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의 소
윤두서 이후 풍속도가 많이 그려지는 시기가 되면 그림에서 보다 다양한 소가 인간들의 삶 중의 한 컷으로 등장한다. 김홍도(1745-?)가 남긴 행려풍속도나 산수화 중에는 소가 포함된 그림이 상당히 많다.
먼저 김홍도가 서른 네 살 때 강희언의 집에서 그렸다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행려풍속도 병풍의 <노상풍정> 폭에 소가 나온다. 행려풍속도는 선비가 세상을 여행하며 바라본 세상의 풍정을 담은 그림으로, 대개의 폭에서 나귀를 타고 가는 선비가 주인공 격으로 그려진다. <노상풍정>에 펼쳐진 거리에서 다양한 세상살이 구경 중인 선비는 말을 타고 가는데, 소를 타고 지나가는 여인과 그 가족들을 만난다. 무릎에는 아이를 앉혔으니 아이 엄마일 테고 아마도 아이의 아버지인 듯한 이가 더 어린 아이를 업고 함께 지나가는데, 선비는 과감히도 부채로 얼굴을 살짝 가린 상태에서 여인과 눈을 마주한다. 이런 연출로 선비의 마음에 스쳤을지 모를 설렘을 관람자들도 동조하며 상상하게 해 주고 있다.
김홍도 <노상풍정> 행려풍속도병 중, 1778년, 국립중앙박물관
<노상풍정> 부분
이 장면이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심어줬던 것인지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해지고 있는 그림 등에 이 장면이 재등장하기도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또다른 김홍도 풍속화첩에도 그림 전체 구성과 방향은 다르지만 선비가 지나가다가 소를 탄 여인네를 만나는 비슷한 주제를 담은 그림이 포함되어 있다.
김홍도 <노상파안> 풍속도화첩, 28.1x23.9cm, 국립중앙박물관, 보물527호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 중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병풍 그림 스타일 8폭 연작 중 여섯 폭에 소가 끼어들었다. 김홍도에 영향받은 많은 후배 화가들이 농촌의 삶을 표현할 때 소를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넣게 되었다. 풀밭에 앉아 쉬거나, 목동을 태우고 다니거나, 밭을 갈거나 짐을 싣고 일하는 모습의 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傳 김홍도 풍속도 연작(종이에 수묵담채, 각 108.8x44.7cm) 중에서 소의 모습들
김홍도의 소그림을 다시 좀 더 살펴보면, 그의 대표작인 리움 소장 단원절세보첩(병진년화첩) 중에서 강을 건너는 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국립박물관 소장 풍속도 화첩 중 <도선>에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사람들 사이에 짐을 등에 얹은 소도 그려져 있는데 정면의 모습도 있어서 흥미롭다. 그가 그린 풍속화나 산수 그림 속의 소와 앞에서 등장했던 군선도 그림 속 노자가 탄 소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김홍도 <기우도강> 단원절세보첩(병진년화첩), 1796, 종이에 수묵담채, 26.7x31.6cm, 리움, 보물 782호
김홍도 <경작도> 단원절세보첩(병진년화첩), 1796, 종이에 수묵담채, 26.7x31.6cm, 리움, 보물 782호
김홍도 <기우부신> 비단에 담채, 35.7x25.5cm, 간송미술관
김홍도 <춘일우경> 행려풍속도병, 1795년, 100.6x34.8cm,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논갈이> 단원풍속화첩, 27x22.7cm,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도선渡船> 풍속도화첩, 28x23.9cm,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527호
김홍도보다 앞선 시대, 풍속화를 선구적으로 그린 조영석(1686-1761), 재미있는 그림들을 많이 남긴 김득신(1754-1822)의 작품 속에서도 소의 모습을 꽤 많이 찾을 수 있다. 개성 있는 동물의 모습 덕에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김득신의 풍속화첩(보물 제 1987호)에도 역시 소가 포함되어 있다.
조영석의 사제첩麝臍帖 중 <소 젖 짜기> <어미소와 송아지>(부분) 종이에 수묵담채, 39×29.6㎝, 개인
김득신 <엽피남무> 종이에 수묵담채 32x40.5cm
김득신 <춘산귀우> 종이에 수묵담채, 33.3x27.5cm, 간송미술관
전 이형록(1808-1883) <설중향시> 종이에 담채, 28.2x38.8cm, 국립중앙박물관
양기훈(1843~ ?) <밭갈이> 종이에 먹, 27.3x39.4cm, 국립중앙박물관
백은배(1820-1901) <기우원행> 종이에 수묵담채, 27.8x23.4cm, 간송미술관
조중묵(미상, 19세기) <고류청풍> 지본담채, 32.0x22.8cm, 간송미술관
기록화 중의 소
궁중이나 양반들의 행사를 기록한 그림 중에는 행사 주변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양념처럼 그려 넣기도 하는데, 구경꾼이나 말 정도가 많고 소가 표현된 경우는 드물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연장 전시중인 평안감사향연도에 수많은 사람들과 말 등의 동물이 조금 등장하는데, 그 중 연광정연회도와 부벽루연회도에 자그맣게 소가 한 마리씩 있다.
(위)연광정연회도의 소, 부벽루연회도의 소
청계천의 수해를 막기 위한 준천 행사에는 강 바닥을 파기 위해 소가 동원되었으니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다만 많은 소들이 동원되었음직한데 몇 마리 그려지지 않은데다 모습도 단순하게 표현되었다.
어전준천제명첩 부분(1760). 부산시립박물관
문인화 중의 소
조선 후기 선비의 삶과 철학을 주되게 다루게 되는 문인화에서 소는 그다지 인기 있는 동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선비가 어떤 동물을 타고 간다면 등장 빈도 면에서 말이나 나귀가 소를 압도한다. 이인문, 최북, 심사정의 등의 그림에서 간간히 소를 확인할 수 있다.
최북(1712-1760) 기우귀가도(騎牛歸家圖) 종이에 담채 24.2x32.3cm 국립중앙박물관
최북 <목동귀우>
심사정 <수하수우도> 종이에 담채, 27x18.3cm, 간송미술관
이인문(1745-1824) <도봉원장> 종이에 담채, 26.5x33cm 개인
이인문 <목양취소> 종이에 담채 30.8x41 간송미술관
전 박제가 <목우도> 종이에 담채, 25.5x33.7cm, 개인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
전통적인 소 그림하면 역시 절의 담벼락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십우도(심우도)를 빼 놓을 수 없다. 동자가 잃어버린 소를 찾아가는 과정을 진리를 찾는 여정의 은유로 표현한 열 개의 장면 중 ③ 견우見牛 ④ 득우得牛 ⑤ 목우牧牛 ⑥ 기우귀가騎牛歸家 씬에 소의 모습을 그린다.
텐쇼 슈분, <십우도> 부분, 15c, 32x181.5cm, 지름 14cm, 쇼코쿠지박물관
근대 산수 속 농부와 소
청전이나 소정 등 근대에 와서 많이 그려졌던 대형 산수화에 가득 찬 수목 사이,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미니어처 같이 아주 작게 인물과 함께 소를 그려넣은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질문이 왕성했던 시기, 소박한 농촌의 풍경으로 답하는 경우 또한 많아진 듯하다.
이상범(1897-1972) <추경산수> 1957년, 종이에 수묵담채, 95.8x260.7cm, 개인
이한복(1897-1940) <도강> 종이에 수묵담채 25.5x30cm 개인
근대 이전에 그려진 남아 있는 회화 작품으로서의 소 그림은 생각보다 부실해서 가까운 조선 시대의 소 그림 중에서 중국의 영향으로 그려진 남방의 물소 그림을 제외하고 우리 토속의 소 그림은 그리 구체적이거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는 못했다. 중국 화보를 모방한 남방 물소 그림은 영모화 같은 분위기이고, 밭갈이에 동원된 풍속화에 등장하는 소는 우리 눈에 익숙한 누렁이의 모습이다. 조선 중기 한반도를 덮친 소의 역병으로 소의 종자가 마를 지경이어서 몽골에 소 사절단을 파견해 들여와 종자가 바뀌었다고도 하니 굳이 우리 그림에서 한우의 원형을 찾느라 애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중섭, 장욱진, 문학수, 진환 등의 근현대 화가들이 우리 땅의 소를 기운차게 그린 덕에 우직한 이미지의 소가 한국적 이미지로 성공적으로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