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은 은지화를 몇 점이나 제작했던 것일까. 또 지금껏 남아 있는 은지화는 몇 점이나 될까. 최초로 남은 은지화의 수를 언급한 구상은 “은지화 약 300점”이 남아 있다고 했고, 그 후 1986년 호암갤러리 주최 ‘30주기 특별기획 이중섭전’을 취재한 기자 안규철은 출품작 70점과 그 밖에 50여 점까지 모두 120여 점이 있다고 했다. 이 은지화 가운데 대표 작품은 어떤 것일까. 여러 주장이 있겠지만 <도원(桃園)> 연작이야말로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이다.
<도원 01 천도와 영지>
<도원 01 천도와 영지>는 이중섭 회화의 기본 도상이다. 바탕에는 포물선 율동 무늬가 출렁거리고 그 사이에 한 그루 천도(天桃) 복숭아나무 기둥이 수직으로 치솟는다. 또한 온통 잎과 꽃과 열매 천지인 사이사이로 네 명의 아이들이 꿈꾸듯이 넘나들고 있다. 게다가 율동 무늬 곳곳에 버섯처럼 영치초가 자라난다. 신선들의 세계, 천년을 산다는 하늘의 과일 속에 춤추듯 떠 다니는 아이들, 말 그대로 몽유도원이다.
<도원 02 천도와 꽃>
뉴욕 근대미술관 MoMA 소장 은지화인 <도원 02 천도와 꽃>은 <도원 01 천도와 영지>의 세부를 확대한 작품으로 중심과 주변이 없는 그야말로 평등과 평화의 세상이다. 또 하나의 MoMA 소장품 <도원 03 사냥꾼과 비둘기와 꽃>은 화폭 왼쪽의 어린이가 등에 메고 있는 가방이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가방에 사냥한 새 두 마리를 담아둔 채 팔로는 떨어져 내려오는 새를 받아 안고 있다. 그 옆의 어린이는 앉은 자세로 나는 새를 향해 화살을 겨냥하고 있다. 화폭 오른쪽 하단에는 머리카락을 기른 채 커다란 천도복숭아를 두 손으로 들고 있는 이중섭 자신이 젖가슴을 내놓고 누워 있는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의 배 위에 천도복숭아를 얹어주는 장면이다. 누워 있는 아내가 뻗은 다리의 무릎 위에 거대한 꽃이 활짝 피어 있고 그 위로 나비가 모여든다.
<도원 03 사냥꾼과 비둘기와 꽃>
<도원 04 사냥꾼 부부>는 여인과 사냥꾼 설화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젖가슴을 내놓은 채 물고기와 함께 누워 있는 아름다운 여인과 사냥한 새를 담은 가방을 어깨에 멘 채 활시위를 당기며 우뚝 선 남성 사냥꾼 두 사람은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와 화가 자신의 모습이다. 이뿐만 아니라 아이들 세 명이 등장하고 복숭아와 물고기 그리고 새와 꽃이 만발하고 있다. 사냥꾼인 이중섭 머리 바로 위에서 내리쬐는 태양은 아마도 희망을 상징하는 것일 게다.
<도원 04 사냥꾼 부부>
<도원 05 실낙원의 사냥꾼>
<도원 05 실낙원의 사냥꾼>은 온통 천도 복숭아나무가 사라진 빈 터, 다시 말해 실낙원(失樂園) 풍경이다. 두 마리 사슴과 두 마리의 새가 나는 하늘에 둥근 태양이 떠 있는데 복판에 어린이가 팽팽한 긴장감으로 활을 들어 새를 겨냥하고 있다. 또 한 아이는 사슴을 탄 채 태양을 들고 있는데 어머니 야마모토 마사코도 손을 내밀어 태양을 밀어주고 있다. 화폭 왼쪽에는 아내의 엉덩이와 다리를 받친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이중섭 자신을 그려 두었는데 그 아래 사슴이 고개를 한껏 치켜들고서 활 쏘는 아이에게 기운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이 작품을 보면 모든 사물들이 순환하는 고리와 같다.
이렇게 둥글게 이어지는 순환 고리는 인간과 자연의 소통이자 합일의 세계인 것이다. <도원> 연작은 은지화가 가지는 여러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원고 출처: 최열, 《이중섭평전》, 돌베개, 2014)
(원고 출처: 최열, 《이중섭평전》, 돌베개,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