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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개에 기댄 채 보시라 - 동기창과 심주를 따라 그린 산수도 두루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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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姜世晃, 1713-1791), <방동현재산수도(倣董玄宰山水圖) • 계산심수도(溪山深水圖)〉 1749년, 23x462.1cm,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 <방 동현재 산수도>


강세황 <계산심수도>

아픈 사람에게는 어떤 선물이 좋을까. 집안에 갇혀 꼼짝하지 못하는 마음을 헤아려 넓은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을 화면에 담아 시름을 잊도록 해주는 선물이라면 그 순간만큼은 아픔도 잊고 고마움만 남을 것이다.

조선 후기의 화단을 호령하던 실세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젊었던 시절(영조 25년, 1749년, 37세)에 몸이 아픈 누군가를 위해 긴 두루마리에 산수 그림 두 폭을 담았다.

두 그림 모두 유명한 중국 화가의 화풍을 본떴다고 한다. 첫 번째 그림은 동기창(董其昌)의 <동원필의산수도(董源筆意山水圖)>를 본떠 그린 것이고, 두 번째 산수도는 심주(沈周)의 그림을 본떠 그렸다고 발문에서 밝히고 있다. 특히 첫 번째 그림은 동기창이 동원 스타일을 모방하여 그린 그림을 다시 강세황이 모방해 그렸다는 것이니 그 시대의 ‘방작’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다수 일어났는지 짐작할 만하다.

조선의 모든 화가들이 방작에 열을 올린 것은 아닌 것 같다. 겸재 정선이나 윤두서 같은 화가들은 중국 화가의 방작을 남긴 예가 없고, 강세황이나 심사정 같은 이들은 다양하게 많이 전해지고 있는 편이다. 방작에 대한 태도는 그 화가의 스타일과는 의미 있는 연관 관계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산수화나 수묵화 전통에 대한 생각과 시대의 분위기, 환경의 영향 등에 따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예술이 창의성의 결정체라면 동양화의 방작 전통은 예술의 범주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겠지만 그것은 연습을 위해 따라 그려보는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는 것 정도로 이해하고 일단 넘어가자.

첫 번째 그림은 언급했듯이 동기창의 그림 <동원필의산수도>를 모방하여 그리면서 <방동현재산수도>라 이름붙였다. 방(倣)누구누구○○, 누구누구○○필의(筆意)라고 쓰면서 방작임을 밝히는 경우가 많다. 명나라 때 사람인 동기창(1555~1636)은 남종화 북종화를 나눈 미술이론가로 문인화를 한 수 위로 치켜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올린 사람이다. 그가 강남 산수화 양식의 근본, 남종화의 전거로 세운 오대 사람 동원(미상~962)의 산수화를 방작한 뜻깊은 그림(이라고 여겨지는 그림)을 강세황이 보았고, 이를 따라 그렸다는 것이다.  


<방동현재산수도> 부분


첫 번째 그림의 제발에 그림의 연원을 드러냈다.

"동현재(동기창)가 일찍이 북원(北苑=동원)의 필의를 모방하여 그림을 그렸다. 나도 다시 따라서 이것을 그렸지만 동현재와 거리가 멀다. 게다가 북원에 비긴다면 조금도 비슷한 곳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종이가 딱딱해서 먹이 잘 먹히지 않았으니 어찌 볼 만하겠는가.
후일에 다시 좋은 종이를 찾아서 한 번 더 그려 볼 터이니 수지(綬之)는 우선 이 두루마리를 간직하고 기다려라.“


수지(綬之)는 그림을 받는 사람이다. 두루마리 종이를 내밀며 강세황에게 그림을 부탁한 이 사람은 영중추부사를 지낸 이복원(李福源, 1719-1792)이라고 생각되고 있다(그의 자(字)가 수지). 자신이 처한 상황과 관계없이 자존감 높던 강세황이지만 겸손하게, 자신보다 조금 어린 지인에게 방작 산수화를 그려주며 동기창이 동원 그림을 모방한 유명한 그림을 자신도 방작했으나 동기창에도 못미치고 동원에는 한참 먼 그림이 되었다고 썼다. 실제로도 동원이나 동기창의 그림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설명에 의하면 이 그림은  ‘힘찬 강세황 중년의 묵법’이라고 되어 있다. 1749년이라 밝히고 있으니 강세황이 만 36세 때 그린 그림이다.


동원 <瀟湘圖> (부분) 北京故宮博物院


동기창의 산수도 (부분)


심주 <계산추색> (부분)


강세황 두루마리의 두 번째 그림 <계산심수도>는 앞의 그림보다 능숙하고 성긴 대신 부드러운 화필의 느낌과 투명한 담채가 돋보인다. 심주의 느낌이라면 연하게 칠한 위에 부분적으로 진한 먹을 더한 효과를 잘 쓴 부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계산심수도> 부분


이어지는 다음 제발은 다음과 같다.

"수지가 병중에 이 두루마리를 가지고 와 그림을 청하였다. 이에 현재(동기창)의 수묵산수 한 폭을 임모하고 아래에 남은 종이가 있기에 다시 <계산심수도> 한 폭을 그렸으니, 대개 심석전沈石田(심주沈周)의 뜻을 모방한 것이다. 비록 매우 거칠고 조잡하지만 그런 대로 진실한 자세가 있다. 수지가 베개에 기댄 채 한 번 펼쳐보면 아마 진림陳琳의 초격草檄이나 왕유王維의 <망천도 輞川圖>처럼 사람의 질병을 치료해 줄 것인지 모르겠다. 이를 적어서 한 번 웃는 자료로 삼노라."   

수지라는 이가 아픈 와중에 그림을 청하자, 누워서 그림을 보면서 병이 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렸다며 웃으며 가볍게 보라고 한다. 여기에 나오는 진림의 '초격'과 왕유의 <망천도>는 그림을 보고 병이 나은 전설적 사례이다.


진림(陳琳, ? ~ 217년)은 중국 후한 말기의 관료이자 문장가로 삼국지에 등장하는 원소의 휘하에 있었다. 그는 정치나 전쟁 때 상대방에게 사용되던 과격한 선언문, 격문(초격)을 잘한 것으로 유명하다. 원소가 패한 후 조조에게 투항했는데, 그간 원소 휘하에서 진림이 자신을 향해 썼던 비방 격문을 추궁하지 않고 진림의 재능을 사서 격문을 담당케 했다고 한다. 조조는 진림의 훌륭한 문장으로 지병인 두통을 잊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또 하나의 예 <망천도>는 송대의 문인 태관泰觀의 예로 보인다. 그가 객지에서 병들어 누워있을 때, 지인이 보여준 당 화가 왕유(王維, 701~761)의 <망천도輞川圖>를 보고 마치 왕유와 함께 망천에서 차를 마시고 글을 짓는 듯한 느낌을 받고 며칠 만에 병이 나았다고 하는 기록이 『위략緯略』卷6에 있다.


왕유 <망천도> 비단에 채색. 29.8 X 481.6 cm. 일본 후쿠오카 쇼우후쿠지(聖福寺) 소장.


16세기 사람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격문 읽은 것도 두풍을 낫게 하고 망천도도 사람의 병을 낫게 한다’는 말을 남겼으니 진림의 격문과 왕유의 망천도가 시각문화 쪽 치료제 역할의 전형적인 예로 사람들이 즐겨 읊었으리라 여겨진다. 누워서 이 그림을 보면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처럼 그림을 보고 병이 나을지 누가 알겠느냐는 것이다. 그림을 보고 병이 낫기를 바란다는 좋은 뜻을 쿨내나게 표현했다.

표암은 산수 외에도 다방면에 테크닉을 발휘한 작품을 남겼고, 비평가나 이론가로서도 조선 후기의 독보적인 존재다. 이 동원과 심주의 이름을 빌면서도 그닥 조심스럽거나 연연하지 않는 모습의 당당함이 부럽다.




SmartK C. 관리자
업데이트 2024.12.03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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