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송혜교가 너무 예쁘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디가 예쁜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사람도 있다. 개인차도 큰데 시대에 따른 갭은 얼마나 클까.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없는 이 조선시대 미인도는 1982년에서야 알려졌다.
필자미상, <미인도>, 18~19세기, 종이에 채색, 117.0×49.0cm, 녹우당 소장
윤선도의 후손이 조상님들이 남겨 준 많은 전적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으로, 녹우당 소장 다른 그림들에 비해서도 대외 전시가 드물다. 1989년 한 차례 도난당했다가 다행히 절도범이 붙잡혀 찾아왔고, 1998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한국관 개관 때, 2014년~2015년 국립광주박물관 공재 윤두서 전시 등 몇 번을 제외하면 직관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가느다란 눈썹과 긴 눈매, 붉게 칠한 조그만 입술, 단정한 코의 얼굴은 어떤 표정인지 오묘하다. 머리에 얹은 커다란 가체(加髢)를 양 손을 들어 받치고 서 있다. 반가 부녀자들이 입는 것이라고 하는 자주색 선을 댄 삼회장 저고리에 옥색치마를 입고 있지만 성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모티브가 다분히 많아 기녀일 가능성이 많다. 저고리가 짧아 겨드랑이가 보일 정도인데다가 진한 붉은색의 안고름이 있어서 그쪽으로 시선을 가게 만들었다. 소매통이 좁고 길어 어깨와 팔의 윤곽이 드러나고 슬림핏에 섶과 동정이 좁아 상체가 가녀리게 보이는 반면 치마는 풍성해서 대비를 이룬다. 전체적으로 곡선의 실루엣이 강조되어서 여성의 몸을 상상하게 만든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관능적 형태의 저고리가 조선 후기 유행을 하면서 당시 남성 유학자들은 개탄을 금치 못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녀는 물론 양반가 부녀자들에게도 이런 유행이 널리 퍼지게 됐다.
조선시대 미인의 기준, 하면 떠오르는 것은 유명한 간송 소장, 신윤복(1758~1814?)의 <미인도> 속 미인. 그 <미인도>도 세상에 공개된 것이 생각보다 늦어서, 1957년에서야 처음 알려졌다.(그 이전의 기록이 없다) 간송 전형필이 구입한 유명한 풍속도가 담긴 혜원전신첩의 경우는 그 입수 과정이 잘 전해지고 있는데 <미인도>는 그렇지 않다. 해외 국보전에 등장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국보가 아니며, 보물로 지정된 것도 2018년의 일이다. 미인도라는 화목의 특수성이라고 해야 할지.
조선시대 미인의 기준, 하면 떠오르는 것은 유명한 간송 소장, 신윤복(1758~1814?)의 <미인도> 속 미인. 그 <미인도>도 세상에 공개된 것이 생각보다 늦어서, 1957년에서야 처음 알려졌다.(그 이전의 기록이 없다) 간송 전형필이 구입한 유명한 풍속도가 담긴 혜원전신첩의 경우는 그 입수 과정이 잘 전해지고 있는데 <미인도>는 그렇지 않다. 해외 국보전에 등장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국보가 아니며, 보물로 지정된 것도 2018년의 일이다. 미인도라는 화목의 특수성이라고 해야 할지.
유명한 신윤복의 <미인도>(간송 소장) 부분
녹우당 미인도는 누가 그렸을까. 녹우당의 후손들은 공재 윤두서(1668~1715)의 손자인 청고 윤용(1708~1740)이 그린 것으로 추측했었다. 윤용이 쓴 『청고실기靑皐實記』에 ‘미인도를 그렸다’는 기록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이 미인도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저고리의 형태나 초상화의 화풍을 본다면 윤두서나 윤용 시대의 것이라기보다는 더 뒤, 신윤복 이후 18세기 말 이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윤두서의 아들 윤덕희(1685-1766)나 윤용의 풍속도 속 여인들, 윤덕희가 윤용에게 그려준 <마상미인도> 등을 보면 그 집안에서 여인의 모습을 다양한 형식으로 그렸던 것은 짐작할 수 있지만, 이런 관능적 미인도는 어떤 식으로 그리고 전해진 것인지 알 수 없다.
여러 문헌에 사대부들이 미인도를 대했던 기록이 전하고 있으며 감계의 목적으로 삼는다는 식으로 쓰기도 했다. 허나 그들이 이러한 미인도를 은밀히 감상하고 수장하면서 즐기는 이중적인 태도를 지녔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된다. 당시의 분위기상 대놓고 제작이나 유통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신윤복의 <미인도> 속 여인도 언뜻 보기에는 단정하고 참한 듯하지만 막 옷고름을 푸는 듯한 은밀한 제스처가 있기에,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관능성을 느낄 수 있었다. 풍속도도 아니고 초상화도 아닌 그 그림을, 적어도 명작으로 꼽을 만큼 대접받는 종류라고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윤덕희 <마상미인도> 1736, 종이에 채색, 84.5x70.0cm, 국립중앙박물관
'병진년 여름 둘째아들 윤용에게 그려주다'라고 써 있다.
여러 문헌에 사대부들이 미인도를 대했던 기록이 전하고 있으며 감계의 목적으로 삼는다는 식으로 쓰기도 했다. 허나 그들이 이러한 미인도를 은밀히 감상하고 수장하면서 즐기는 이중적인 태도를 지녔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된다. 당시의 분위기상 대놓고 제작이나 유통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신윤복의 <미인도> 속 여인도 언뜻 보기에는 단정하고 참한 듯하지만 막 옷고름을 푸는 듯한 은밀한 제스처가 있기에,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관능성을 느낄 수 있었다. 풍속도도 아니고 초상화도 아닌 그 그림을, 적어도 명작으로 꼽을 만큼 대접받는 종류라고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