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은 1955년 2월 24일 대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구상, 이기련과 함께 셋이서 작품전을 준비하겠다’는 마음을 갖고서였다. 서울에서의 전시를 마치고 팔리고 남은 작품을 가지고 대구로 내려갔던 것이다.
대구에 도착한 그는 『영남일보』 주필 구상의 주선으로 대구역 앞 경복여관 2층 9호실에 거처를 마련했다. 자리를 잡고나서 대구 전시를 위한 작품 제작에 돌입하여 4월 중 경복여관 옆 대구 미국공보원 화랑에서 전람회를 하는 일정이 잡히게 되었다. 당시 대구 미국공보원은 이중섭 개인전을 앞뒤로 2년 가량 전람회를 한 기록이 없다. 다시 말해 이중섭 개인전은 대구 미국공보원으로서는 매우 특별한 배려였던 것이다.
서울 개인전에서 작품을 충분히 판매하지 못했고 더구나 수금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 따라서 이중섭에게는 대구 개인전이 마지막 희망이었다. 대구로 내려가기 바로 전날 서울 미국문화원 직원이던 맥타가트(얼마 후 대구 미국공보원장 발령)는 『동아일보』에 이중섭의 작품이야말로 “수집할 가치가 있다”는 말을 써줌으로써 판매를 촉진한 데다가 대구에 내려와 개인전 준비에 부주하던 3월, 또 하나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백철이 편찬한 『세계문예사전』에 이중섭이 등재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중섭李仲燮(1916-) 양화가. 평남 평원군 출생. 도쿄 문화학원 미술과를 졸업하였으며, 일본 자유미술가협회 회우다. 작풍은 강렬한 로칼 칼라local color가 특징이다. 주요 작품으로 <망월>望月, <지일>遲日, <소와 아이들> 등이 있다.
당시 민중서관에서 나온 이 사전은 전후 최신판으로 상당한 권위를 지닌 것이었다. 미술 분야 집필자는 김병기와 최순우였는데 서양편은 김병기, 동양편은 최순우였으므로 이중섭 항목 집필자는 최순우였다. 한국인 생존 미술가로는 고희동, 김기창, 김은호, 김인승, 김환기, 남관, 노수현, 박승무, 박영선, 손재형, 오일영, 이상범, 이종우, 이중섭, 허백련으로 겨우 열다섯 명인 데다 유채화가는 다섯 명에 지나지 않았다. 평판에 민감했던 이중섭으로서는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경복여관에 자리를 잡은 이중섭은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고서 저토록 간절하게 그리고 아름다운 형상화에 전념했다. 실로 대구에서의 연작이라 이를 만큼 눈부신 걸작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중섭 <대구, 눈과 새와 여인>49.8x32.5cm, 종이에 에나멜, 1955
<대구, 눈과 새와 여인>은 곱고 화려한 색채가 아름다운 작품이다. 1972년 현대화랑 작품전 때 김각 소장품으로 제작 연대 없이 발표되었다. 각기 다른 빛깔의 새 네 마리와 살결 주홍빛을 가진 세 사람에 한 어린이 그리고 화폭 중앙에 빛을 띤 여인이 다리를 벌린 채 앉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화면을 온통 채워버린 함박눈이 화폭에 생기를 불어넣음으로써 꿈결 같은 세계를 연출해 보인다. 희망을 품고 대구에 내려온 1955년 2월 24일 겨울도 끝나가던 시절, 운영을 건 작품전을 앞두고서 그 휘황한 미래를 연출한 그림이 바로 이 작품이었다.
<대구, 새와 여인>은 <대구, 눈과 새와 여인>에 이은 후속작품이다. 눈이 갠 다음 강한 햇살이 비쳐들면서 새 두 마리가 사라지고 여인들의 자세가 바뀌었다. 그중 두 명은 엉덩이를 들고 머리를 처박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지만 거의 보이지 않는 검은색 여인이 하나 있다. 화폭 중앙에 쓰러질 듯한 자세의 검은색 여인이 아주 흐리게 소멸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대구, 눈과 새와 여인>에서는 다리를 쩍 벌린 채 화폭 중앙에 당당하게 앉아 있던 여인이 왜 저렇게 사라지는 것일까.
이중섭 <대구, 새와 여인> 26x36cm, 종이에 유채, 1955
1955년 4월 11일 월요일 이중섭이 머물던 경복여관 바로 옆 대구 미국공보원 화랑에서 영남일보사 주최로 이중섭 작품전이 열렸다. 월요일인 11일에 개막하여 토요일인 16일까지 6일 동안이었다. 서울에서 가져온 작품과 대구에 와서 제작한 열 점 가량을 더해 작품전을 열었다고 했다. 서울에서 출품작 45점 가운데 절반이 팔렸으니까 나머지 20여점을 가져왔고 여기에 10여 점을 추가해 30여 점으로 이루어진 전람회였다는 게다. 이종석은 「이중섭 연보」에서 대구전람회에 “40여 점 전시”를 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작품목록에 있는 26점, 은자화 10여 점을 포함해 40여 점을 뜻하는 것이다.
박고석은 1972년 「이중섭을 가질 수 있었던 행운」에서 대구 작품전에 대해 다음처럼 썼다.
대구 개인전에 있어서도 커다란 찬사와 뜨거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성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뒤따르는 경제적인 보상은 역시 신통치가 않았다.
작품 판매가 기대했던 것만큼 순조롭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1971년 조정자는 당시 판매 상황을 다음처럼 기록했다.
대구에서도 반 정도밖에 팔리지 않았다.
구상이 1958년 9월에 발표한 「화가 이중섭 이야기」에 기록해 둔 일화를 보면 그가 자기 작품에 대한 비난 언행을 전시장에서 직접 하고다녔다고 되어 있다.
그는 현재의 자기 작품을 가짜라고 불렀다. 전람회장에서 어쩌다가 빨간 딱지가 붙을 양이면 “잘해, 잘해, 또 한사람 업어 넘겼어-(속였다)” 하고 친구들에게 귓속말로 속삭이고 나서는 상대방에게 가서 아주 정중히 “이거 아직 공부가 다 안 된 것입니다. 앞으로 정말 좋은 작품 만들어 선생이 지금 가지고 가시는 것과 바꿔드리렵니다”, 이런 투로 부도수표(?)를 떼고 자기 현재 작품에 대한 불만과 장래 할 대성에 극도의 초조를 가지고 있다가 그만 꼴딱 가버렸다.
이렇게 자신의 전시장에서 자기 작품을 폄하하고 자신을 사기꾼으로 만드는 자학 행위는 일부러 계획한 것이거나 또는 분열 증세와 같은 이상異常 행위다. 그러니까 구상의 증언대로라면 이중섭은 1955년 4월 중순에 이미 ‘이상 상태’에 빠지고 있었던 것이다.
최태응의 집에서 최태응, 이기련 등과 함께 찍은 사진.
이중섭은 망연자실 상태에 빠져 곧바로 상경하지 않고 대구 인근에 머물렀다.
당시 머물던 칠곡 매천동 최태응의 집은 피곤한 이중섭에게 잠시나마 안식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