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쾌대, <군상4>, 216x177cm, 천에 유채, 1948. 개인소장.
지금 2015년은 해방 70주년이다. 이러한 해를 맞이하여 이쾌대의 <군상>을 마주할 수 있음은 지독한 행복이다.
지금으로부터 다섯 해 전인 2010년은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다. 부끄러워서였을까, 미술계는 고요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조차 했다. 누구도 1910년 8월을 기억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다섯 해가 지난 올 해 2015년 8월도 고요하긴 마찬가지지만 다행히도 이쾌대의 <군상>이 나왔다. 미술동네에서 해방 70주년을 돌이킬 수 있게 해 주는 단 하나의 사건으로서 말이다.
<군상>의 제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미군폭격기에 의한 독도폭격사건이라는 게 꽤 유력하다. 독도폭격사건은 무엇인가. 1948년 6월 8일 오전 12시, 벌건 대낮에 미군 폭격기 B29가 독도 일대를 폭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실로 이 폭격사건이 가져다 주는 공포심은 비할 데 없는 것이었다. B29기는 몇 해 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폭격기로 당시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두려움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마침 이번 폭격기도 미극동항공사령부 오키나와 기지에서 출격한 폭격기였다.
이 놀랍고 야만스러운 사건에 당면하여 <<동아일보>>는 “몰살된 14명의 동포의 혼령과 함께 정의와 인도에 어긋난 그 무책임한 살인 결과에 더욱 애달프고 쓰라린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하면서 “미극동항공사령부로서도 삼천만 동포 앞에 충심의 사과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요구하였으며 <<경향신문>>은 “어느 나라 비행기를 물론하고 이런 불법적이고 비인도적인 행동을 한 비행기는 용서없이 적발하여 극형에 처하지 않으면 조선민족의 분격은 둘째로 하고 세계여론이 이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당시 미국 유력언론 <<뉴욕타임스>>는 “미국은 참변사건에 대하여 배상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책임자 처벌이나 사과 보다는 그저 배상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던 듯 하다. 통치의 권력을 누리는 세력의 마음은 그런 것인 모양이다. 그 뒤 사건은 책임자 처벌은커녕 사과조차 없이 그저 유야무야 끝나고 말았다. 점령군으로 들어 온 미군정 체제 아래였으니까 흐지부지 끝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정치, 사회, 군사 그 어느 쪽에서도 미군정을 압박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끝났던 것인데 문화 쪽에서는 달랐다. 그 해 11월 미술문화협회전람회가 열렸다. 이 전람회에 이쾌대는 150호 크기의 대작 <조난(遭難)>을 출품했다. 박고석은 <<경향신문>> 11월 24일자 <미술문화협회전을 보고>에서 다음처럼 썼다.
“이쾌대씨의 <조난>(150호)의 의욕적인 노력은 크고 문제작이다. 어느 시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무엇을 어떻게 그리느냐는 문제는 공통과제인데 8.15이후 비단 조선만이 아니겠지만은 현대 작가들의 조념성(操念性)은 무엇을 그리느냐에 치중하는 경향이 많은 것은 신중히 생각하야할 문제다. 독도사건의 약소민족의 비애를 민족적인 충동에서 관심한 <조난>은 이 작가의 시대적인 감수성을 이야기 하지만 관념적인 감동에 그치어 버리어 안일한 과거의 수법을 답습하였을 뿐 새로운 아무런 추궁도 없는 것은 평범하다. 바꾸어 말하면 의욕적인 구성과 인물의 아름다운 포즈는 크게 살 수 있으나 애매한(조상 없는) 인물이라든가 바우에나 피부의 물질감의 등한한 취급은 치명상이다.”
비록 박고석의 이 글이 이쾌대를 비판한 것이긴 해도 알 수 있는 것은 이쾌대가 독도폭격사건을 소재로 삼은 150호의 대작을 그려 출품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비판자인 박고석이 보기에도 ‘약소민족의 비애를 민족적인 충동에서 관심한 작품이요, 시대적인 감수성을 갖추었고, 또한 의욕적인 구성과 인물의 아름다운 포즈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는 게 중요하다.
물론 박고석의 비판처럼 ‘조상 없는 인물 다시 말해 외국인처럼 보이는 인물상이라든지 또는 관념적 감동에 그친다’는 한계도 있겠지만 화가가 동시대 사건을 이처럼 대작으로 형상화하여 발표한 사례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 독도폭격사건도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그 사건을 화가가 엄청난 규모로 그려 발표하는 일 또한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번 덕수궁의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전’에 나온 <군상4>가 저 미술문화협회전에 나온 <조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군상4>의 상단에 대형 폭발이 일어나는 모습은 B29의 폭격을 연상케 할만큼 거대해 보인다. 하지만 폭발 바로 아래쪽 화면의 오른쪽에 돌멩이를 들어 누군가를 찍어내리는 장면을 생각하면 이 작품은 독도폭격사건의 비극만을 그린 작품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을 것 같다. 저 아비규환의 지옥은 폭격사건이 일어난 독도 일대만이 아니라 오히려 서울 바로 그 한 복판이었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 당한데 이어 12월에는 장덕수가 암살 당했다. 해가 바뀌고 1948년 2월부터는 전국 총파업과 남한 단독선거 실시를 거부하는 남북연석회의 개최 그리고 4월 제주도에서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이른바 4.3항쟁 발발, 6월 미군 독도폭격사건, 8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같은 일련의 사태는 그야말로 전율의 대서사극이었다. <군상4>는 그러니까 1948년을 그린 한편의 풍속도였던 게다.
그리고 이 작품은 몇 해 뒤에 다가 올 6.25전쟁의 예언서다. 화가는 수천 년 역사상 한반도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감했던 것일까.
(*지금 이 작품 <군상4>는 덕수궁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