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덕왕후 강씨상
지금 청계천 광통교 다리 밑 돌담벼락의 하나가 되어 짓눌린 <신덕왕후 강씨상>도판 1, 2 은 그러나 무척 아름다운 조각 작품이다. 구름무늬로 감싸인 복판에 합장을 한 자세로 선 왕후는 육백년이 지난 지금도 우아한 자태 그대로다. 굵은 옷 주름이 날개처럼 받쳐주고 얼굴보다 훨씬 큰 모자 아래 얼굴 표정이 엄숙하여 접근할 수 없는 왕비의 위엄이 흐르는 것이겠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김사행(金師幸), 박자청(朴子靑)은 물론 김진(金溱)과 같은 장인들의 작품일 것이다.1)
도판 1. 신덕왕후 강씨상 부분 1396(광통교 석축으로 사용한 정동의 정릉 병풍석 부조)
도판 2. 신덕왕후 강씨상(광통교 석축으로 사용한 정동의 정릉 병풍석 부조)
육백년 전의 걸작이 왜 지금 저 다리 밑에서 무거운 돌짐을 지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육백년 전인 1409년 그러니까 신덕왕후의 남편 태조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고서 한해가 지나자, 태종 이방원은 계모인 신덕왕후 강씨의 묘소인 정릉을 파헤쳐 도성 밖으로 내치고 말았다. 이 때 그 정릉의 여러 가지 석물들은 옮긴 능으로 보내지 않고 땅에 파묻어버렸다. 비록, 사후의 일이지만 배다른 아들 태종 이방원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여 버렸을 때 시작된 이 왕후의 서글픈 사후생애는 그렇게 기구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 다음 해 청계천 홍수 탓에 광통교가 무너져 내리자 <신덕왕후 강씨상>이 새겨져 있던 병풍석을 파내서 광통교 석축으로 사용케 했다. 백성들이 밟고 지나다니는 다리 아래서 무거운 돌다리를 받쳐주는 고단한 신세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으니 이로써 신덕왕후의 서글픈 사후생애는 한 번 더 깊어졌다.
정동에서 쫓겨나다
1396년 겨우 마흔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버린 신덕왕후는 사랑하는 남편 태조 이성계의 애절한 사랑에 힘입어 지금 영국대사관 자리인 서대문구 정동 일대에 몸을 누일 수 있었다. 그 자리는 권근이 쓴 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곳이었다.
"왕궁 서남쪽 두어 몇 리의 가까운 곳에 정했는데, 둔덕과 뫼 봉우리가 앞으로 안은 듯하고, 바람 불어 오는 방향과 물이 흘러 나가는 데가 길(吉)하게 마주하고 있다."2)
이성계는 부인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열흘 동안이나 나랏일을 돌보지 않은 채 시장마저 문을 닫게 하더니 경복궁에서 바라보이는 이곳에 능을 정하고 공사현장에 몸소 나아가보는 가운데 친히 능침(陵寢) 꾸미는 일을 감금(監禁)하면서 원당으로 170칸에 이르는 거대한 흥천사를 지어 능을 돌보도록 하였다. 그 뒤로도 경복궁에 서서 정릉을 바라보며 눈물짓기를 여사로 함에 이를 지켜보던 배다른 아들 태종 이방원은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제 어머니는 뒷전으로 하면서 지극정성으로 총애하는 저 계모 신덕왕후 강씨가 그렇게 미울 수 없었던 이방원이었다. 더구나 왕세자 자리를 빼앗긴 정안군(靖安君) 이방원은 기회를 엿보다가 1398년 왕자의 난을 일으켜 계모의 두 아들을 무참히 죽이고서 형 정종을 왕위에 내세우더니 그로부터 2년 뒤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나마 신덕왕후 강씨는 왕자의 난 이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자신의 두 아들이 배다른 아들 정안군 이방원의 손길에 죽임을 당하는 꼴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 태종은 궁궐에서 잘 보이는 정릉이 언제나 눈에 거슬렸지만 태상왕으로 살아계신 아버지 이성계가 이곳 정릉과 흥천사에 들러 불공을 드리곤 함에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나 태종은 아버지의 그런 정성을 무시하고 흥천사에 지원을 줄이는가 하면, 1405년에는 능역 100보 밖까지 주택지로 허락하여 민가가 들어서는데 특히 하륜 같은 인물이 서로 다투어 정릉의 숲을 베어내고 주택을 건축해 능역을 침탈하게 하였다.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충성은 예나 지금이나 그런 것인 모양이다.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이성계를 정릉에 합장하지 아니하고 저 멀리 양주 검암산(儉岩山)에 능을 모셔서 신덕왕후와 떼어놓더니 그로부터 다섯 달 만에 정릉을 파헤쳐 검암산으로 모시기는커녕 성 밖으로 내쳐버렸다.
도판 3.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 -성북구 정릉동
1409년 2월 23일 태종은 눈에 가시와도 같던 신덕왕후 강씨의 능묘를 이곳 살한이 또는 사아리(沙阿里)로 보내고서 한 달 뒤에는 봉분이 사라진 정릉의 정자각을 헐어다가 태평관(太平館)을 짓는데 쓰고 나머지 석인이며 돌조각 들을 땅에 묻어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게다가 정릉원당인 흥천사는 그대로 놔둔 채 살한이골로 천릉(遷陵)한 신덕왕후 능묘를 지킬 암자로 신흥암(新興庵)을 만들어 두었다. 원당마저 격하시킨 것이다. 또 1410년에는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키고 자신의 친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를 유일한 정비로 삼아 종묘에 태조 이성계와 함께 모셨으며, 광통교가 홍수 탓에 무너지자 헐어버린 정릉에서 병풍석을 옮겨와 광통교 석축으로 사용케 하였다. 철저한 복수를 완성한 셈이다. 살한이로 옮겨온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은 능묘가 아니라 한갓된 후궁의 무덤으로 떨어져 나라에서는 무관심한 장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신흥암 또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정릉을 잊어버렸던 게다. 도판3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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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들은 신덕왕후 강씨 능묘 정릉(貞陵)의 원당인 흥천사(興天寺)를 창건할 때 참가한 이들이다. <흥천사>, <<전통사찰총서 4 서울의 전통사찰 1>>, 사찰문화연구원, 1994. 352-353쪽.
2) 권근, <정릉원당 흥천사기>, <<선원보감>>3, 계명사, 1898. 1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