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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릉 2 - 260년만의 복권, 원한의 비가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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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 신덕왕후(神德王后 1356-1396) 강씨(康氏)
버들잎 같았던 신덕왕후 강씨 

  신덕왕후 강씨는 무척 아름다웠다. 태조 이성계가 장수로 이름을 떨치던 시절, 그 유명한 팔준마(八駿馬)를 타고 천지를 휩쓸던 어느 날, 샘물가에 이르러 물 긷는 처녀들에게 물 한 그릇을 청했다. 한 처녀가 그릇에 버들잎을 띄워 주었으므로 숨길을 멈칫 고르고서야 마신 뒤, 성질 급해 분통을 터뜨리며 '왜 잎사귀를 띄웠느냐' 질책하니 처녀가 답하기를 '음식에 체하면 약이라도 있지만, 물마시다 체하면 약도 없어 조심하라 그런 것입니다'라고 하자 그 슬기로움에 감탄하고 그제야 찬찬히 뜯어보니 참으로 미인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권근에게 다음처럼 말했다. 

  "왕위에 오르기까지 오직 신덕왕후의 내조(內助)가 참으로 많았다. 왕위에 오른 다음에도 또한 모범스런 말을 해주는 규간(規諫)으로 도움이 많았는데, 문득 서거해서 경계하는 잠언(箴言)을 들을 길이 없구나. 좋은 보좌를 잃은 듯하여 내가 매우 슬프니 경이 글을 지으라."3)
 

  그렇게 해서 권근은 <정릉원당 흥천사기>를 지었는데 신덕왕후에 대해 "편안함을 즐기는 연안(宴安)에 빠지지 않았고, 개인의 욕망을 추구하는 사알(私謁)을 허락하지 않아서 왕업(王業)을 도왔다"고 하면서 "만세의 근본을 세웠음은 착한 행실과 아름다운 규범이 진실로 옛날 어진 왕후에 부끄럼이 없었다"고  묘사하였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는 이성계가 개국하기 한 해 전 세상을 떠나버렸고 따라서 이성계가 왕위에 오를 때 유일한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가 최초의 왕비에 올라 조선 최초의 국모(國母)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도, 기억도 배다른 아들 태종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260년만의 복권, 원한의 비가 내리다  

  살한이골 또는 사아리는 신덕왕후 강씨를 맞이하여 처음엔 고요할 수 밖에 없었다. 태종의 복수극임은 누구나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이 묘소에 얼씬거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묘소를 돌보아야 할 원당사찰인 신흥사도 일백년이 흐른 1510년 중종 때 불에 타버렸다. 더 이상 신덕왕후 묘소를 돌볼 공인기관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누군가는 알 수 없지만 무성히 자라난 풀들을 깎아주곤 하는 이들이 있어 십년, 이십년 그렇게 일백년이 흐를 때까지 봉분을 잃지 않았던 게다. 
  1576년 선조대왕이 타고 가는 가마 앞에 신덕왕후 후손이 군역 면제를 청하자 이를 계기로 선조는 오랫동안 잃어버린 신덕왕후의 능묘자리를 찾아보도록 하였다. 변계량의 <이장축문(移葬祝文)>에 따라 살한이 쪽을 조사하여 버려진 무덤을 찾았다. 아마도 봉분 주위에 석물들이 있어 찾았던 것이겠다. 선조는 이때부터 한식절(寒食節)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러고도 무려 일백년 가까이 지나간 뒤 현종 때인 1669년 당대 사림의 영수 송시열의 주장에 따라 비로소 신덕왕후에 대한 복권이 이뤄져 종묘(宗廟)에 배향되면서 동시에 살한이 묘소가 저 옛 이름인 '정릉(貞陵)'으로 공인되었다. 그 때까지 없던 정자각(丁字閣)과 재실(齋室)을 짓고 수호군을 무려 70명이나 배치하였으니 뜻밖에 지나친 대접이 이뤄진 것이다.도판4   


도판 4. 봉분 앞 장명등에서 정자각을 내려다 본 풍경


  그 1669년 8월 13일, 아주 버려졌던 정릉을 되찾아 새로이 단장하고 그 기일인 이날 성대한 제사를 지냈을 때 다른 곳과 달리 오로지 이곳 정릉일대에만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원한을 씻는 비'라 하여 '세원지우(洗寃之雨)'라고 하였더니 배다른 아들 태종 이방원으로부터 내침을 당한지 260년만의 해원(解寃)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 때 정릉원당이라고 어수룩하게나마 버티고 있던 저 신흥암이 능묘와 너무 가깝다고 하여 능 밖의 함취정(含翠停) 터로 옮기고 이 절을 신흥사(新興寺)라고 이름 지었다. 그런데 그보다도 현종은 근처에 있던 약사사(藥師寺)에 주목하여 이를 정릉의 원당으로 지정하고 그 이름마저 봉국사(奉國寺)로 바꿔주었다.4) 

 나라를 받든다는 뜻이다. 봉국사는 그 뒤 1882년 임오군란 때 불타버리고 다음해부터 중건을 계속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정릉과는 인연이 멀어지고 말았다. 그와 더불어 신흥사도 세월이 흘러감에 1794년 정조 때 자리를 옮겨 오늘날 아리랑고개 쪽으로 터를 옮겨 지으면서 정릉과는 인연이 멀어졌다. 
  그렇게 또 세월이 흐르던 1865년 대원군 이하응이 신흥사가 본시 흥천사였음을 상기하여 '흥천사'란 글씨를 내려주었으므로 그 본시 이름을 회복했다. 흥천사란 그러니까 정릉의 주인 신덕왕후 강씨의 원당이었으니 그 기억을 되살려주었던 것이고 그래서였던지 일백년이 지난 1953년 조선의 첫 국모 신덕왕후 강씨와 신기한 인연이 생겼다. 

첫 국모와 마지막 국모의 인연 

  그 인연은 조선의 마지막 국모이자 마지막 황후(皇后)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 윤씨(尹氏)다. 순정효황후 윤씨는 황태자의 첫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1906년 12월 황태자비에 책봉되어 입궐, 1907년 황태자 순종이 제위에 오르면서 황후가 되었다. 황후 윤씨는 총명하였다. 1910년 8월 친일매국노들이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서류에 날인하라고 황제에게 강요할 때 황후는 이를 저지하려고 옥새를 치마 속에 넣고서 내놓지 않았다. 이 때 경술국적(庚戌國賊)의 한 사람이자 시종원경(侍從院卿)인 큰아버지 윤덕영이 황후의 치마를 들추는 무엄함을 저지르며 강제로 앗아가고 말았다. 그렇게 저항하였으나 끝내 실패한 황후는 남편을 보낸 뒤 일제와 대한민국의 냉대 속에 외롭게 살던 중 6.25전후 신흥사 가까이 살았는데 하루 한 홉으로 두 끼 밖에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 홉에서 한 줌씩을 아꼈다가 향과 초를 사들고 흥천사에 들러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고 또 빌었다. 5) 
 
  신덕왕후는 최초의 국모였고, 순정효황후는 최후의 국모였다. 두 여성의 만남은 그러니까 조선 최초, 최후의 기막힌 만남이었다. 최초의 국모는 자신의 아들을 왕세자까지 밀어 올렸지만, 자신이 죽은 뒤 두 아들이 살해당했고 자신마저 죽고서 능묘훼손과 더불어 후궁으로 격하당해 무덤마저 잊혀졌을만큼 사후생애의 불행을 겪어야 했다. 최후의 국모는 비록 아들은 없었어도 나라를 빼앗기면서 폐위당하는 고통을 짊어지고 남편도 일찍 저세상으로 보낸 뒤 가난 속에서 불교에 귀의하여 대지월(大地月)이란 법호를 받아 위로를 삼았던 비운의 황후였다. 


3) 권근, <정릉원당 흥천사기>, <<선원보감>>3, 계명사, 1898. 115쪽. 
4) <봉국사>, <<전통사찰총서 4 서울의 전통사찰 1>>, 사찰문화연구원, 1994. 340쪽. 
5) <흥천사>, <<전통사찰총서 4 서울의 전통사찰 1>>, 사찰문화연구원, 1994. 359쪽. 



글 최열(미술평론가)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21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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