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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릉 1. 정종과 정안왕후 김씨의 후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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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행복을 주고받은 한 쌍의 원앙
후릉(厚陵)의 자리  

  조선을 건국한 창업군주 이성계는 첫 부인 신의왕후의 제릉이나 둘째 부인 신덕왕후의 정릉과 멀리 떨어진 건원릉에 누워 있는데 두 번째 왕 정종(定宗 1357-1419)은 부인 정안왕후(定安王后 1355-1412)와 함께 후릉에 나란히 누워있다. 다만 대한민국 사람들은 후릉에 가서 뵐 수 없는데 휴전선 북쪽 너머에 있어서다. 후릉은 개성시 판문군 영정리에 있는데 제릉과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의 판문군 일대를 그린 《해동지도》의 덕원부(德源府) 지역을 보면, 지도의 복판에 서원, 관사가 있고 그 북쪽에 제릉이, 남동쪽에 후릉이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제릉에 계신 신의왕후 입장에서 보면 남편과는 떨어져 있어 홀로지만, 후릉의 아들과 며느리를 가까이 두고 있으니까 그나마 덜 외로울 게다. 


후릉 제릉, 《해동지도(경기도)》, 47.5x30cm, 18세기 중엽, 규장각


정종과 태종 사이 

  정종 이방과(李方果 1357-1419)는 그 아우 태종 이방원(李芳遠 1367-1422)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태종이 형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정종은 사후에도 그저 명나라가 내려준 공정(恭靖)이란 시호를 쓸 뿐이었다. 심지어 왕조실록도 《정종실록》이 아니라 《공정왕실록》이라고 했었으니 심하고 또 심한 일이었다. 예종(睿宗 1450-1469) 때 이르러서야 안종(安宗)이란 시호를 올렸다. 그런데 기이한 일은 안종이란 시호를 무시한 채 계속 공정왕이라고 불렀으며 실록의 이름도 그냥 공정왕실록으로 두었다는 거다. 정녕 왕실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적장자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다. 태종이 세상을 떠난지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왜 이 후예들이 안종이란 시호를 무시한 것일까. 태종의 소행보다도 오히려 후손들의 소행이 더욱 괘씸한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과는 아버지 태조 이성계로부터 선택받아 세자가 되었다가 왕위에 오른 계승자로 적통에 하등의 의문이 있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왜 그런 대접을 받은 걸까. 한마디로 왕위를 잘못 물려주어서였다. 아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을 때 이방원을 세제(世弟)가 아니라 세자(世子)에 봉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자 이방원은 왕위를 형에게 물려받은 게 아니라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셈이었고 정종은 후사가 없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태종이 왕위에 오를 때 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옥책문(玉冊文)>을 지어 다음과 같이 간곡한 말을 올렸던 것이다. 

  "신(臣) 방원은 큰 소원을 이기지 못해 삼가 존호를 인문공예(仁文恭睿)라 올리옵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도를 즐기면서 넉넉히 누리시고[樂道優遊] 정신을 모아 기쁨을 기르시옵소서[凝神怡養]. 이 애절한 충정의 소원을 굽어 살피시고 길이 많은 복의 상서로움을 받으옵소서."1)
  
  그리고 태종이 왕위에 오른 뒤 상왕으로 별궁에 거처할 때 태종이 이곳 별궁에 들를 때면 극진함이 부족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그 장면을 "태종이 별궁에 가서 뵈올 때 매양 신(臣)이라 칭하며, 우애에 극진하고, 모든 왕자를 환속케 하여, 등급에 따라 작호(爵號)를 주었다" 2) 
고 묘사하였다. 이렇게 잘 지냈던 것인데도 먼 훗날 260년이 지난 숙종(肅宗 1661-1720) 때에 가서야 올린 정종이란 시호를 받아들여 공정왕이란 어정쩡한 호칭을 버리고 정종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건 뭔가 이상하다. 


후릉.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경기도 판문군 령정리) -조선왕릉1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용과 같은 기세의 인물, 정종  

  정종 이방과는 함흥 귀주동 집에서 이성계와 한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따사롭고, 공손하며 어진 성품으로 자랐는데 용략(勇略)이 뛰어나 아버지 이성계 장군을 따라 출정하여 공을 세우곤 했다. 1377년 아버지가 지리산에 출몰하는 왜구 토벌에 나서자 여기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고 간신 염흥방을 국문하는 기술이 빼어남에 중앙 정계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1389년 왜구가 해주까지 침략하였을 때 목숨을 걸고 수도 개성을 방어함으로써 그 이름을 세상에 떨쳤으며 1390년에도 충청도 예산에서 왜구를 생포해 주요 정보를 캐내는 능력을 과시하였다. 
  특히 아버지 이성계 장군이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함에 따라 당시 용호군 좌장군 이방과는 민첩하게도 평양을 빠져나와 이성계 진영에 합류해 회군성공에 절대수훈을 세웠다. 그 뒤로도 양광도까지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여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임명되었던 것이니 젊은 날의 정종은 승승장구하는 욱일승천의 용과 같은 기세를 보인 무장이었다. 
  그러나 인생이란 게 구비 구비 휘는 것이고 운명 또한 매 순간 바뀌는 것이라더니 어느 날엔가 이방과는 아우 이방원이 자신보다 훨씬 빼어남을 알아채고는 뒤로 물러날 결심을 했다. 아버지 이성계가 형제를 불러 도모하려 할 적에 이방과는 아우 이방원에게 미루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두 형제가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을 비롯한 신하들에게 밀려난 뒤 심지어 신하들이 배다른 어린 왕자를 앞세워 권력을 전단하려는 위기를 겪었다. 다시 말해 신하들은 조선을 신하들의 나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볼 이방과, 이성계 형제가 아니었다. 왕자 형제는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성공함에 따라 권력을 장악했다. 그 결과로써 왕위에 오른 이방과는 지난 날 기세를 회복한 듯 국정운영에 적극 나섰다. 물론 왕위를 차지하는 순간에도 아우 이방원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양보의 언행을 함으로써 아우와의 우애를 지속시키는 슬기도 발휘했다. 특히 왕위에 오른 정종은 아들 모두를 출가시켜버렸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난국에 대비하여 왕자들의 목숨을 유지케 하려는 비상한 가족경영이었던 게다. 
  1398년 9월 5일부터 1400년 11월 11일까지 그 짧은 동안에 정종은 많은 일을 했다. 먼저 정도전 일파의 신하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개경(開京)으로 천도하고서 인사 청탁 관행인 분경(奔競)을 금지하는 분경금지법을 시행하고,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을 폐지했다가 복설, 혁파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지배세력에 의해 강제로 노비가 된 양인을 구제해 나가는 한편 저 신하들의 세력도 약화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또한 문신(文臣)을 집현전(集賢殿)에 모이도록 하여 무신(武臣)의 힘을 견제하였으며 승려의 민가 출입을 금하고 한성(漢城)에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설치하여 국정교학으로 채택한 유학을 강력히 확산시켜나갔다. 다시 말해 정조는 집권초기 신하의 나라가 아닌 왕권의 나라를 구축하면서 무력통치가 아닌 문치시대임을 천명한 영민한 왕이었던 게다. 
  1400년 1월 또 다른 형제 이방간이 군사를 일으켜 권력을 전단하는 이방원을 제거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이방원이 승리함에 따라 이방원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집정자의 지위에 올라섰다. 이 때 정종의 왕비 정안왕후 김씨는 망설이는 정종에게 시의적절한 조언을 해 주었다. 

  "전하께서는 그 눈을 어찌 못 보십니까. 속히 위(位)를 전하시어, 마음을 편하게 하시오." 3) 
 
  다시 말해 이방원의 눈초리를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으니 따라서 하루 바삐 왕위를 이방원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는 권유였다. 영민하고 눈치 빠른 정종은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고 아우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중추원을 삼군부로 개편하면서 당시까지 막강했던 사병(私兵)을 혁파해 나갔다. 이런 정책은 왕권강화 및 중앙집권을 실현하려는 왕 이방과와 세자 이방원이 연합하여 수행한 정책이었다. 
  사병제도를 폐지하는 사병혁파 정책은 정종의 가장 큰 치적이었다. 무신집권과 더불어 고려는 사병의 시대였다. 장수 휘하에 집결해 있는 병사들은 국가의 통제가 아닌 장수 개인에게 예속된 무력이었고 이들은 공권력을 능멸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성계 장군이 휘하에 거느린 사병은 최영, 조민수 장군의 위력보다 강성했고 이성계는 이러한 무력을 기반으로 끝내 새로운 국가를 창업할 수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그 사병의 위력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사병을 혁파하는 정책을 시행하고자 의흥삼군부를 설치하고 모든 사병을 여기에 귀속시켜 국가가 통제하고자 했다. 하지만 1차,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사병혁파는 실패했음이 드러났던 것이다. 실패는 곧 성공의 시작이다. 정종 이방과는 세자 이방원과 더불어 2차 왕자의 난을 계기삼아 먼저 정종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동북방 지역의 사병집단과 함께 이방원을 지지하는 이거이, 조영무 장군을 비롯한 공신(功臣) 예하의 사병을 혁파해 나갔다. 이렇게 하여 정종은 자신의 사병마저 혁파하는 '희생'을 감수하는 가운데 왕권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체제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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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종상왕 존호 옥책>, 《선원보감》1권, 계명사, 1989. 194쪽. 
2) 이긍익, <정종조 고사본말>, 국역연려실기술 1권, 민족문화추진회, 1966. 175쪽. 
3) 이긍익, <정종조 고사본말>, 국역연려실기술 1권, 민족문화추진회, 1966. 175쪽. 
글 최열(인물미술사학회 회장)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3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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