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여름, 권진규가 평판이 상당했던 일본을 등지고 귀국했던 이유를 헤아릴 수 있는 단서는 1971년 6월 어느 날 그가 한 고백에 감추어져 있다.
“무사시노의 스승이며 로댕 정통을 그의 제자 부르델에게서 물려받은 시미즈 다카시 선생 아래서 8년 동안 수학하다가 탈바꿈의 내적 요청 때문에 귀국했습니다. 결국 시미즈 선생의 영향을 극복하여 저 나름의 성공을 거둔 것으로 자부하고 있습니다.”
귀국길에 마중나온 가족. 오른쪽이 어머님. 1959.
일본에서 권진규의 미래는 시미즈의 그늘 아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국 파리에서 귀국해 성공한 시미즈처럼 이국 도쿄에서 서울로 귀환함으로써 성공에 도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권진규가 말했던 가슴속으로부터 들끓어 오르는 ‘탈바꿈’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렇게 귀국한 지 13년 만인 1971년, 그는 스스로 성공했다고 자부하였다.
귀국길의 권진규는 서른 여덟에 이른 자신의 나이를 헤아렸다. 스물일곱에 떠난 조국은 그 사이 전쟁과 분단을 겪고, 당시엔 이승만 정권 아래 정치적 혼란기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미술계 사정은 훨씬 나쁜 상태였다. 대한미술협회와 한국미술협회가 대한민국예술원 및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둘러싸고 권력투쟁을 펼치고 있었으며 여러 단체는 물론 미술대학조차 휩쓸려 대립과 갈등을 드러내고 있었다. 미술시장은 혼란스러웠고 미술가들은 출신 학교와 문하를 따져가며 상대를 배척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전쟁 직후 대학을 졸업한 신예들조차 권력을 다투는 암투에 뛰어들면서 그야말로 미술계는 난장 지경이었다.
인상파는 이미 고전이었고 추상파가 미술계를 주도하는 흐름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더욱이 서구중심주의 열풍에 휩쓸리면서 당시 서구 미술계를 뜨겁게 달구던 앵포르멜, 추상표현파를 열렬히 숭배하는 풍조가 팽배했다. 권진규가 자리잡을 곳은 없었다. 이 때문에 1959년 6월 서라벌예술대학 학생들의 동맹휴학 투쟁이 벌어질 정도였는데 이 무렵 학생들은 기념동상 제작에 조수로 휩쓸려 다니지 않으면 별달리 할 일이 없을 지경이었다. 조소예술은 시장에서 배제되어 있었으므로 오직 기념비와 동상 제작만이 유일한 능력 발휘의 통로였지만 이 마저도 당시 미술계 암투의 복판에서 권력을 농단하던 윤효중(1917-1967)과 김경승(1915-1992)이 독점하고 있었다.
권진규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다면 지난날 윤효중과의 인연을 찾아가 그의 그늘에 들어감으로써 교직 또는 기념 조형물 사업에 나서거나 또는 무사시노미술학교 전신인 제국미술학교 동창회인 백우회(白友會)에 가담하여 화단 암투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었다. 권진규는 그 어느 길도 가지 않았다. 귀국한 직후 장기은(1922-1961)이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 보수작업을 한다는 소문도 들려왔지만 찾아가지 않았다. 6월 28일부터 공사를 시작한 장기은은 무려 3천만 환의 공사비를 들여 1년 동안 작업한다는 포부를 밝혔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1947년에 끝낸 일인데 뭘 더 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맺어둔 인연조차 모두 지워버린 채 자신만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서울 성북구 동선동 작업실 내부
이때까지는 아버지가 남겨둔 재산이 상당하여 가족의 생활은 물론 자신의 창작활동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친족 누군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일거에 몰락하고 말았다. 그는 별다른 내색 없이 어머니와 함께 성북구로 이사하여 동선동 언덕에 손수 작업장을 짓기 시작했다. 대작을 소화할 만한 높이의 천정과 작품 보관에 효율적인 2층 다락방을 마련하고 지하에 우물을 판 다음, 조그만 가마를 설치하여 테라코타 제작도 가능케 해두었다. 세상과 단절해도 좋을 만큼 자급자족이 가능한 공간을 마련한 권진규는 창작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갔다. 세상의 길이 끝나는 그곳의 뒤쪽으로 뚫린 조그만 문을 열면 은하수 흐르는 밤하늘이 있었다.
“나무 가지가 바람에 꺾이는 겨울날의 밤. 마디는 마냥 굵어지고 봄의 꽃 순을 잉태한다. 나무들이 합창할 때 항용 가지들은 속곳을 내던진 여자같이 분수를 몰랐고 불타는 숯 덩어리처럼 마냥 타오르다가 접접이 까맣게 식는다.”
이불 속을 빠져나와 마당에 서면 북쪽으로 미아리 고개 넘어 태조 이성계가 사랑했던 신덕왕후 강씨가 누워있는 정릉이 눈에 들어온다.
1964년 3월 4일 아침, 작업실 마당에 나가 북한산을 바라보니 아득한 고향 함흥의 안개 낀 바다가 구름 사이로 출렁거렸다. 얼마 전 구한 『동국여지승람』에서 그곳 함흥을 찾아 펼쳐보니 본래 고구려의 옛 땅이라는 이야기부터 역사와 풍토, 문물의 연혁과 그것을 읊은 아름다운 시들이 즐비했다. 어린 시절 기억나는 대로 성천강 만세교와 같은 풍물도 그려보았지만 못내 빈 가슴 채울 수는 없었다. 그 풍속에 ‘무사(巫祀)’를 숭상하는데 바퀴 통이 큰 수레를 타고 말을 달리며 활 당긴다‘는 대목에 이르니 기린산, 우두산이며 천불산, 토아동이란 지명이 저절로 익숙했다.
<말> 테라코타, 36x30x17cm, 1960년대 중반
거기 등장하는 모든 짐승들을 다 새길 것과 같은 기세로 시작한 짐승 연작은 모두 테라코타 기법을 적용했다. 1963년 닭 머리를 닮은 <해신(海神)>부터 양과 고양이, 소를 새겼으나 말만큼 매력 넘치는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말의 형태가 너무도 많은 변형 가능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에서 벗어나 흙으로 탈바꿈하면서 무한의 영역과도 같은 새로운 세계가 열렸던 것이다. 침묵과 적멸의 엄격함에서도 벗어났다. 도쿄 시절과 달리 말에게서 울음소리도 들리고 활발함과 해학까지 솟구쳤다. 어떤 말은 목을 길게 뽑아 입을 엉덩이에 대고 있는가 하면 어떤 말은 고개를 숙여 앞다리를 핥고, 또 어떤 말은 네 발로 버티며 또 어떤 말은 두 발로 선 채 앞발을 허공에 뻗어 온 몸을 솟구친다.
<말머리> 테라코타에 채색, 37x43x27cm, 1965
말머리 또한 흥겹기 그지없다. 둥근 통 모양의 입으로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인데 어떤 것은 정면을 향해 있고 어떤 것은 약간 위를 향해 있으며 또 어떤 것은 아예 수직으로 하늘을 향해 호소하는 듯하다. 특히 <말과 소년>은 말이 아이를 업고서 어르는 동작인데 네 발을 사방으로 뻗어 장난스럽고 더욱이 소년을 막대 기둥처럼 처리하여 유희감각을 한껏 발휘하였다.
<말머리> 테라코타, 66x45x22cm, 1966
말에는 고향에 두고 온 추억, 그 기쁜 세월이 담겨져 있거니와 <해신>처럼 전설이 숨쉬는 세상을 떠올리면 얼마나 충만한지 몰랐다. 제단 위에 올려 둔 제물과도 같이 신비스러웠는데 반원형 <말머리>는 고대 제의용 그릇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갈퀴 머리를 기하무늬 투각으로 새겨 가장자리를 빙 둘렀고 살결은 줄무늬를 훑어내듯 새겨 원시시대의 토기 그대로다. 전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환각에 사로잡힐 즈음 권진규는 바로 그 신화세계를 이룩하고자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