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왕후(神懿王后)의 제릉(齊陵)
-세 남자를 왕으로 만든 여인
많은 사람들은 신의왕후(神懿王后 1337-1391) 한씨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고 나 또한 그렇다. 게다가 능묘마저 갈 수 없는 땅, 휴전선 북쪽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에 자리 잡고 있어 아예 없던 사람처럼 여기기 일쑤다.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
"후(后)께서는 나면서부터 맑고 상냥하며 총명하고 지혜 있음이 비범하였다. 시집 갈 나이가 됨에 배우자를 선택하여 우리 태상왕(이성계)에게 시집왔다. 태상왕이 그 때에 장상(將相)이 되어 수십 년간 싸움터를 드나들어 편안한 해가 없었으나 후는 능히 힘을 다하여 가사를 돌보고 남편의 성공을 권면하였다."
<신의왕후 신도비명 병서>에서 권근(權近 1352-1409)은 이성계의 첫 부인 신의왕후 한씨가 그토록 상냥하고 슬기롭다 했다. 그런 신의왕후가 1391년 5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남편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서 왕위에 오르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무려 6남 2녀를 낳은 신의왕후의 삶은 15살 때 시집 온 이래 '편안한 해가 하루도 없었던' 시절 그 이상으로 고달픈 것이었다.
"또 성품이 투기하지 아니하여 남편의 시첩들을 예로써 대우하였다. 많은 아들들을 두었는데 올바른 도리로써 교육하였다."
남편은 곧 두 번째 부인을 맞이하였고 그 남편은 더 이상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 고통스런 일이었지만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을 터이지만 세월을 잘도 견뎌나갔다. 그렇게 했던 때문일까. 남편은 창업군주가 되어 천년왕국의 시조가 되었고, 두 아들마저 왕위에 올랐으니 실로 세 남자를 왕으로 만들어 낸 여인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여인이 누워있는 땅은 대체 어떤 곳일까. 북으로는 고려의 수도 송도(松都 開城)이 버티고 남으로는 임진강이 흐르는데 제릉은 동쪽에서 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갑좌(甲坐)요, 남쪽을 향해있으니 경향(庚向)이라 이러한 풍수가 이 여인의 세 남자를 군주로 일으켜 세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18세기 중엽에 제작한 ≪해동지도≫를 보면 제릉은 송도의 송악산(松岳山) 줄기가 뻗어 내려오는 곳인 백마산(白馬山)을 배경으로 삼고 있고 그 아래엔 자신의 둘째 아들이자 조선의 두 번째 왕 정종(定宗 1357-1419)과 며느리인 정안왕후(定安王后 1355-1412)의 능묘인 후릉(厚陵)을 두고 있다.
제릉과 후릉 ≪해동지도≫(경기도), 18세기 중엽, 규장각
신의왕후의 제릉이 한양이 아니라 송도 쪽에 자리한 까닭은 고려왕조 때 죽었기 떄문인데 저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이 이곳 가까이에 자리한 까닭은 자못 심상치 않다. 정종보다 먼저 정안왕후가 별세했으므로 정종은 어머니 곁에 며느리인 정안왕후를 눕히고 싶어 했을 터이다. 그러나 정종이 별세했을 때 아우인 태종이 그 정종을 아버지인 태조의 건원릉 곁으로 자리 잡아 주지 않았던 건 문제가 있다. 그 문제는 아우 태종이 형 정종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태종은 형 정종이 승하했음에도 정종이란 묘호를 올리지 않고 그저 공정왕(恭靖王)이라 하였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어머니 신의왕후의 제릉 아래 누워있는 정종의 부인 정안왕후의 후릉으로 보낸 것이다. 그런저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가까이 아들과 며느리를 둘 수 있었던 일은 신의왕후에겐 커다란 위로였을 것이다. 개국의 영광은커녕 부인의 자리마저 앗긴 채 서글픈 생애를 살아간 신덕왕후로서 이들이나마 곁에 둘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신덕왕후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저 태종의 신하 권근은 신의왕후에게 천명과 인심이 쏠리고 있다며 다음처럼 찬양했던 것이니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간 여인의 생애에 대한 위로의 노래처럼 들린다.
유순하고 아름다운 부덕(婦德)을 쌓아
덕 높은 임금의 배필이 되어 집안을 화목하게 했네
위엄 있게 교육하고 그 정령(精靈)이 밝고 밝아
하늘과 사람들이 기대하던 착하고 어진 이를 낳으셔 천명, 인심이 쏠리었네
(권근, <신의왕후 신도비명 병서>)
제릉의 병풍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