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은 제주도 피난 시절 돈을 벌기 위해 취직한 적은 없다. 작품 창작이 직업이자 그 작품을 판매하면 그것이 곧 수입이었다. 집주인 김순복의 증언에 따르면 이중섭은 아침에 나갔다가 귀가하면 집과 담 사이 한 팔을 벌릴 만한 여유 공간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창작 이외의 노동을 한 기록으로는 가족과 함께 해초나 게를 채취하는 일이 전부였다.
서귀포 시절 그림을 거래한 사례로 양조장 주인 강임용과의 관계가 뚜렷하다. 강임용은 운수업을 하고 있던 1969년에도 네 점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때 도장 가게를 하고 있던 누군가도 한 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이중섭은 이웃 주민들의 요청을 받고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서귀포의 화공이었던 것이다.
조정자는 이중섭의 제주도 시대의 작품 경향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했다. 하나는 ‘동자상童子像을 희화적으로 그린’ 인물화이고, 또 하나는 ‘환상적幻想的인’ 풍경화들이다.1) 이 풍경화 중에서 갈매기를 탄 아이를 포함해 여덟 명의 아이들이 감귤을 따 광주리에 담아 옮기는 <서귀포 풍경 1 실향失鄕의 바다 송頌>은 20세기 미술사에서 지울 수 없는 걸작이다.
이중섭, <서귀포 풍경 1 실향失鄕의 바다 송頌>, 56×92cm, 합판에 유채, 1951년. 구상 소장.
초현실 및 표현파 화풍을 혼합하여 낙원 풍경을 연출한 작품으로 몽환의 세계라고 하지만 어딘지 무척 익숙한 풍경이다. 과수원과 앞바다를 섞어놓아 그런 느낌을 주는데, 갈매기를 타고 바다 위를 나는 어린아이의 모습만 없었다면 그저 바닷가 과수원 풍경이었을 게다. 하지만 새를 타고 나는 어린아이와 과일을 물고 내려오는 새가 있어 환상의 초현실풍 그림으로 바뀌었다. 사실풍의 풍경을 그리면서도 지난날 청년 시절에 구사한 초현실 표현파 화풍을 되살리고 싶었던 것이겠다.
월남 직후 첫 작품을 이처럼 성공리에 완성할 수 있었던 까닭은 감귤로부터 받은 감동이었을 것이다. 물론 제주 감귤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공물제도를 폐지함에 따라 수확이 급격히 줄었고, 또한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온주溫州 감귤을 이식했지만 번성하지 못했으며 게다가 1948년 4․3 항쟁 이래 농사는커녕 고난을 겪어야 했던 탓에 수확은 극히 나쁜 상태였다. 감귤은 제주도가 탐라왕국이었던 시절, 그러니까 한반도에 삼국이 대립하던 때부터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때 일본과 신라에 수출했는데 이중섭이 제주도에서 본 감귤은 아마도 저 온주 감귤이었을 것이다.
이중섭은 이 그림을 양조장을 경영하면서 어선까지 소유한 선주 강임용에게 주었다. 그림값을 어떻게 계산했는지 알 수 없지만 생활비를 지원해주거나 부산 왕래에 도움을 주곤 했으므로 딱히 매매를 한 건 아니다. 강임용은 이 그림을 가지고 있다가 1969년 6월 시인 구상(1919-2004)에게 무상으로 기증했다. 구상이 당시 구자춘(1932-1996) 제주도지사와 친분도 있고 잡지의 특별취재 요청이 있어서 겸사하여 제주 탐방을 할 때 이중섭의 유작을 탐문했다. 공보과장의 도움으로 나무판에 그린 작품 한 점이 도장 가게 주인에게 있고 강임용의 소장품 네 점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공보과장 홍순만에게 그 구매를 의뢰하였더니 도장방은 흥정이 안 되고, 양조장 집에서는 ‘그렇듯 고인이나 지사와 관계가 깊은 분이라면 돈을 받고 팔기보다는 그저 한 점 드리겠다’고 해서 그야말로 염치없이 골라온 것이 바로 이 그림이다.2)
이렇게 얻어 온 작품을 처음 조사한 사람은 조정자였다. 조정자는 이 작품에 <실향의 바다 송>이라는 제목을 붙인 뒤 “1969년 6월 구상이 제주도 서귀포에서 운수업을 하는 강임용으로부터 얻은 그림”이라고 밝히고 다음처럼 묘사했다.
30호 가량에 베니아판을 사용했다. 동화적이며 환상적인 바다 풍경인데 툭 트인 바다와 그 바다에 나무 가지를 드리운 귤감 나무, 그 탐스런 귤감들이 무더기 무더기 떨어져 있는 모래밭, 이것을 광주리에 주워담는 어린이, 귤감을 어깨에 목도를 하고 가는 어린이, 매고 가는 그 귤감 위에 앉아 노는 갈매기와 귤감 나무에 올라탄 어린이, 귤감을 따는 어린이, 모래밭에 누워 있는 어린이, 또 한편 귤감을 입에 물고 나르는 갈매기, 입을 벌려 귤감을 쪼는 갈매기, 학처럼 큰 갈매기를 탄 어린이3)
구상이 처음 이 작품과 마주했을 적엔 “사진으로 보일지는 모르나 그 베니어판이 트고 상해서 그 보존이 언제나 마음에 걸린다”고 할 만큼 나쁜 상태였다. 그 뒤 1976년 효문사판 『이중섭』에서는 그 제목이 <서귀포의 환상>으로 바뀌었다.4) <서귀포의 환상>은 아름답지만 긴장감이나 현장감이 덜한 반면, <실향의 바다 송>은 피난민의 노랫가락이 들려오는 까닭에 훨씬 더 절실한 느낌이고, 또한 푸른 바다가 더욱 간절하여 작품의 소재에 매우 가깝고 주제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중섭 작품 가운데 걸작일 뿐만 아니라 피난민 소재 작품 중 대표작이고, 제주도 서귀포를 상징하는 최고의 작품 <실향의 바다 송>은 눈부시게 슬픈 아름다운 꿈을 담고 있으므로 바다의 노래를 뜻하는 <실향의 바다 송>이란 제목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낫다.
(원고 출처: 최열, 《이중섭평전》, 돌베개,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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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정자, 「이중섭의 생애와 예술」, 홍익대학교 석사 논문, 1971, 44쪽.
2) 구상, 「이중섭 그림 3점」, 『동아일보』, 1983년 8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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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정자, 「이중섭의 생애와 예술」, 홍익대학교 석사 논문, 1971, 44쪽.
2) 구상, 「이중섭 그림 3점」, 『동아일보』, 1983년 8월 16일자.
3) 조정자, 앞의 논문, 45쪽.
4) 이구열, 「바닷가의 아이들」, 『이중섭』, 효문사, 1976.
4) 이구열, 「바닷가의 아이들」, 『이중섭』, 효문사,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