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막염 때문에 휴학하여 보통학교를 열여섯 살에 겨우 졸업하고, 이미 동기들 모두 상급생이 되어 있었던 함흥고등보통학교에 용기내어 응시했으나 두 해나 학업을 중단했던 터라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재수를 해야 할지 망설이며 회복기를 보내고 있을 때 새로운 기회가 찾아들었다. 춘천 쪽에 탄광을 소유하고 있어 그곳에 연고가 있던 아버지가 결단을 내려 병마에 허약해진 둘째 아들을 따스한 남쪽으로 보내 몸과 마음을 회복시키기로 했던 것이다. 열일곱 살이 되던 1938년 권진규는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남쪽 여행길에 올랐다.
춘천고등보통학교 학적부에 권진규의 취미는 등산과 독서로 기록되어 있다. 춘천시절 권진규가 즐겨 오르내린 산은 소양강을 따라 북쪽으로 2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청평산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권진규는 춘천 시절을 떠올리며 다음처럼 기억했다.
“우리들의 중학교 시대란 비록 어렸지만 포부와 호걸을 꿈꾸며 호연지기를 탐내던 인간 형성기였던 만큼 그때의 동창들이 이렇듯이 간격 없었던 것을 회상하며 요즘의 청소년들의 생활을 탓하여 보곤 한다.”
그가 그리던 포부는 무엇이었을까. 이때 권진규가 꿈꾸던 호걸의 모습이 미술가였을 리 없다. 학창 시절 내내 미술 점수가 유난히 높지도 않았거니와 미술 쪽으로 특별한 활동을 한 흔적조차 없다. 오히려 이 때 권진규는 사회 지도자를 지향했는지도 모르겠다. 3학년 총대표, 4학년 때 반장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성적이 우수하여 내내 우등생이었고 특히 졸업반인 5학년 때는 1, 2등을 독차지했다. 학적부 기록에 따르면 ‘성격이 온순하고 움직임이 소심하여 용기가 없어 보인다’고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조가 견고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계속 노력을 해 나간다’고 평가하였으니 그야말로 강건한 외유내강의 인간형으로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절 권진규는 제법 여러 사람을 깊이 사귄 듯하다. 뒷날 체육선생을 만나 지난 날을 회고하며 서로 늙어가는 세월을 다정스레 주고받았거니와 춘천 시절을 다음처럼 회고했다.
“야, 너 내 이름 알겠니? 하는 물음에 상대는 거의 다 얼굴은 알겠는데 이름은 모르겠다는 듯이 기억을 더듬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는 미안스러운 생각에선지 씽긋이 얼굴을 이그러뜨린다. 이것은 30년 만에 만나는 중학교 친구와의 인사에서 흔히 당하는 일들이다. 아마도 내 몰골이 너무도 많이 달라졌음에서일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 간에도 ‘야, 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중학 동창이기 때문에 그러할 수 있으리라.”
<자각상> 나무, 25x13.5x19.5cm, 1960년대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1942년 겨울이 올 무렵 도쿄에서 유학하던 형 권진원이 귀국했다. 졸업을 앞둔 21살의 청년 권진규도 집안의 전통에 따라 일본 유학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이미 미술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아버지는 반대했으니 뜻을 꺾고 싶지 않았다. 의과대학을 다니던 형과 상의했고 그 뜻을 헤아린 형은 일본 가는 길에 아우를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아버지의 뜻을 어긴 자식에게 아버지는 무관심으로 대응했고 특히 형편없이 적은 학비를 보냈다. 당시 은행원 월급이 50엔 가량이던 시절, 형에겐 1백엔, 아우에겐 12엔을 보냈는데 이 액수로는 사설 미술강습소 등록금조차 내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권진규는 미술을 포기하지 않았다. 고보시절 미술성적이 뛰어나지도 않았고 후원해주는 교사도 없는 터에 왜 미술을 전공하겠다는 포부를 지녔을까. 유년시절 손재주와 보통학교 시절 공모전 입상의 추억만으로 그랬던 것일까. 뒷날 권진규는 함흥 시절 손재주 탓에 미술가의 길을 걸었을 것이라고 회고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긴 하다. 춘천 시절에도 고향 함흥 미술계는 여전히 활력이 넘쳤다. 방학은 함흥에서 보냈으니 미술계의 활력을 몸소 느꼈을 것이다.
1937년 공무원이던 박영익이 일본 가와바다화학교에 입학하고, 1938년 함흥공립중학교를 갓 졸업한 김흥수金興洙가 그 뒤를 이어 가와바다화학교에 입학했으며, 일본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한 평양 출신 김원金源이 함흥 영생중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했다. 권진규가 여름방학 때 고향으로 가 보니 김원이 시내에 개설한 미술연구소가 있었고 여기에 함흥공립중학교 학생 이세득이 연구생으로 나오고 있었다. 또 함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 이수억李壽億이 1939년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고 박영익도 그해 일본대학 미술과에 입학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제 18회 조선미전에서 함흥 출신 미술인들이 대거 입선한 소식은 함흥 미술동네를 또 한차례 휘청거리게 했다. 일본인 화가 나카노 고쿠라는 서양화부에 조각부에 동시 입선하였고 히오키 카가오, 오카라 히데오, 그리고 김원, 김명원, 오웅익이 한꺼번에 서양화부에 입선했다. 모든 언론이 일제히 법석을 떨며 들려준 고향소식은 춘천고보 2학년 학생 권진규의 가슴을 설레게 했을 것이다. 1940년에도 일본에 있던 김흥수가 도쿄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한 데 이어 제 19회 조선미전에 오카라 히데오와 김명원, 변경숙이 입선하였다. 권진규가 고보 4학년에 올라가던 1941년에는 함남 공립중학교를 졸업한 이세득이 일본으로 건너가 4월 제국미술학교 본과 서양화과에 입학했으며 5학년 때인 1942년에는 서울 제2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권옥연이 일본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일본 작업실에서의 권진규
춘천은 함흥 미술동네에 빗대면 조용했다. 박수근이 조선미전에 입선한 1932년까지 몇 사람씩 입선한 뒤로는 시들해지는데 다만 도쿄 일본문화학원 졸업반인 이철이가 1937년 6월 춘천공회당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뿐이다.
권진규가 2학년에 오른 1939년 춘천에 머물던 박수근이 유화 <여일>을 조선미전에 응모해 입선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박수근은 화려한 유학생 출신은 아니더라도 독학의 길을 걸어 다섯 번이나 입선을 했다는 사실과 함께 춘천여학교를 졸업한 김복순과 결혼했다는 소식까지 겹쳐 춘천지역 사람들에게는 화제의 인물로 떠오른 색다른 존재였다. 2학년 때 이 사건을 기억해둔 권진규는 자신의 길을 선택할 무렵 독보의 의지를 되새김질하며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수근의 추억을 현실로 만들어갔다.
양구 출신이지만 춘천을 거점 삼아 화가로 성장한 박수근. 춘천의 화가 박수근을 권진규가 만났을지도 모르지만 별다른 인연이 없었으므로 일부러 찾아갔을지는 의심스럽다. 다만 소문으로 들어 그 이름을 기억했을 것이고 홀로 가는 아름다운 독보의 걸음걸이를 가슴 속 깊이 아로새겨 두었을 것임엔 틀림없다. 박수근이 걷던 길이 그리도 어려웠는데 권진규 또한 못지않았으니 인연이란 게 묘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간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권진규는 그저 이 아름다운 호반도시 춘천의 풍광이 지닌 기운을 마음껏 받아들이며 호연지기를 길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진학을 위해 훌쩍 떠나가버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