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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원릉 2 - 창업군주 이성계의 안식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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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릉    

건원릉은 동구능의 가장 높은 터에 자리 잡고서 모두를 호령하고 있다. 이성계는 군왕의 운명을 타고 태어났는데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엄중하고 간묵(簡黙)하여, 평시에는 항상 눈을 감고 앉아 있었으므로, 바라보기에 두려웠으나, 사람을 대하면 혼연히 한 덩어리의 화기(和氣)로 바뀌므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였다"1 고 하는데 대개 키가 커서 우뚝하고 귀가 크며 용의 얼굴을 하여 자질이 기위(奇偉)하고 신채(神彩)가 영준하였다고 한다.  


건원릉 무인석 서쪽

  그러한 이성계가 고려의 장수로써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였으니 군사 정변(政變coup d’état)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런데 그가 새 나라를 건국하여 사상이념과 문물제도를 새로이 개조해 내는데 성공함으로써 그의 행위는 창업 혁명(革命revolution)으로 변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혁명아 이성계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 제친 창업군주로써 숱한 위업을 쌓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거의 모든 문물제도를 개조했지만 무엇보다도 중앙집권국가를 확립했으며, 법치주의 국가를 이룩했고, 군사통치를 문화통치로 전환시켰으며, 유교사상을 통치이념으로 정착시켰고, 농상공업 병행의 산업구조를 농업중심의 중농체제로 전환한 점을 들 수 있다. 또 외교에서 약소국가 생존책략인 사대교린(事大交隣)을 정착시켜 스스로 제후국가임을 천명하여 특히 명나라와의 교역을 강화했다.

  그리고 주목할 점은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사실인데 천년왕국의 기틀을 조성한 업적이라 1392년 건국 이래 2012년인 지금까지도 그 수도는 번영을 구가하고 있으니 그의 혜안은 눈부신 바가 있다. 어릴 적 잠시 살다가 청년시절 이곳 서울에 정착한 나로서는 지금도 서울, 한양 하면, 태조 이성계를 떠올리곤 한다.

  이성계는 국가를 멸망시키고 탄생시키는 괴력을 발휘한 위인이었지만 그러나 집안에 대해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무능을 드러냈다. 첫째 부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의 아이들을 제쳐두고 둘째 부인의 아들을 세자로 세웠던 게 화근이다. 그토록 강력했고 영준한 첫째 부인의 자식들 그 가운데 이방원은 끝내 세자를 폐위시켜버렸고 또 이미 왕위에 올라있던 자신의 형마저 몰아낸 뒤 왕위를 차지했던 것인데 모든 시작이 바로 저 둘째 부인의 아들을 세자로 세우면서였다. 둘째 부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는 남편이 왕위에 오른지 5년째 되던 1396년 8월 세상을 떠났는데 이성계는 경복궁에서 남쪽으로 훤히 보이는 정동(貞洞) 지금의 영국대사관 터에다가 능묘를 조성하게 했다. 아침저녁 출퇴근길에 보이도록 했던 게다.

  그러다가 병이 나자 왕위를 아들에게 내 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던 이성계는 아비의 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이방원의 거침없는 행위를 지켜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뜻과 아무런 관계조차 없이 이방원이 왕위에 올랐고 이성계는 저 멀리 자신이 태어난 고향 함흥으로 훌훌 털고 가버렸다. 이방원이 차사를 보내기만 하면 그 잘 쏘는 활솜씨를 발휘해 죽여 버리니 '돌아오지 않는 사신'이라 '함흥차사'가 여기서 유래하였다.

  이성계는 자신이 죽으면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신덕왕후의 곁에 눕고 싶어 했다. 그래서 미리 지정하는 자기 무덤인 수릉(壽陵)으로 그곳 정동을 지목해 두었다. 그러나 이방원으로서는 계모의 무덤 옆에 아버지 무덤을 둘 수 없었다. 이방원은 정동의 무덤을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을 지금의 정릉동으로 내쳐 버렸고,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그 곁은커녕 아무런 상관도 없는 지금의 동구능에 터를 잡아 눕혀버렸던 게다.

  이상한 일도 다 있다. 이성계 능묘의 봉분에는 전혀 다른 풀이 자라나고 있는 게다. 함흥 땅의 갈대다. 다른 곳에서는 자라지 않는 이 함흥갈대는 육백년을 죽지 않고 살아 매년 자라나고 있으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제초도 일 년에 한 번만 할 만큼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에랴, 신기하고 또 신기한 일이다. 이 함흥갈대를 두고 이성계가 함흥 땅에 묻히고 싶어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하지만 자신이 세운 나라, 자신이 건설한 도성을 버리고 멀리 고향으로 낙향하려 하진 않았을 것이니 함흥갈대는 아마도 태종 이방원이 가져다 심은 것이다. 

 


건원릉 봉분

  건원릉은 얼핏 보아 여느 능묘와 다를 바 없지만 봉분이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고 또 양쪽 소나무가 무리를 지어 펄럭이는 깃발처럼 활력이 넘치므로 그 장엄이 이루 말할 길 없다. 풍수하는 사람은 그 모습을 장군대좌형(將軍大座形)이니 뭐니 논란을 벌이지만 고전을 따르기 보다는 그저 군주형(君主形)이라고 하면 그뿐이다.

  그곳이 군주형과 같은 천하의 명당이라고는 해도, 또 제아무리 함흥갈대가 나부낀다 해도, 이성계의 생전 뜻과는 전혀 다른 곳이다. 그는 자신이 이룩한 국가의 복판에 눕고 싶어 했고, 그곳은 정동 일대였다. 죽어서도 자신이 일군 한양 시가지 풍경을 자신의 신하 정도전이 노래한 <제방기포(諸坊碁布)> 가락을 들으며 도읍 풍경 끝없이 누리고 싶어했을 테니 그 노래 들려드려야겠다.

큰집들 구름 위에 높이 섰고
여염집 땅에 붙어 잇따랐네
아침저녁으로 연기 끊기지 않으니
일대의 번화함이며 태평도 하여라
    (정도전, , <신도팔영(新都八詠) 4 -제방기포(諸坊碁布)>,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태조시대의 문예

  이성계의 시대에 문화계는 존왕파(尊王派)와 친이파(親李派)로 갈라졌다.2  
 정도전, 권근과 같은 친이파의 문학예술은 이른바 관각문예(館閣文藝)로, 원천석, 길재를 비롯한 존왕파의 문학예술은 처사문예(處士文藝)로 나뉘어졌던 것인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던 당대의 문예는 역시 건국의 위업을 찬양하는 쪽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자세로 앞선 고려에 충절을 다하며 은거를 택해 방외인의 우울한 정서를 읊는 쪽도 만만치 않았다. 고려 말부터 유행했던 산림처사의 <어부가(漁父歌)>는 처사문예를 대표하는 것이고, 조선왕조의 설계자인 정도전과 권근, 권우가 읊은 <신도팔영(新都八詠)>은 관각문예를 대표하는 것이다. 

  음악분야에서 민간이나 처사의 음악은 알 길이 없고, 관각음악은 고려의 음악을 지속하면서도 중국의 음악을 중시하는 것이었으며, 미술분야에서는 특별히 변화의 조짐은 없으되 다만, 관각미술에서는 개국의 위업을 기리는 뜻으로 <신도팔경(新都八景)>, 처사미술에서는 <사시팔경(四時八景)>과 같은 도시풍경과 산수풍경 그리고 궁궐이며 건물을 장식하는 장식화가 유행했을 것이다. 

  이러한 문예의 양대 구도는 조선건국기 문예의 특징인데 어느 쪽이건 내용은 달라졌을지라도 그 형식은 고려의 전통을 계승하는 던 것이니 구본신참(舊本新參)의 태도를 견지하는 가운데 고려의 형식에 조선의 정신을 담는 려기선도(麗器鮮道)의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또한 고려의 형식을 고스란히 따르면서 일부 새로운 변화를 추가했다. 건원릉 담당 건축가는 박자청(朴子靑 1357-1423)으로 그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玄正陵)을 조성한 고려말기의 인물이었음에도 밀려나기는커녕 오히려 중용되어 새로운 국가 건축물인  경복궁이며 창덕궁이며 능묘 조성을 이끈 거장으로 명성을 쌓아갔던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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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긍익 지음, <<국역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민족문화추진회, 1966. 28쪽.

2. 이가원, <<조선문학사>>상책, 태학사, 1995. 375쪽. 

 

글/사진 최열(미술평론가)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21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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