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작업에만 매달리다가 홀로 여행을 떠나 지천에 널려있는 과거 석물 조각과 사찰에 자리잡은 불상들을 만났다. 과거와의 끝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1971년 3월 7일 경남 양산군 통도사에 머물며 불상을 아로새기던 어느 날 그는 조카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처럼 썼다.
“통도사에는 암자가 열세 개나 있는데 수도암은 그 중에서도 말사(末寺)라 다 기울어져 가는데 아주 조용한 데라 사람도 안 오고 아주 공부하기 좋구나. 그래서 제일불(第一佛)은 다 파고 제이불을 팔 참인데 전일 부탁한 것이 아직 미착이라 일 중단하고 있네. 발송하였을 줄 믿으나 어찌 되었는가. 혹시 서울공대에서 전화 오면 절에 갔단 말은 말고 지금 좀 바빠서 수일 내엔 나간다고 대답해 주게.”
깊은 살림에 은거하듯 숨어 불상을 새기는 권진규. 자신이 산속에서 작업하고 있음을 강의 나가는 학교에조차 이르지 말라고 부탁하고 있으니 스스로를 감춤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권진규의 작업장은 막다른 골목길 어디엔가 자리 잡은 세상의 끝이었다.
이미 도쿄 시절 산속으로 들어가 불상을 제작하기도 했고 스물 여섯 살 때는 속리산 법주사에서 미륵대불 작업에도 심취했었으나 이토록 그윽하고 깊은 절집에서의 침묵은 일찍이 느낀 바가 없는 것이었다. 고분 같은 동선동 작업장이 고요해도 이렇게 맑은 적멸공간(寂滅空間)은 어디서도 겪은 적이 없었다.
<불상1> 나무에 채색, 45x25x19cm, 1970년대
통도사를 내려와 동선동 작업장에서 명동화랑 김문호와 12월에 전시를 열기로 계약한 권진규는 『조선일보』기자가 ‘토착화에의 성공, 불교적인 세계로의 고뇌 어린 침장 같은 것’이냐고 묻자 ‘그렇다’고 하였다. 그리고 누이동생 권경숙에게 다음처럼 말하였다.
“내 마음이 평화롭고 편할 때는 불상이 웃고 있고, 내 마음이 울적할 때는 불상도 울고 있는 것 같다.”
<불상 2>를 제작할 때는 앞서 <불상 1>에서 나무를 깎아 낸 경험을 바탕삼아 흙을 붙여나가면서 재료를 훨씬 매끄럽고 원숙하게 다룰 수 있었다. 몸과 팔을 두텁게 하여 육중함을 더했고 얼굴은 둥글고 도톰하되 코는 오똑하게 표현하고 오무린 입과 턱을 뒤로 빼서 날렵한 인상을 살렸다. 옷주름의 속도감이 전체 분위기를 생동하게 이끌어준다. 사색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온화함이 있지만 배와 가슴의 굴곡을 강화하고 팔 다리에 억센 힘을 갖춰 유연함과 중후함이 조화를 이룬 20세기 후반 불상조각 가운데 하나의 걸작이 탄생한 것이다.
<불상 2> 테라코타에 채색, 36x29x15cm, 1970년대
몇몇 사람들이 권진규의 불상에 대해 불상의 도상 규범을 기준삼으라는 충고를 했고, 권진규가 이러한 충고에 귀기울일만큼 허약하진 않았지만 더 이상 불상제작을 하지 않았음은 참혹한 일이다. 주문은커녕 낡은 규범에 얽매이라는 조언을 듣고서 절망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절망은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70년 어느 날 어느 교회에서 예수상을 주문해 왔다. 건칠 기법으로 심혈을 기울여 완성했으나 머리 위쪽 후광이 불만이라는 이유로 가져가지 않았다. 후광 뿐 아니라 건칠 고유의 거친 표면에 지나치게 옆으로 긴 팔, 매끄럽지 않은 얼굴의 질감 그 모두에 기겁을 했을 것이다. 비극으로 가득 찬 미남의 멋있는 형상을 기대했을 교회로서는 견딜 수 없는 신성모독이었을 게다.
권진규는 그런 거절에도 아랑곳없이 건칠 기법으로 불상을 제작했으나 이 불상도 거친 질감은 마찬가지여서 장엄한 기운은 찾을 길 없었다. 미형식에서 숭고함의 도상 훈련을 할 새조차 없었을 사찰과 교회로서는 권진규의 그것이 어쩌면 이단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심연
도모와 헤어지고 몇 해가 흐를 때까지 권진규는 더 이상 여성을 작업의 소재로 삼지 않았다. 문득 만난 여성에게 무심하여 그 여성은 제풀에 떠나기도 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흐른 뒤에야 집안의 잔심부름을 하는 소녀의 흉상을 새겼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1965년 도모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다시 인물 흉상에 혼신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곁에 없어도 늘 있는 것 같았던 심연의 사랑이었을까, 어머니는 단 한 순간도 자식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는 사랑의 뿌리, 생애의 심연이었다.
때마침 대학 강의를 시작하고 보니 교실에 여학생이 있었다. 동선동 작업실 창밖으로 눈보라를 맞이하며 찾아든 여학생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속곳을 내던진 여자같이 분수를 몰랐고 불타는 숯 덩어리처럼 마냥 타오르다가 접접이 까맣게 식는다.”
회고담에 담긴 남녀사이 뜨거운 애무조차도 결국은 소멸로 끝을 맺고 있으니 상상조차 허용하지 않는 고통의 세월이었다. 밤이 지나고 나면 뿌연 새벽녘의 깊은 사색 속에서 다음처럼 욕망을 씻어내렸다.
“허영과 종교로 분절한 모델. 그 모델의 면피를 나풀나풀 벗기면서 진흙을 발라야 한다. 두툼한 입술에서 욕정을 도려내고 정화수로 뱀 같은 눈언저리를 닦아내야겠다. 모가지의 길이가 몇 치쯤 아쉽다. 송곳으로 찔러보아도 피가 솟아 나올 것 같지 않다.”
권진규가 아로새긴 숱한 인간 흉상들은 모두 다르지만 모두 같다. 남성과 여성을 분간할 수 없고, 속인과 승려를 가를 수 없으며, 환희와 비참도 나눌 수 없는 인간이다. 현실을 지워버린 채 꿈으로 가득 채운 그릇일 뿐, 거기엔 눈물도 피도 메마른 듯 그대로 잠들어버린 영혼의 선율만 흐른다.
<지원의 얼굴> 테라코타, 48x32x27cm, 1967년
현실에 가장 가까운 느낌을 주는 <지원(志媛)의 얼굴>은 권진규 흉상의 전형을 드러내고 있다. 어깨를 깎아버린 삼학형의 가슴과 꼭짓점에서 솟아오른 긴 목은 어떤 흉상에서건 한결같다. 욕정 같은 현실의 열정을 제거시킴으로써 억제당한 욕망의 가혹함만이 남는다. 삼각의 몸통은 숭고함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는 통로인 것이다. 부여안고 싶은 몸둥이가 아니라 순결한 이상을 상징하는 연꽃받침이다. 그 위에 놓은 사람의 얼굴은 내면의 영혼이 피어오른 꽃일 뿐 대화를 나눌 속세의 사람이 아니다.
<비구니> 테라코타, 48x37x20cm, 1960년대 후반
<상경> 테라코타, 42x33x22cm, 1968년
<비구니>와 <상경>은 승려와 세속의 여성을 다루고 있지만 두 작품이 뿌려내는 기운은 다르지 않다. 단순화를 극도로 밀고 나감으로써 절제미를 발휘하는 가운데, 언제나처럼 단아한 입술, 우뚝 선 콧날, 시원한 이마로 이루어진 얼굴은 한결같다. 날카롭게 빛나는 눈의 표정이 신비로운데 흙으로 빚어 구워내는 테라코타 재질의 속성이라고 하더라도 권진규는 이미 이러한 효과를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던 것이다.
<스카프를 맨 여인>은 다른 작품과 달리 채색을 함으로써 장식성을 드러냈다. 일련의 흉상이 지닌 숭고미로부터 이탈하였고 다시는 이와 같은 변화를 즐겨하지 않았다. 그러나 깊은 고민을 거쳐 지극히 놀라운 채색 장식법을 과시하게 되는데, 생애의 끝 무렵 제작한 <가사(袈裟)를 걸친 자소상>이 그것이다. 나머지 부분의 타버린 흙빛은 그대로두고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옷의 일부만을 붉은색으로 덮어씌웠다. 검정과 붉은색이 기이한 조화를 일으켰다.
<스카프를 맨 여인> 테라코타에 채색, 44.5x36x26cm, 1960년대 후반
<가사를 걸친 자소상> 테라코타에 채색, 47.5x38x20cm, 1970년대 초
<가사를 걸친 자소상>은 권진규가 도달한 이상주의 세계관의 절정이다. 그가 소망했던 ‘미(美)의 피안(彼岸)’이 아닌가 싶은 작품이다. 권진규만이 알고 있는 이상 세계를 향해 생애를 바치는 예술가의 초상이자, 현실을 초월하는 영원의 길을 향해 고난을 마다하지 않는 구도장의 상징인 이 작품은 썩지 않을 영원 불멸의 세계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