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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두량 부자의 춘하추동 경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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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량, 김덕하 <춘하도리원호흥경도> 1744년 비단에 수묵담채 8.4x184.0cm 국립중앙박물관








<춘하도리원호흥경도> 부분

 






김두량, 김덕하 <추동전원행렵승회도〉부분,  1744년 비단에 수묵담채 7.2x182.9㎝ 국립중앙박물관 


세로 8cm 남짓에 가로 180cm가 넘는 좁고 긴 두루마리 그림 두 폭. 그려진 인물의 크기는 1cm 남짓. 가까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넓은 세상의 경치가 보인다. 꽃 피는 봄을 즐기는 사람들, 뱃사공, 추수와 타작, 사냥, 길쌈, 변화하는 자연 속에서 술이나 차를 즐기거나 글을 읽거나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옷차림과 가구 등은 중국식 모습을 많이 보이고, 크게 강조되지는 않았지만 여름에 밭매는 농부, 가을에 도리깨로 타작하기, 겨울에 집안에서 길쌈하기 등은 명확히 <패문재경직도佩文齋耕織圖>를 수용해 많이 제작되던 농사일 감계 및 풍속화 장르인 경직도와 닮았다. 조선의 산수화를 닮은 부분, 풍속화를 닮은 부분이 절묘하게 섞여 있고, 섬세하면서도 약하지 않은 필묵으로 배경의 자연과 사람이 담채로 잘 어우러지게 구도를 신경썼다. 


두 그림의 제발문. 위는 춘하, 아래는 추동.


네 계절과 그 속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의미로 <사계풍속도>로 통칭되기도 하는데, 봄과 여름을 그린 것은 <춘하도리원호흥경도春夏桃梨園豪興景圖>, 가을과 겨울을 그린 것은 <추동전원행렵승회도秋冬田園行獵勝會圖>라고 제발문에서 가져온 제목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봄여름에는 도리원의 경치를 즐기고 가을과 겨울에는 전원에서 사냥모임을 한다는 것이다. 그림의 내용은 경직도에 가까운데, 제목은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701~762)의 술자리 정취다.

첫 번째 그림의 화제는 다음과 같다.  

春夏桃李園豪興景 旹甲子春正月吉日 日寧軒書 金斗樑圖本
춘하도리원호흥경 시갑자춘정월길일 일영헌서 김두량도본
봄여름 도리원의 멋진 풍경을, 갑자년(1744년) 봄 1월 좋은 날에 일영헌이 글씨를 쓰고 김두량이 밑그림을 그렸다

영조가 본인을 일영헌이라고 칭한 기록이 발견된 바는 아직 없다. 그러나 일영헌을 영조로 보는 주장에 반론을 가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다. 이 그림이 임금의 사적인 요청에 의해 그려졌다고 보는 것에 반박할 만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필적은 영조의 것이 맞을까? 남아 있는 영조어필과 비교해 보면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화제에 있는 ‘춘’ ‘도리원’의 레퍼런스는 이백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로 이백이 봄밤에 형제들과 복숭아꽃 오얏꽃 꽃 피는 정원(도리원)에 모여 잔치를 벌인 장면과 느낌을 읊은 것이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이 달과 꽃이 어우러진 봄밤에 술을 마시며 시와 부를 지었는데, 이때 지은 글들을 책으로 묶으면서 이백이 적은 서문이다. 

春夜宴桃李園序  봄날 밤 도리원 연회에서 지은 시문의 서 - 이백(李白)

夫天地者萬物之逆旅 光陰者百代之過客
무릇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고 광음 같은 세월은 백대를 지나가는 나그네다
而浮生若夢 爲歡幾何
그러나 부평초처럼 뜬 삶은 꿈과 같으니, 기뻐할 수 있는 시기가 어느 때까지 될까?
古人秉燭夜遊, 良有以也.
옛 사람이 초를 잡고 밤에 노닐었던 것은 진실로 이유가 있다.
況陽春召我以煙景,
더욱이 봄볕이 나에게 아지랑이 낀 날씨로 불러주었고
大塊假我以文章,
천지가 나에게 문장을 쓸 수 있는 재주를 빌려주었으니,
會桃李之芳園, 序天倫之樂事.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한 동산에 모여, 천륜의 즐거운 일을 서술하도록 하자.
群季俊秀, 皆爲惠連,
많은 후배들은 준수하여 문장 실력이 뛰어난 혜련이 될 만하지만
吾人詠歌, 獨慚康樂. 
내가 읊어 노래한 것은 홀로 당락(혜련의 형)에 부끄럽기만 하다.
幽賞未已, 高談轉淸
그윽한 감상은 그치질 않고 고상한 담론은 시간이 흐를수록 맑아
開瓊筵以坐花
시회는 꽃이 피는 곳에 앉도록 하여
飛羽觴而醉月
새의 깃털 같은 잔을 주고받으며 달밤에 취한다.
不有佳作 何伸雅懷
아름다운 작품이 지어지지 않으면 어찌 우아한 회포를 펴겠는가?
如詩不成 罰依金谷酒數
시가 완성되지 않는다면, 금곡(진나라 석숭의 동산)에서와 같은 수의 술을 벌칙으로 내리리라.*

(*잔치를 베풀어 詩賦를 짓지 못한 이에게 벌주 세 말을 먹인 일을 가리킴)

우리나라에서 사서삼경 말고 가장 많이 읽혔다는 『고문진보』에 실려 있었으니 ‘도리원’이라는 명칭은 일반명사화된 시상이다. 

두 번째 그림의 화제는 다음과 같다. 

秋冬田園行獵勝會 歲仝甲年正春 仝書延慶堂內 金德夏 圖采 
추동전원행렵승회 세동갑년정춘 동서연경당내 김덕하 도채 
가을 겨울에 들녘에서 사냥하는 즐거운 모임 해는 같은 갑자년, 봄 정월에 연경당(延慶堂) 안에서 함께 쓰다. 김덕하(金德夏)가 색을 칠하다.

앞에서 영조가 이 화제를 썼다고 한 것이 맞다면 이 연경당延慶堂도 궁 안에 있는 건물일 것이다. 현재 궁궐 안에 연경당이 남아 있을까? 현재 창덕궁에 있는 연경당은 한자로 演慶堂이라고 표기하는데 1820년 이후 등장하는 것으로 영조 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건물이다.

1744년 (영조 20년) 봄 정월에 발문을 썼다고 했을 당시 창경궁 안 양화당(현재 있음) 동남쪽에 연경당延慶堂이라는 건물이 있었다. 현재는 존재하지 않지만 1652년 수리도감에도 나오고, 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에도 등장한다. 즉, 김두량, 김덕하 부자의 그림에 쓴 제발에 나온 ‘延慶堂’은 창경궁 양화당 동남쪽, 연희당 남쪽에 있었던 건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간간히 창경궁 연경당을 ‘演慶堂’으로 잘못 표기한 예는 있으나 후대에 지은 창덕궁의 演慶堂은 ‘延慶堂’으로 잘못 표기된 예가 없다.) 

모든 가정들이 사실이라면 영조가 김두량 부자를 시켜 이백의 정취와 백성들의 농사짓기를 화폭에 담게 하고 창경궁 연경당에서 그림을 감상하고 그림에 화제를 쓴 것이 1744년, 그로부터 18년 후, 연경당에서 멀지않은 문정전 앞마당에서 자신의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비극이 행해졌다. 




* 궁궐 건물의 기록에 대해서는 서울시립대학교 이강근 교수님께서 꼼꼼히 자료 찾아 알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SmartK C.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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