만들어 후릉은 왕과 왕비가 나란히 누운 쌍릉 형식이 되었다. 이러한 쌍릉 형식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 왕비능의 형식을 따른 것인데 같은 쌍릉이라고 해도 공민왕릉은 현릉(玄陵), 노국공주 왕비능은 정릉(正陵)이라 하여 따로 이름이 있는 것이고 정종과 정안왕후는 후릉으로 하나의 이름을 지닌 것이 다르다. 두 부부의 금슬이 워낙 좋았으니 그러했던 것인가 싶지만, 저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금슬 또한 너무도 깊이 좋았음을 생각하면 모를 일이다.
후릉 옆면, 《조선왕릉 1》,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후릉의 풍경
후릉은 북쪽 산을 뒤로 하고 남쪽 냇가와 남산을 둔 곳에 자리를 잡은 이른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이다. 남쪽으로 탁 트인 하늘과 산과 강이 얼마나 시원스러운지 모를 지경이다. 그 풍경은 유구한데 정작 능묘를 견디는 정자각도 사라졌고 또 여러 석물들도 상태가 좋지 않다. 여러 기록에 따르고 또 사진을 보면 돌의 품질이 썩 좋은 것이 아니라서인지 문인, 무인 그리고 돌짐승 조각품의 형태가 닳거나 떨어져 나간 데가 많다.
후릉 앞쪽 냇가의 풍경,《조선왕릉 1》,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는 매년 산릉제향을 봉행하는데 개성의 후릉까지 갈 수 없어서 매년 9월 26일이면 태조의 건원릉 정자각에서 제향을 치른다고 한다. 분단의 상처가 여기까지 미치는 것인데 그저 권우가 지은 <애책문>이 그 슬픔을 지켜주고 있을 뿐이다.
"풀잎에 맺힌 이슬은 마르면 자취가 없고, 바람에 흩어진 꽃은 돌아오지 않사옵니다. 아아, 슬프옵니다. 저 신선들의 세상을 생각함에 혼백이 아득하고, 궁궐마저 고요하여 근심에 잠긴 것을. 오동잎 지는 것이 밤비 오는 것 같사오며, 소나무와 잣나무는 가을 하늘에 그늘을 드리웠습니다. 아아, 슬프옵니다. 죽음은 이치와 숫자를 헤아릴 수 없으니 누가 초연히 홀로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추모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어 이런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아아 슬프옵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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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종대왕 후릉지>, 《선원보감》2권, 계명사, 1989. 170쪽.
5) <정안왕후 애책>, 《선원보감》3권, 계명사, 1989. 129쪽.
6) <정안왕후 애책>, 《선원보감》3권, 계명사, 1989. 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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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종대왕 후릉지>, 《선원보감》2권, 계명사, 1989. 170쪽.
5) <정안왕후 애책>, 《선원보감》3권, 계명사, 1989. 129쪽.
6) <정안왕후 애책>, 《선원보감》3권, 계명사, 1989. 1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