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진주 붉은 소>, 42x30cm, 종이에 유채, 1954년 5월. 진주. 양병식, 박종학 구장. 호암미술관 소장.
이중섭의 경상남도 진주시절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점 들소의 초상화만으로 이중섭의 진주시절은 너무나도 강렬하고 또 진주가 아름다워졌다. 어디 그뿐인가. 이 들소의 표정이 전해주는 전후 진주 이야기는 너무나 서러워서 우리 모두의 가슴을 적셔준다.
이중섭은 <진주 붉은 소>를 박생광에게 그려 주었다. 그 때만 해도 우정의 표시일 뿐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들소의 눈빛은 점차 빛을 뿌려 휘황해져만 갔고 지금은 <진주 붉은 소>는 20세기 가장 빼어난 걸작이 되었다. 그 빼어남은 유사도상과 비교함으로써 더욱 두드러진다. 통영시절의 작품 <통영 붉은 소 1>에 비해 붓질이 훨씬 유연하다. 빠른 속도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 작품을 처음 조사한 조정자는 "마치 재채기라도 할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시원한 탓취(touch*붓질)와 풍부한 색감은 향토적인 정감을 갖게 한다"고 묘사했는데 눈과 입에 듬성듬성 나타나는 푸른색 점들이 마치 이끼 낀 태점(苔點)같은 역할을 하고 있어 생기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므로 '재채기'를 떠올렸던 것이고 또 화폭에 넘치는 붉은 색은 황토(黃土)를 연상시켜주었는데 일제시대 때부터 황토는 향토(鄕土)를 뜻하는 것이었으므로 조정자는 자연스럽게도 향토적인 정감을 느낀 것이었다.
<진주 붉은 소>에서 일품은 눈동자의 흰자위에 찍힌 태점이다. 이 태점은 눈동자를 푸른 빛으로 물들이고 있는데 그 빛은 애수의 광채가 되어 감성을 자극하고 있다. 형언할 수 없는 이 슬픔은 전쟁으로 상처 입은 이들의 것이지만 어디 그뿐이었을까. 피해자가 아니더라도 저 불타버린 촉석루처럼 전 국토를 물들인 전쟁의 비참이며 죽어간 이들을 지켜보아야 했던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붉은 빛으로 타오르는 들소의 눈빛에 어린 저 푸른 슬픔은 아마 화가 이중섭이 부르는 진혼의 노래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들소의 초상이자 화가의 초상이며 또한 전쟁을 겪어야 했던 모든 사람의 초상 바로 그것이었다.
조정자는 1971년 《이중섭의 생애와 예술》에서 "이 작품은 박생광 개인전 때 중섭이 진주에 와서 기념으로 그려 주고 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그런데 1972년 현대화랑 이중섭작품전 때 제작연대를 '통영시절'로 바꿔버려 혼선을 빚기 시작했다. 또 박생광이 소장하고 있던 이 작품은 1971년 조정자가 조사할 때 양병식(梁秉植)의 소장품, 그 다음 해인 1972년 현대화랑 이중섭 작품전 때는 박종한(朴鍾漢) 소장품으로 숨 가쁘게 바뀌고 있어서 더욱 혼란스러워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정자의 조사결과를 변경해야할만한 사유가 없는 한 이 작품은 진주에서 제작해 박생광에게 준 작품이다.
진주에게 이중섭은 잠시 스쳐간 손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손님이 흐르는 바람이 아니었던 까닭은 오직 이 <진주 붉은 소> 때문이었고 그 작품이 20세기 미술사상 가장 특별한 이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중섭이 진주에 간 까닭은 그러니까 오직 이 진주(眞珠)처럼 영롱한 보석, 붉은 소를 남기기 위해서였던 거다.
(원고 출처: 최열, 《이중섭평전》, 돌베개, 2014)
(원고 출처: 최열, 《이중섭평전》, 돌베개,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