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규가 태어난 1922년 함흥은 거대한 도시였다. 함흥 읍내 이름도 자자한 권씨 가문의 며느리 조춘이 둘짜 아들 권진규를 낳았다. 할머니의 정성으로 형, 두 누님, 누이동생 둘과 함께 별 탈 없이 쑥쑥 자라났다. 권진규가 여섯 살 무렵 중앙유치원에 나갔을 때 이미 누님과 형 모두 그곳을 거쳐 보통학교로 진학했고, 뒤이어 누이동생 또한 입학했다. 유치원 소풍은 동남쪽의 경흥전으로 갔다. 선생님은 이곳이 조선을 개창한 태조 이성계가 태어난 집이라고 했고, 태종 이방원도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주었다. 신기하고 또 신기해 권진규는 이곳을 잊을 수 없어 뒷날 자라서도 문득 생각날 때마다 이곳을 거쳐 바다로 나갔다.
함흥 제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권진규는 도시를 벗어나 서쪽 성천강과 북쪽 반룡산으로 놀러다니기를 즐겼다. 반룡산은 태조 이성계가 그 산 치마곡에서 어린 시절 말 달리며 활쏘기를 비롯한 무에를 익힌 곳이다. 산 높은 곳에서 활을 쏘니 무려 4km를 날아 달리는 말을 명중시켰다 하여 이곳 이름을 치마곡馳馬谷이라고 하고 태조성을 쌓았다고 한다. 꿈결같은 이야기에 홀린 권진규는 누님을 졸라 숱한 옛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말> 캔버스에 유채, 63x58cm, 1960년대
왕자의 난과 함흥차사 사건은 이성계와 함흥지역이 얽혀 가장 널리 퍼진 이야기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버지 이성계를 함흥으로 몰아내었다는 오명을 씻기 위해 태조를 서울로 모시기 위해 사신을 보냈으나 그 때마다 태조는 보란듯이 활로 사신들을 쏘아 죽여버린다. 이런 일이 되풀이 되자, 태종은 아버지의 오랜 고향친구 박순을 사신으로 보냈는데, 박순은 태조가 머무는 궁궐 문에 새끼 말을 매어두고 자신이 어미 말을 타고 태조가 머무는 전각으로 가 거기에 어미 말을 묶는다. 박순이 태조에게 아뢰는 사이 두 말이 울부짖자 박순은 태조에게 ‘어미 말과 망아지도 저러한데 지극한 자비와 사랑으로 자식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으십니까’ 아뢰게 된다. 태조는 이에 감동하여 박순에게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용흥강을 건너면 죽음을 면하게 될 거라고 하며 풀어주나 이를 반대한 신하들은 막 배를 타려하는 박순을 끌어내려 베어버렸다. 박순의 유언으로 태조는 서울로 돌아가는 길을 택하게 된다. 기이한 전설 같은 이 이야기는 어린 권진규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어린 권진규는 이성계가 말에 물을 먹였던 성천강가에 앉아 흙을 파서 사람도 빚고 말도 새겼다. 냇가에서 판 진흙으로 무언가 만들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면서 옛 이야기가 되살아났다. 마을 뒷산 성관산에서도, 반룡산 치마곡에서도 그랬다. 어느 곳에서건 권진규는 그 옛이야기에 나오는 것들을 흙으로 만들었다. 뒷날 권진규는 ‘내가 조각을 한 것은 아마 이때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 시절 친해진 흙이 어디 성천강가 진흙뿐이었을까. 함흥 일대의 땅, 험한 산, 긴 내, 넓은 들을 이루고 있는 대지 그 어딜 가나 널린 흙이 모두 소년의 가슴이었을 것이다.
<해신> 태라코타, 46x63x21cm, 1963년
소년 권진규가 즐겨 찾던 이성계의 생가에는 운전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푸른 잔디가 4km나 펼쳐져 놀기 좋은 곳이다. 이성계가 자라면서 격구 놀이에 빠졌던 곳인데, 권진규도 어쩌면 이곳에서 축구를 하며 놀았을지도 모른다. 정몽주,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조헌, 송시열과 같은 위대한 인물을 모신 사당인 운전서원으로 보통학교 시절 소풍을 왔었고, 그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을 것이며, 향교, 사직단, 성황사는 물론 까마득한 고대로부터 해신海神이 머물던 곳이라 전해진 송도사와 화도사도 둘러보았을 것이다. 송도사와 화도사는 함경도가 주관하여 봄 가을 제사를 지내 용왕으로 하여금 평안을 빌고 산악과 바다의 험악한 공포를 이기며 살아갈 의지를 북돋웠던 곳이었다.
이런 곳을 뛰어놀던 소년 권진규는 교실에서의 배움도 즐거웠는데 특히 미술시간이 행복했다. 만들고 새기는 데 재능이 뛰어난 소년이었으니 그 얼마나 신났을까. ‘얼레’나 ‘연’을 만들어 벗들에게 나눠주며 인기를 독차지했다. 당시 함흥 상공회의소는 지역의 산업화를 촉진하기 위해 공업전시회를 주최했는데, 특히 어린이들의 손재주를 육성하고자 지역 내 학교의 참여를 적극 유도했다. 선생은 빼어난 손재주를 가졌던 권진규를 눈여겨보았다가 그 재능을 과시할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선생의 추천으로 공업전시회에 응모한 권진규는 실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1932년 보통학교 3학년인 11살 소년은 실을 감아두는 나무 실패에 사슴을 새겨 응모하여 수상을 하게 된다. 전시장에 진열된 <사슴>을 마주친 소년은 뛸 듯이 기뻤고 학교에서도 경사가 났다며 한껏 칭찬해주었다. 그뿐 아니라 과묵하신 아버지까지 나서서 사진기를 선물했다.
권진규 일가 모임.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11살의 권진규
<사슴> 입선으로 권진규는 처음 함흥 미술동네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가 16살 소년으로 자라나기까지 함흥은 함경도 일대의 중심지로 미술문화 또한 만만치 않게 번성했다. 이곳에 서양으로부터 이식해 온 유화의 씨를 뿌린 이는 일본인 화가였다. 요시키 고로(吉岐五郞), 와다 마사오(和田正男)와 같은 일본인 화가들이 함흥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1923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들로부터 배웠을지도 모를 최순삼(崔淳三 1913-1997)이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태평양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최순삼이 일본으로 건너가던 1931년 5월 함흥에서 활약하던 화가들이 제 10회 조선미전에 대거 출품하기도 했다.
함흥 출신 청년들이 미술분야에서 전에 없던 진출을 해나가자 교육자와 언론인 그리고 재력가 중심으로 미술 발전 후원 여론이 일었다. 이러한 후원 의지는 함흥지역을 짓눌렀던 오랜 억압의 자취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함흥의 부흥이란 구호가 퍼져나가는 가운데 탄생한 것이 함흥양화동인회다. 1933년 5월에 결성된 이 동인회 사정은 이렇다. 1933년 5월 조선 미전에 최순팔이 입선하자 이를 축하하는 모임이 열렸을 것이다. 이미 1931년에 입선자 반열에 오른 임봉민, 박영익과 1932년의 최순일, 이대림, 이준실이 마련한 자리였다. 이들은 함흥의 신흥화단을 일궈나가기로 의기투합했을 것이고 그 이름을 양화동인회로 결정했다. 게다가 태평양미술학교를 중퇴하고 일시 귀국한 최순삼도 여기 합류함으로써 기세가 드높았을 것이다. 양화동인회는 회원전을 계획하고 후배들을 살피기로 하였는데 권진규와 같은 소년을 격려하였을 것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자소상> 테라코타, 18.5x13.5x19cm, 1960년대
권진규는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세상을 담아 왔고 그것을 집안에 설치한 암실에서 현상하고 인화하는 데 재미를 붙였다.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아 그가 무엇을 담았는지 알 길 없지만 말과 소, 닭과 염소 그리고 고양이, 그 많은 짐승은 물론,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뛰놀던 반룡산과 헤엄치던 섬진강, 이성계의 흔적이 담긴 유적을 담아 나갔을 것이다. 유복한 유년시절을 거친 소년의 세계는 어쩌면 사슴처럼 우아하고 신령스러웠을 것이다.
1934년 열세 살 때부터 두 해 동안 앓아야 했던 늑막염. 환자가 되어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했을 때 소년 권진규가 빠져든 또다른 세계엔 무엇이 있었을까. 남다른 눈을 지닌 소년에게 좁은 병실과 세상으로 향한 창문이 있었을 터이고 거기엔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이 어른거렸을 것이다.
(원고 출처: 최열, 《권진규》, 마로니에북스, 2011)
(원고 출처: 최열, 《권진규》, 마로니에북스,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