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열(미술평론가)
이쾌대 <부인> 60x70cm 천에 유채 1948년 개인소장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반 이쾌대(李快大 1913-1965)는 20살 때인 1932년 11월5일 진명여고를 갓 졸업한 유갑봉(劉甲鳳 1914-1980)과 인사동 중앙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 해 봄 아니면 그 앞 해 어느 날 이쾌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만났다. 진명여고 학생 유갑봉으로 한 눈에 확 끌려버리고 말았다. 이쾌대는 타오르는 정염의 불꽃을 어쩔 줄 모른 채 한 통의 편지를 썼다.
오!
어여쁜 아가씨여.
오!
나의 귀여운 천사여!
나는 지금 안타까움을 이기지 못하여서
오직 책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서 무아몽중(無我夢中)에 섰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귀동녀(貴童女)여!
당신은 왜 그다지 나의 마음을 끕니까.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향기가 솟아나며
하늘나라 어린애들이 우리 두 사람
머리 위에서 날면서 행복의 씨를
뿌려주는 것 같습니다.
오! 갑봉씨!
나는 몸부림 날 만큼 당신이 안타까워요.
영원토록 나의 품에 고요히 안고 지내고
싶어요.
당신의 그 따스한 몸에 나의 살이 닿을 때마다
이상하고 야릇한 정취가 무궁한
이 우주 사이에 오직 우리만을 싸고 도는 것
같습니다.
오! 내 사랑이여.
이 세상 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해낼 적에
어느 해 며칠 유 씨 따님과 이 씨 아드님이
서로 만나서 그날부터 그 두 사람의 사이에
온전하고 행운한 사랑이 움터서 평생토록
향락(享樂)하게 살라는 것을 미래의
두 젊은이들에게 약속하셨나 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중에 그 두 남녀의
이름을 갑봉이라 하고 쾌대라고 명명하셨더랍니다.
오! 우리 두 사람은 가장 행복하고 가장
도적 없는 꿋꿋한 사랑을 가진
소유자입니다.
아침에 내가 당신을 떠나올 때 나는 한 없이
괴로움을 느꼈습니다. 그곳이 사람 사는
집이 아니었고 거칠고 끝없는 넓은
들이었더라면 당신과 나는 참되고
끝없는 꿈을 꾸었을 것입니다. 어린
양(羊)과 같은 당신을 나의 품에 보듬어
안고서
오! 내 사람 내 사랑 참된 나의 사랑!
한 떨기의 장미꽃! 나는 그대 뜰로
배회하는 벌나비올시다. 장미꽃
과 벌나비는 이미 예약된 사이였고 그 두
사이에는 아리따운 사랑이 소곤소곤 속삭이고
있었나 봅니다.
이쾌대
온 몸이 설레이는 연애편지로 한 여인의 마음을 훔칠 수 있었던 이쾌대는 얼마 동안의 가슴 저린 연애를 거쳐 결혼했다. 이 작품 <부인>은 화가가 그린 여성상의 걸작이다. 짧은 머리에 너무도 총명해 보이는 눈동자와 반듯한 콧날, 오무린 입술이 무척 강인해서 화폭을 압도하고 있다. 좌상을 한 몸매는 너무도 단아해서 빈틈이 없는데 봉긋한 가슴과 토실한 두 손이 매력을 발산한다. 특히 치마폭이 시원한 하늘빛이라 상쾌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여인의 배경을 이루는 풍경은 신비롭다. 말과 새가 들판을 나르듯 달리는데 마치 꿈결같다. 더욱 특별한 것은 화면의 평면화에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원근법의 공간감을 최소화하여 깊이를 줄인 것이다. 평면성이 두드러짐에 따라 낡은 느낌이 아니라 신선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이다.
<부인>은 1943년 5월 제3회 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한 작품으로 조선성을 추구한 작품이다. 당시 윤희순은 <신미술가협회전>이라는 비평에서 이쾌대야말로 인물, 의상에서 향토적 제재를 쓰고 있고 또 완연한 고전미를 띤 색조로 향토색을 지표로 삼고 있다고 소개한 다음 이 작품에 대해 다음처럼 썼다.
“이쾌대씨의 <부인도>의 눈시울과 옷주름의 서양식 묘법과 말달리기 등이 동경화단의 이러한 모방성에서 파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장래에 초극될 점이겠는데 이 모방성이 어느 정도 극복될 때에 비로소 이 회(會)의 예술양식이 궤도에 오르게 될 것이리라. 그것은 또한 동시에 유화의 향토화의 양식을 획득하는 날이며, 그 때에 이 회의 집단의식이 선명해질 것이다.”
윤희순은 이 작품을 동경화단 모방이라고 보고 ‘초극(超克)’해야 할 한계라고 했지만 ‘유화의 향토화’ 조짐을 느끼지 않았다면 저런 말을 할 이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또 정현웅은 <신미술가협회전>이란 비평에서 다음처럼 썼다.
“여전히 향토적인 서정의 세계, <부인도>에서 가장 성공하였다. 하나 매너리즘에 떨어져 가는 것 같다. 동양적인 것, 향토적인 것을 의도하는 것 같은데 이러한 의미로 향토색이나 동양을 해석한다면 너무나 간단하고 피상적이다. 이 분의 재능을 사랑하는 데서 나는 충심으로 자중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정현웅도 윤희순과 마찬가지로 한계를 지적하고 있지만 ‘향토적 서정의 세계를 표현한 성공작’이라는 평가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 생각해 보면 유채화를 도입한 이래 이와 같은 몽환의 세계, 향토의 세계가 이토록 자연스러운 현실감을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 까닭에 ‘향토성’ 운운하고 있음에도 낡은 옛이 아닐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작품이 발표된 1943년부터 따지면 무려 82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현대감각을 뿜어내는 것은 대체 무슨 연유에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