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쾌대,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60x70cm, 천에 유채, 1943. 개인소장.
근래 어떤 벗으로부터 이쾌대의 작품세계에 대한 지적을 들었다. 여러 가지 분석을 곁들여 비판하는 내용이었지만 줄이자면 ‘그는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가 아니다’는 점을 말하고 있었다. 그의 지적이 흥미로워 그대로 듣기만 했다. 나는 이쾌대가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일격화가(逸格畫家)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워낙 붓을 휘두르는 솜씨가 빼어난 오지호(吳之湖 1905-1982)는 19세기 이전 수묵화가들 못지 않다. 또 이쾌대와 또래인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의 붓질은 바람처럼 때로는 회오리와도 같아 그 흐름이 시원스러워 무척 통쾌하다. 하지만 이쾌대와 동갑내기인 김환기(金煥基 1913-1974)나 한 해 어린 박수근(朴壽根 1914-1965)의 붓질은 칸을 나누거나 칠하는 기법이어서 흐름이 아닌 화폭 전체의 기운을 감각한다. 그러니까 오지호나 이중섭은 붓으로 그리는 사람이고 김환기나 박수근은 물감으로 그림을 만드는 사람이다.
이쾌대는 그 두가지를 융합했다. 붓으로 그리면서도 물감으로 만들어내는 재주를 다 갖췄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나는 그 어떤 벗에게 맞는 말이라고 하면서 이쾌대는 그림을 만드는 사람이니까 그럴 것이라고 내 의견의 한 자락을 전해주었다. 그처럼 만들어내는 역량과 더불어 이쾌대가 갖추고 있는 구성, 재구성 능력 및 채 운영 능력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아울러 보면 그는 정녕 그림을 만드는데 천부의 재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천부의 재능’ 다시 말해 천재(天才)는 그냥 뚝 떨어진 게 아니었다. 이쾌대가 남긴 숱한 소묘(素描)를 비롯해 저술인 해부학(解剖學)까지를 떠올려 보면 그의 재능은 ‘사람의 노력’으로부터 샘솟아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이 바로 그런 이쾌대의 특징을 한마디로 보여준다. 맥고모자에 두루마기 차림인 이쾌대 자신이 한손엔 조색판(調色板palette), 한손엔 유화붓을 들고서 정면을 형형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다. 인물 뒤쪽 배경은 물동이 이고가는 처녀들이 아름다운 시골 풍경이다. 특히 선명한 진녹색 그러니까 에머랄드 그린(emerald green) 빛깔 두루마기와 눈부시게 맑은 하늘색 그러니까 스카이 블루(sky blue) 빛깔이 푸르른 하늘과 배경화면 하단을 가로지르는 완두콩빛의 옐로우 그린(yellowlsh green) 빛깔이 고운 연두색의 조합은 이쾌대가 이 그림을 어떻게 만들었는가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연구자들은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에 나타난 소재에 주목해서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의 융합 그리고 공간 운용능력에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또 어떤 연구자는 이 작품의 제작 시기를 1948년 무렵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남북 대립이 극심하던 시절, 자기 정체성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라는 사실에 착안한 짐작이었을 것이다. 1948년이라면 남북간 대립이라는 장애물에 마주하긴 했어도 여전히 새로운 조국 건설의 열망이 뜨겁던 시절이었다. 그런 까닭에 서구 근대문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는 이 그림은 그러나 온통 그렇게 거창한 민족이나 전통 그리고 정체성만을 염두에 둔 작품은 아니었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나는 조선의 화가다’라는 말이 들려온다. 그만큼 자의식이 강렬한 사람이자 화가로서의 자부심이 뚜렷한 인물이라는 뜻이이다. 실제로 이쾌대는 1941년 6월 한 좌담에서 “자기의 신념을 확실히 소유한 사람은 그렇게 쉽게 대가를 추종하거나 모방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히 말하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1943년에 그린 <벽화를 배경으로 한 부인도>를 나란히 옆에 세워두고 보면 두 작품이 서로 마주보는 짝이라는 느낌이 아주 강렬하다. 심지어 두 작품의 크기도 완연 같고 또 인물을 중심에 크게 배치한 사실이라든지 배경을 벽화라든지 시골과 같은 아득한 분위기로 채웠다는 사실도 눈에 크게 들어온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보면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은 <벽화를 배경으로 한 부인도>와 같은 때인 1943년에 제작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훨씬 설득력있다.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쾌대전 때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의 제작 시기를 특정하지 않은채 1940년대라고 폭넓게 쓴 이유도 저와 같은 논란을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 작품이 대동아전쟁에 처한 자신의 운명을 성찰하는 바의 ‘조선인 정체성 추구’의 결과물이기도 하고 또 남성과 여성이 나란히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바탕삼아 서로 사랑해마지 않는 부부상임을 천명하고 있으므로 1943년이라는 대동아전쟁 시절의 식민지 남녀의 초상이자 끝없이 사랑하는 두 남녀의 사랑을 표상하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두 작품을 볼 적마다 화가 이쾌대가 아름다운 여인 유갑봉을 연모해 마지않는 사모곡(思慕曲)이 들려오는 착각에 빠진다. 그리고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은 사랑의 소야곡(小夜曲)을 부르는 이쾌대 자신의 초상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쾌대는 부인에게 다음처럼 간절히 사랑을 구해마지 않았다.
“책상 위에 놓인 시계는 나의 고막을 울립니다.
애끊는 듯한 달빛은 저의 마음을 한껏 섭섭하게 하여줄 뿐입니다.
당신은 지금 효자동에 계시는 것 같습니다. 참말로 가셨나요?
저의 머리는 흐릿하여지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은 오늘 새벽에 가셨지요. 강화로! 그렇습닏.
당신은 저를 이 쓸쓸한 곳에 남겨두고 갔습니다.
두 눈 사이에서 무엇이 기어 나오는 것 같은 것이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목이 메이는 것 같습니다---
들창문 밖에서는 소낙비 오는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겠습니다.
당신은 지금 고요히 잠들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굶주렸던 어머님 품속에서.
잘 가셨습니다. 그곳에 계시면 당신의 몸이 좀 더 편하고 힘든 일도 안하실 테지요.
벌레 많은 이곳을 잘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당신을 놓쳐 보낸 것이 한이 되고, 섭섭한 마음 말로 다 못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는 무엇 하나 한 일 없이 그대로 지나버렸습니다.
어제 나는 당신에게 ‘나는 내일 한강에 배 타러 가겠다’고 그랬거늘
그러나 당신을 떠나보내고 나혼자 가기에는 너무나 적막하고 쓸쓸하였습니다.
좋아하는 야구도 그만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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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또 다시 몇 번이나 뉘우쳐 생각되는 것은 달 맑던 어제 저녁에 효자동 종점에서 훌훌 당신을 떠나온 것이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리고 유감입니다---
정거장까지 나갔었더라면 좀 더 좋았을 것 아닙니까?
저는 어제 저녁 오해를 하였던 것입니다. 용서하십시오.
제가 너무나 세상과 접촉한 적이 적기 때문입니다.
오! 00이여, 내 사랑이여!
당신은 기어코 갔습니다 그려. 속히 오십시오.
달님이 구름 사이로 사라지며 어두운 천지에 소나기가 내려 붓습니다.
이만, 당신의 사진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가볍게 키스를 했습니다.
사랑하는 이(李)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