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2월 무렵, 형과 함께 현해탄을 건넜다. 경성을 거쳐 부산항에서 관부선을 타고 시모노세키항에 내려 다시 기차를 타고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에는 먼 친척인 권옥연, 함흥출신 박영익, 이수억, 김흥수, 이세득이 있었다. 권진규가 이들을 만났는지 알 수 없지만 고향 선배들이니 찾았을 법 하다. 권진규가 홀로 다닐 만한 곳으로는 우에노 공원이 있는데, 이곳에는 김복진의 스승이자 일본 근대 최고의 거장 다카무라 고운高村光雲이 제작한 일본의 정치가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이 있었고, 박물관과 미술관이 밀집해 있었다.
우에노 공원 사이고 동상(1910년경 사진)
형은 아우에게 사립 미술강습소를 소개시켜 주었다. 아마도 가와바다화학교였을 것이다. 초보자인 권진규는 수업에 혼신을 다했다. 1940년 고보 3학년 때 전교생 모두에게 적용된 창씨개명 방침에 따라 지은 곤도 다케마사란 이름은 그런대로 쓸모가 있었다.
가을이 다가오자 군국 일본이 벌인 태평양전쟁이 치열해지면서 다급해진 내각은 지금껏 실시해 오던 학생의 징병 유예를 폐지했고, 9월이 되자 제국미술학교 학생이던 이수억과 이세득, 도쿄미술학교 학생 김흥수가 학교를 그만두고 떠났다.
정규 대학생은 아니었지만 스물두 살 청년 권진규에게 선택은 두 가지였다. 징병 아니면 징용이었다. 군인으로 나가는 징병은 피해야 했던 권진규도 도쿄 근교 다치가와立川에 있는 비행기 제조공장 히다치공창에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징용을 당한 것이다. 숙련 노동자가 아닌 데다 조선인이었으므로 처음엔 허드렛 일감에 배치되었지만 정교한 기술을 익혔고 곧 부품 제조반에 끼어들 수 있었다.
미술공부를 하러 왔던 청년의 삶에 느닷없이 밀려든 어두운 그림자는 꼬박 한 해가 지나도 출구조차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1944년 가을 조선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난관을 무릅쓴 여행 끝에 고향에 도착해 보니 이곳 또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징병제는 물론 학도병에 지원하지 않는 재학생 및 졸업생에게 징용영장을 발급하고 있었으며 1944년 2월8일부터는 무차별 징용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스물 셋의 건장한 젊은이로서 징용을 피할 길은 은신하는 것이었고, 함흥시 북쪽 함주군 소작인의 인부로 위장해 숨어들었다. 노역을 마치고 해가 저물면, 눈에 띄지 않는 과수원 뒤켠에 동굴을 파고 들어앉아 겨울, 봄, 여름 세 계절을 보냈다.
동굴에서 한 달, 두 달이 되자 피가 마르는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지옥같은 늪에서 헤어나오는 유일한 길은 식민지로부터의 해방뿐이었지만 권진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 세월 내내 청년 권진규는 지금껏 쌓아왔던 그 모든 것들을 단순화시킴으로써 견뎌냈다. 네 번째 계절이 오기 전 광복이 찾아왔다.
동굴에서 밖으로 나와 함흥 집으로 돌아와 보니 세상이 온통 뒤바뀌고 있었다. 1945년 8월 함흥 건국준비위원회가 들어서고 10월에는 함흥문화건설협의회와 함흥미술가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때 박영익이 협의회 준비위원 등으로 활약을 시작했고, 인쇄소 도안사였던 최순삼은 미술가동맹 산하 함흥미술제작소 책임자로 나섰다. 미술연구소의 김원은 1944년 조선미전에 <어느 장군>을 출품해 입선함으로써 광복 후 함흥 미술계에서 배척당했던 듯하다. 1946년 7월 귀향한 이수억은 10월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함흥지부 산하 함남미술가동맹 서기장으로 취임해 활동하면서 산하 기관인 함흥미술연구소 지도를 맡았다.
권진규는 함흥미술가동맹에 가입한 다음 함흥미술연구소에 연구생으로 들어가 이곳에서 함흥 미술동네를 휩쓰는 미술가들을 만났고, 그중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한 강사 이수억과도 마주쳤다.
아버지 권정주는 해방 직후 두 자매를 서울로 보내 권영숙은 조선은행, 권경숙은 이화여자대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권진규도 금세 서울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무렵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1946년 3월 토지개혁법을 발표하고 토지개혁을 시작하자, 대지주이자 자산가인 권정주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으나 쉽사리 삶의 터전을 버릴 수 없었다. 그는 자식들을 서울로 보내놓은 채 보유 재산을 명태明太로 바꾸어 경상북도 포함으로 왕래하기를 되풀이해 현금을 마련하고는 1948년 무렵 월남했다고 한다.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전쟁이 일어나고 1951년 초에 월남하여, 대구에서 피난살이를 시작했다고 하기도 한다.
권진규는 성북동에 둥지를 틀고 비교적 윤택한 생활을 이어갔다. 1947년 봄 어느 날 이쾌대(1913-1965)를 찾은 것은 이수억의 추천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이쾌대는 제국미술학교 선배로 초현실주의와 낭만주의를 결합시킨 상징 양식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마침 이쾌대가 운영하는 성북회화연구소가 멀지 않았다. 이쾌대는 1946년 봄 돈암동 큰길가에 있는 50평 가량의 건물에 세를 얻어 성북회화연구소를 설립했는데 점차 지망생이 몰려들고 있었다. 권진규가 성북회화연구소에 나가기 직전인 1947년 1월 이쾌대의 형 이여성(1901-?)은 『조선복식사』와 같은 노작을 내놓고 이어 3월에는 윤희순, 송석하, 김재원, 이규필, 민천식, 한상진과 같은 당대 미술사학자 및 박물관 관장과 학도들을 모아 조선조형문화연구소를 창설하고 소장에 취임했다. 권진규가 이러한 분위기를 모를 리 없었을 것이고 자연스레 민족 고전유산에 관심을 기울여나갔다.
활력이 넘치는 연구소는 권진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교실이었다. 벗들을 사귀며 실력을 쌓아가는 가운데 북한산, 경복궁, 창덕궁 등 서울의 여러 명소와 유적을 찾아다녔고, 새로 개관한 미국공보원, 동화화랑, 화신화랑에서 열리는 전람회도 놓치지 않았다.
1947년 여름, 그에게 속리산 법주사의 33미터 크기 미륵대불 마무리 작업에 참여할 기회가 왔다. 절에서는 김복진의 제자 윤효중에게 이 작업을 위촉했으나 권진규에게도 이 작업에 끼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온 것이다. 법주사 미륵대불은 1939년 봄부터 시작해 1940년 8월 김복진이 타계할 때까지 거의 완성된 상태였다. 김복진은 이미 높이 11미터 크기의 금산사 미륵전 본존불을 제작한 바 있었는데 그 경험을 살려 기술력을 발휘했다. 김복진이 세상을 떠난 뒤 일본인 제자 사마카 미시게루가 세부작업을 진행했으나 물자부족으로 중단됐다. 8월 어느 날 윤효중은 조수 백문기와 권진규를 대동하고 법주사로 향했고 6개월간 작업을 이어갔다.
1960년대 촬영된 법주사 미륵대불 모습
권진규의 생애가 이때 결정되었다. 이 시절이 없었다면 조소예술가 권진규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여덟 해 전 요절한 김복진에 대해 스님들로부터, 윤효중으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었을 것이다. 김복진은 1920년 도쿄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해 다카무라 고운 교수로부터 일본 고유의 조각을 배웠으며, 다테하타 타이무와 아사쿠라 후미오 두 교수로부터 서구 근대 조각을 배운 뒤 20세기 전반기 조선 조소예술계를 이끌었다. 두 계열의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로댕의 인상파와 일본 전통 목조 및 불상이었다. 또한 김복진은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일찍이 자각하여 독립국가 및 민중사회 건설을 지향하는 운동에 참가하여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6년을 복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내면의 힘을 강조하는 적극성과 동세의 미학을 추구하여 조선 고유성 및 서구 근대성을 융합하는 방법론을 구축해 냈다.
권진규는 윤효중과 함께 김복진이 남긴 많은 유작을 보았을 것이며 아마도 충격에 휩싸였을 것이다. 위대한 선배의 작품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을 것이고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왼쪽) 권진규, 보살입상, 나무 54x14x10cm, 1950-53 (오른쪽) 권진규, 남자입상, 브론즈, 49x11x11cm, 1950년대
법주사에서의 6개월은 설렘과 두려움의 시절이었다. 작업은 1948년 1월 어느 날 끝났다. 작업대를 철거하고 온전해진 부처님께 올리는 법회를 열고 보니, 불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눈부시게 장엄한 부처를 뒤로 하고 서울로 향하는 권진규의 마음은 온통 조소예술가의 꿈으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