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은근히 남몰래 찾는 그림 중 하나 춘화(春畵)이다. 봄을 그린 그림이라는 말은 남 들으라고 하는 말이고 실은 전통 시대의 포르노그라피이다. 대놓고 얘기할 수없어어 둘러말했을 뿐인데 일본에서는 웃기는 그림, 즉 소회(笑繪)라고도 불렀다. 하기야 일본의 그것은 지나치게 과장돼있어 웃음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천성으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대부분 머릿속에 떠오르는 무엇인가를 바로 손으로 그려낼 수 있다. 심수상응(心手相應)의 경지이다. 이런 정도면 주위 요청에 따라 봄그림-춘화-은 얼마든지 그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손의 명수인 화가가 그렇다면 시인은 어떤가. 재주 있는 시인, 문장가라면 머릿속에, 가슴속에 떠오른 생각이나 이미지를 얼마든지 문자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들 역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춘시(春詩)’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글은 제아무리 조선후기라 해도 문집에는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전하는 바가 극히 적다. 하지만 유흥의 현장에서 노래로 불린 시조창에는 의외로 이런 흐드러진 내용이 보인다. 1790년에서 1800년 사이에 필사된 것으로 전하는 『병와가곡집』에 이런 시가 수록돼있다.
드립더 ᄇᆞ드득 안으니 셰허리지 ᄌᆞ늑ᄌᆞ늑
紅裳을 거두치니 雪膚之豐肥ᄒᆞ고
擧脚 蹲坐ᄒᆞ니 半開ᄒᆞᆫ 紅牧丹이 發郁於春風이로도.
進進코 又退退ᄒᆞ니 茂林山中에 春水聲인가 ᄒᆞ노라. (김용찬 『교주 병와가곡집』에서)
번역하기에 민망한 부분이 많아 그냥 감상할 수밖에 없다. 조선후기의 화가 신윤복(申潤福 약 1758-1813이후)가 살았던 시대는 한마디로 이런 문화가 살아 숨쉬던 시절이었다. 어디가나 술과 음악이 있는 질펀한 유흥 자리가 열렸고 또 그런 곳에서는 이런 노래가 서슴없이 불렸다.
신윤복은 이런 시대를 배경으로 풍속화로 이름을 날렸으나 산수와 화조에도 매우 능했다. 그는 원래 조선초 명문이었던 신말주 집안의 11대 후손이다. 하지만 중간에 서출로 갈라지면서 증조부 때부터 이미 화원 집안으로 굳어졌다. 그래서 그 역시 도화서 화원이었다. 나이로 보면 김홍도보다 조금 뒤진 세대이다. 그는 부친과 나란히 도화서 화원이 김홍도의 훈도로 그의 화풍을 많이 따랐다. 또 타고난 솜씨가 있어 여인 그림에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그런 그는 산수화, 화조화를 그리는 한편으로 풍속화도 그렸고 한 발 더나아가 주위의 청에 못이기는 척 춘화도 그렸을 수 있다. 추측컨대 이 춘화가 암행 단속에 걸려 파직을 당해 훗날 춘화도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일화가 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파직은 당시 정책 변화에 따른 시범 케이스에 걸린 희생양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군주는 문예 군주로 유명한 정조. 그는 더없이 박식했고 지적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문화정책을 스스로 리드했다. 당시 사회는 경제 발전과 더불어 급속히 세속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또 중국에서 문인취향의 문화 외에 시민 사회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세속(世俗)문화도 대량으로 유입되는 중이었다.
그는 군주로서 여기에 브레이크를 건 것이었다.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 불린 문예상의 보수 정책을 내걸고 문인들의 글 가운데 시민 사회적 내용과 형식을 걷어냈다. 그리고 그림에서도 자비대령화원 제도를 만들고 직접 그림을 품평함으로서 정책의 일관성을 추진했다.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시도한 참신한 문장 역시 배척 대상이 됐다. 아울러 유행하는 소설들도 정책적으로 금했다. 그림에서도 일반적인 풍속이나 사가(士家)의 풍속은 용인됐으나 남녀상열지사를 노골적으로 그린 것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이런 사정에 견주면 신윤복이 춘화로 인해 화를 당한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기량은 그것만이 아니고 스승 김홍도가 시의도의 대가였던 것처럼 시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시를 가지고 산수화를 그린 것부터 소개하면 이런 것이 있다.
신윤복 <계명곡암(溪鳴谷暗)> 지본담채 59.4x47.7cm 간송미술관
간송미술관 소장의 <계명곡암(溪鳴谷暗)>은 준법 대신 선염을 많이 활용했다.(붓 대신 먹을 잘 썼다는 말이다) 그래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밝고 산뜻한 분위기를 먼저 느끼게 해준다. 풍속화가였기 때문에 이렇게 명징하게 보이는 산수도 가능했을 것이란 해석도 해볼 수 있다. 그림 속 산수는 깊고 높은 산에 둘러싸인 산골 집이 초점의 하나이다. 계곡가로 이어지는 길 한쪽에는 높은 벼랑이 있다. 여기도 준법은 될 수 있는 대로 줄이고 담묵을 많이 써 칙칙한 느낌이 전혀 없다.
큰 나무로 둘러싸인 집은 단원이 즐겨 그리던 단원풍의 집처럼 보이는데 그 안에 선비 한 사람이 앉아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이 사람은 나무다리가 걸쳐진 개울가의 언덕에 비스듬히 기대 누운 모습이다. 집속 인물 그리고 어떤 뜻이 있어 보이는 두 번째 인물로 인해 그림은 무언가의 장면을 그린 것처럼도 보인다.
그림 위쪽에는 예의 시구가 적혀 있고 혜원(蕙園)이라는 낙관이 있다. 시구는 ‘계명풍박수 곡암우연산(溪鳴風薄水 谷暗雨連山)’이다. ‘계곡물 소리 내고 바람은 물위를 지나가며, 골짜기 어두운데 비가 산에 걸쳐있다’의 뜻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시는 금나라 때의 시인 마혁(麻革 생몰년 미상)의 시 「낙수를 건너며(渡洛)」의 한 구절이다.
泉石經行久 林丘弭望間 천석경행구 임구미망간
溪鳴風蕩水 谷暗雨含山 계명풍탕수 곡암우함산
淡淡輕鷗沒 飛飛倦鳥還 담담경구몰 비비권조환
世緣良自苦 空羨野雲閑 세연양자고 공선야운한
샘물이며 바위는 발길 닿은 지 오래고,
숲이며 언덕은 눈앞에 선하다.
바람이 물을 쳐 시냇물 울어대고,
비가 산을 머금어 골짜기 어둡다.
사뿐히 나는 갈매기 조용히 사라지고,
나른한 새는 나래 접어 돌아온다.
세상 인연이 참으로 고달파,
들판의 한적한 구름이 그저 부럽다. (번역: 김규선 선문대 교수)
원시의 내용은 자연 속에 하나기 되어 사는 중국 문인의 심회를 읊은 것이다. 그런데 이와 대조하면 혜원의 시구는 ‘탕(湯)’ 자가 ‘박(薄)’으로 바뀌고 ‘함(含)’이 ‘연(連)’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자구가 바꾸는 일은 단원에게 자주 있었는데 혜원에게도 그대로 이어진 듯하다. 실은 혜원 시의도는 이처럼 고의인지 우연인지 알 수 없지만 시구를 자기 나름대로 바꿔 적어 넣은 것이 많은 게 특징이기도 하다. 고의라고 하면 당연히 연구 대상감이다.
이 <계명곡암>은 그의 산수화 솜씨를 말해주는 것이고 혜원하면 떠오르는 그림은 달리 있다. 바로 풍속화다. 그중에서 유명한 것이 간송미술관 소장의 《혜원 전신첩》이다. 춘화가 아닌 공개된 혜원 그림 가운데 야(野)하다고 할 수 있는 그림도 이 화첩에 들어있다. 활을 든 한량이 빨래터 풍경을 훔쳐보며 통과하는 <계변가화>는 약과이며 까까머리의 사미승 둘이 바위틈에 몸을 감추고, 웃통을 훌러덩 벗어부친 채 거창(?)하게 머리를 감는 여인네를 훔쳐보는 <단오풍정>은 급다 한 수 위다.
신윤복 <삼추가연(三秋佳緣)> (혜원전신첩 중에서) 지본담채 28.2x35.6cm 간송미술관
이 화첩에서 가장 급수가 높은 그림을 꼽으면 <삼추가연(三秋佳緣)>을 거론하게 된다. 그림부터 보면 이렇다. 등장인물은 노파 한 사람과 상투차림의 젊은 남정네 그리고 길게 머리를 딴 처녀 등 세 사람이다. 자세히 보면 노파는 처녀를 보고 뭐라고 하는 듯한 데 입을 가리고 있어 궁금하기 짝이 없다. 이러면서 다른 손으로는 술잔을 들어 남정네에 받치고 있다. 이 남정네가 문제이다. 웃통을 훌러덩 벗은 모습이다. 또 얼굴은 처녀를 바라보면서 바짓가랑이의 대님을 매고 있다. 벗었던 바지를 다시 입는 순간인 것이다. 이들 세 사람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세 사람 옆에는 노랗고 빨간 국화가 훌쩍 큰 키를 자랑하면서 화사하게 피어있을 뿐이다. 오른쪽에 잔뜩 적힌 한시가 혹시 ‘들입다 안아주면 빠득득’ 어쩌고 하는 시였더면 ‘옳다구나’하고 무릎을 칠 것이다. 하지만 시는 고상하게 이렇다.
秋叢繞舍″陶家 추총요사사도가
遍繞籬邊日漸斜 편요리변일점사
不是花中偏愛菊 불시화중편애국
此花開盡更無花 似 차화개진갱무화 사
도연명 집 같이 가을 국화송이 둘러선 집
해는 담장 옆 빼곡한 국화 위에 기우네
이 꽃만 편애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꽃이 지고나면 이 가을 또 무슨 꽃이 있으리
첫 행에 舍자 옆에 ″라는 부호를 넣은 것을 글자를 하나 빼먹고 쓴 것을 나중에 알았다는 표시이다. 마지막에 似자를 써 넣은 것은 해당 글자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렇고 이 시는 중당(中唐)을 대표하는 원진(元稹 779-883)의 「국화(菊花)」이다. 그는 절친한 친구 백거이와 함께 원백(元白)이라고 함께 불리면서 가볍고 경쾌한 일상적 감각을 잘 다뤄 송나라때 들어 경박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 시인이다. 그의 시는 당나라 제일의 경쾌한 푸트워크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의 내용도 실제 그렇다. 담장 밑에 빼곡이 꽃을 피운 국화 위로 해가 지듯이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아, 이 꽃이 지고나면 이제 가을도 갈 것이 아닌가’ 하는 계절의 우수를 가볍고 상큼하게 노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 국화와 반쯤 벌거벗은 세 사람과 무슨 인연이 있으리오’ 할 것이다. 담장은 보이지 않지만 제법 무리를 이룬 국화도 그려져 있으니. 하지만 ‘이 꽃 지고나면 또 무슨 꽃이 피리요’한 내용을 둘러 메쳐보면 그림과 딱 들어맞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댕기머리인 처녀와 젊은 남정네 그리고 늙어빠진 노파는 16세기 서양미술 속에 보이는 사랑과 질투와 시간의 우의(寓意)라도 보는 듯하다. 이쯤 되면 고수 중의 고수의 시구 활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대의 분위기는 염정(艶情)이나 남녀상열지사에 대해 애써 모르는 척했다. 그게 정조의 문예정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상한 신분의 감상자들은 원진의 ‘국화’시를 다테마에(建前)로 세미 포르노의 혼네(本音)를 즐겼다고 말할 수 있다. 신윤복에게는 마땅히 당시 사회에 걸쳐있던 겉과 속, 안과 밖을 적당히 주무를 수 있는 기량이 있었던 것이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