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규가 테라코타에 깊이 빠진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돌이나 브론즈는 상하기 쉽지만 테라코타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는 불로 구울 때 발생하는 우연성이고, 셋째는 마지막 과정을 다른 기술자에게 넘겨주지 않고 작가의 손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권진규 <잉태한 비너스> 테라코타, 60x27x23cm, 1967년
타인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 권진규의 순결주의 태도는 당시 거대한 기념탑과 동상 따위의 조형물 제작 사업 거부로 드러나며, 이는 그가 당시 그 사업을 비판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근거이다. 또한 제작 과정에서 거둘 수 있는 효과인 우연성은 재미 또는 장난기와 관련이 있으되, 알 수 없는 미래나 피안의 세계 뒤에 있을 신비스러운 공간과 일치하는 매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권진규는 ‘세계 최고의 테라코타는 1만 년 전의 것’이라고 하였으니 그 재료의 역사성과 영원한 고전성에 가치를 두고 있었고 따라서 자신이 지향하는 이상 세계, 그 영원성이란 주제와 기막히게 일치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1964년 7월 27일 소묘
테라코타에서 잠자고 있는 전설을 깨우는 힘을 발견한 권진규는 언젠가부터 입체도 평면도 아닌 부조 기법을 끌어들였다. 이 때 권진규의 시간은 고향의 추억에 머물지 않았다. 일본과 한국의 고대 미술품은 물론, 중국 동북 지방의 고구려 미술을 거슬러 고대 그리스와 마야 문명에 이르렀다. 그는 1964년 7월 27일 소묘집에 그려놓은 삽화 아래 다음처럼 써 두었다.
“마야 문명과 고구려(중국 동북지방)의 벽화와 흡사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마야 미술에는 벽화 및 부조, 토우 걸작이 즐비하며 같은 시기 발칸 반도와 에게 해 일대의 그리스 문명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권진규가 멕시코, 그리스, 중국 동북지방을 여행한 적은 없지만 이때 쏟아져 나온 화질 좋은 도판들을 통해 그 미술을 습득해 나갔다.
이를테면 권진규가 갖고 있던 책에 실린 그리스 신전의 부조 도판과 매우 비슷한 작품 <악사> 또는 <춤> 등이 그 예라 하겠다. 원시, 고대 세계 미술을 흡수하는 노력은 <새우>, <소>와 같이 시멘트나 대리석 부조, 그리고 1967년의 <잉태한 비너스>와 같은 테라코타에서도 이어졌다.
권진규 <새우> 시멘트, 39x68x7cm, 1960년대
권진규 <춤> 건칠에 채색, 89x90x6cm, 1960년대 중엽
동서양을 비교하길 즐겨했던 긴바라 세이고 교수로부터 배우고 서양 유학을 다녀온 스승 시미즈 다카시 교수로부터 전수받은 테라코타 기법은 부드러운 흙을 돌로 구워 적막의 세계인 고대로 여행하는 길이었다. 또한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권진규의 히망과 관점은 이미 도쿄 시절 무사시노 교실에서 배운 것이었다.
1960년대 한국은 산업화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서구 모형을 따르는 개발주의 전략은 미국 국무성 정책기획위원장 로스토우W.W. Rowstow의 근대화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것이었다. 이와 발맞춰 당시 미술계를 주도해 나간 담론인 동서융합의 열풍은 권진규의 사유세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권진규는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용광로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