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열(미술평론가)
1955년 4월 미국공보원 전시장에서 처음으로 이상 상태를 보이더니 점차 병세의 징후를 드러냈고, 끝내 7월 어느 날 성가병원에 입원했다. 구상은 최초의 발병 상황을 다음처럼 기록했다.
그는 결국 발병하게 되었는데, 즉 하루는 그때 내가 근무하던 『영남일보』주필실로 돌연 대구경찰서 사찰과장으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다. “이중섭이라는 사람이 자기는 결코 빨갱이가 아니라고 거듭거듭 되뇌이고 있는데 정신이상자 같으며, 신원을 캐물으니 선생 친구라니 연락한다”는 내용이었다....(중략)...나의 친구요 천하의 기인이던 속칭 포대령 이기련이 중섭의 천진을 놀리느라고 ‘너는 빨갱이 같다’고 그런 것이 결국 그를 자수인가 진정인가에 나아가게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곧 달려가 그를 인수받아 성가병원에 입원을 시켰는데 그 후 그의 병 증세라는 것 역시 별 것이 아니었다.
구상은 다시 한 달 후인 8월 26일 서울로 그를 데리고 가서 수도육군병원에 입원시켰으며, 한 해가 지난 1956년 7월 마지막 병원인 서대문 서울적십자병원으로 옮겨 입원시킨 장본인이었다. 그가 기록한 대구 성가병원에서의 치료법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정신적 증세(?)는 그가 신고呻苦하는 1년 반 동안 기복의 차는 있었으나 비장하리만큼 지속되었으니, 그의 병 치료란 주로 그를 붙잡아매고 목구멍에 고무줄을 넣어 우유 등을 먹이는 것이었다면 저간 소식이 짐작될 줄 믿는다.
서울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일보 사회부장 이목우, 문화부장 남욱, 동료화가 김환기, 변종하 등이 이중섭 후원운동을 시작했고, 유석진이 자신의 개인병원인 성북동 성베드루신경정신과병원으로 옮기도록 배려했다.
유석진 원장은 그가 그림을 그리며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왔고 빠른 증세 호전으로 2개월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유석진 원장은 병원에서 제작한 이중섭의 치료용 그림을 보관하고 있다가 1971년 석사 논문 작성을 위해 조사를 요청한 학생 조정자에게 도판 촬영을 허락해 주었다. 그는 도판 스무 점을 모두 논문에 게재했는데, 이들은 간략한 선묘로 문자를 나열하거나 사물을 간략하게 추상화한 소묘 작품들이다. 조정자는 다음처럼 설명했다.
하얀 백지에 크레용으로 그린 빨간 글씨와 파란 그림을 한결같이 그렸다. 또 둥근 테이블은 어떻게 보면 잠재적인 욕구 불만을 표현한 것같이도 보인다.
<낙서화 79번> 40x29cm, 종이, 1955, 유석진 소장
성베드루신경정신과병원 유석진 원장이 정신질환 치료법을 도입하여 이중섭에게 시술할 때 작품. 전기 스탠드 형태와 문자 ‘力’을 소재로 삼아 성욕을 분출시킨 이 그림은 1973년 성모병원에서 투병 그림 전람회를 통해 공개되었다.
<문자낙서도 07> 40x29cm, 문종이, 1955, 유석진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