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규는 다음과 같은 난해한 방정식을 소묘집 한켠에 써 놓았다. 낱말을 기호화하여 수식의 요소로 전환시킨 다음 각각의 낱말이 어떻게 변환되고 구성되며 또 재구성되는지를 섬세하게 해명해 두었던 것이다.
현실=동물+몽夢
이상주의=현실+몽
보수주의=현실+유머
꿈-유머=광신狂信
꿈+유머=환상幻想
현실+몽夢+유머=예지叡智
그러므로 예지, 다시 말하면 최고형의 사물을 생각하는 방법은 우리들의 꿈 또는 이상주의를, 현실에 뿌리박은 우수한 유머의 감각으로 부드럽게 만드는 데 있다.
이 난해한 방정식은 현실에서 시작해 예지에 이르는 과정을 수식화해 놓은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생명을 갖춘 존재이고 그로부터 비롯하는 꿈이 결합하여 비로소 현실이 구성된다는 첫 수식은 나머지 모든 수식을 규정하는 전제이다. 현실에의 불만은 이상주의를 탄생시키고 현실에의 긍정은 보수주의를 낳는다는 주장으로부터, 유머가 없는 꿈은 광신이요 유머가 넘치는 꿈은 환상이라는 데에 이르면 대개 현실이 어떻게 상상의 세계로 나아가는가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권진규는 현실과 꿈 그리고 유머를 모두 혼합할 때에야 예지에 이른다는 결론을 얻었고, 그것이 곧 자신의 창작방법이자 최고에 도달하는 과정임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권진규는 자신을 둘러싼 정치, 사회, 심지어 가족 단위의 현실로부터도 스스로를 단절시켰다. 대학 및 공모전은 성장기에, 화랑 초대전과는 활동기에 최소한의 관계맺기에 그쳤으니, 귀국한 뒤 국전이건 동창회건 아예 담을 쌓아버렸다.
현실을 배척하는 이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권진규가 이 방정식에서 ‘현실’을 계산 요소의 전제이자 근본 요소로 끌어들이고 있음은 그가 현실을 소거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현실을 어떻게 규정하는가를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다만 방정식의 시작이 현실이고 끝이 예지임으로 미뤄보건대 권진규의 현실은 실존하는 사는 사물이나 유기체로서의 사회 같은 것이 아니라 몽환과도 같은 과정을 거쳐 궁극의 지경에 자리잡은 관념으로서의 정신인지도 모르겠다. 권진규는 예지를 ‘최고형의 사물을 생각하는 방법’으로 규정하였으니, 현실을 하나의 방법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권진규에게 1965년 9월 개인전은 아무 영향을 미칠 수가 없었다. 세속의 냉담한 평가와 판매 부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작업 환경일 뿐이지 권진규가 나아가고자 하는 ‘우리들의 꿈 또는 이상주의’를 변경시킬 요인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듬해부터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 시간강사를 시작했지만 그다지 의미 있는 사회활동은 아니었다. 미술대학이 아니라 공대 건축과 재료학 강사였기에 더욱 그러하다.
일본 도쿄 니혼바시 화랑 개인전. 1968년 7월.
1968년 7월 일본 도쿄 니혼바시 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은 조국에서와 달리 따뜻한 반응과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판매도 제법 호조를 보였다. 스승 시미즈 다카시를 비롯한 여러 평론가와 조각가들이 방문하였고 언론 또한 지면을 마련해 비평을 가해주었다. 「요미우리신문」은 모두 30점 가운데 10점의 인물 흉상에 눈길을 주었다. ‘단순한 초상이 아니라 형태를 극단으로 단순화하여 얼굴 하나 속에 무서울 정도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으며 중세 이전의 종교상을 보는 것과도 같은 극적인 감정이 고조되어 있다’고 그 느낌을 서술하고 다음처럼 평가했다.
“목에서 가슴에 이르는 요약된 형상은 현대 이탈리아의 대표 작가 지아코모 만주(Giacomo Manzu, 1908-1991)의 영향이 엿보인다. 또한 둥글게 깎은 머리와 높은 코, 큰 눈을 다룬 점은 메소포타미아를 인류 최고의 문명으로 이끈 수메르인의 원초적인 초상조각 냄새가 풍긴다. 이들 작품에 유럽의 영향이 있긴 해도 구워낸 훍에서 대지의 생명이 지닌 솔직함과 순박, 동시에 세찬 생동감이 보이는 작가의 조형자세, 풍토는 아무리 보아도 동양의 그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지원>과 <춘엽니>를 구입하였고 모교에서 교수직을 제안해 왔으나 감격스런 현실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도모와의 만남을 위해 <재회>를 제작해 전시에 출품했지만 다른 사람과 결혼한 그녀를 만나보지도 못한 채 귀국했다.
<춘엽니春葉尼> 건칠, 48.x34x18cm, 1960년대
권진규에겐 오직 작업공간만이 현실이었다. 광신과 환상이 깃든 작업공간으로 문득 날아드는 청조靑鳥를 맞이하며 사람의 형상을 갖춘 테라코타를 새겨냈다. 소묘집에 남긴 글을 보면 1964년 7월 어느 날 새벽 1시, ‘고분古墳의 찬 곰팡이 냄새’가 느껴지는 작업실에서 그는 환영을 만났다.
“역시 토우土偶는 걸어간다. 虛空의 眼.”
동선동 작업 공간은 오래된 무덤과 같았고 거기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은 모두 권진규의 마음에 숨어 있던 정령이었다.
고대 조몬 토우나 신라시대 토우는 풍요를 기원하는 대지의 모신임에도 모두 슬픈 표정을 하고 있다. 죽은 자를 위해 무덤에 들어가는 운명 탓일까. 고분의 주인인 권진규를 따라 함께 묻혀 있었으므로 권진규가 만든 토우들 또한 슬픈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하지만 고대 유물은 체념과 비판에 빠졌으나 권진규의 토우는 근원의 욕망을 드러낸다. 관능에 넘치는 욕정과 강렬한 생명의욕이 숨쉰다. 다만 눈빛만이 우울과 비애로 넘치는 것이다.
<여인좌상> 테라코타, 28x12x15cm, 1967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토우를 만들 때 권진규는 유머를 소거하고 오직 꿈만을 남겨둠으로써 이상주의로 나아갔다. 관능과 욕정을 담은 경우조차 이성과 억압의 힘을 발휘하여 욕망을 내재화시키는 권진규의 방법은 흔해빠진 인체양식이 아니다. 표현력이 넘치는 외형과 이상화를 갈구하는 내면의 혼융은 권진규가 아로새긴 인체조각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